모든 상(相)에서 상(相)아님을 본다면 여래를 본 것이다.

2020. 2. 20. 10:18성인들 가르침/초기선종법문


[본문]

: "어떠한 것이 보살행입니가?"

: "현성(賢聖)의 행도 아니고 범부의 행도 아닌 것이 보살행이다. 보살도를 수학할 때에 세간의 법을 취하지도 아니하고  세간의 법을 버리지도 않으며, 능히 심식(心識)에 즉하여 입도(入道)하는 것을 범부와 성문은 측량할 수 없다.

이른바 일체사(一切事)의 자리, 일체색(一切色)의 자리, 일체악업(一切惡業)의 자리에서 보살은 이를 써서 항상 불사(佛事)를 행하고, 항상 열반을 이루니 모두 대도(大道)이다. 일체처에 즉하니 처(處)하지 않는 곳이 없어 (처하는 곳마다) 바로 법의 자리임을 본다. 보살은 일체처를 버림이 없고, 일체처를 취함이 없으며, 일체처를 간택함이 없어 언제 어디서나 불사를 행한다. 생사에 즉하여 불사(佛事)를 행하고, 미혹에 즉하여 불사를 행한다.

[해설]

보살행의 진수를 드러내었다. 심식(心識)에 즉(卽)함이란 곧 당념당처에 즉함이니 그 심식과 하나가 되어 그심식이 대상으로 지각(知覺)되지 않는 것이다. 그 당념당처가 지각됨도 없고 견(見)함도 없으며 분별함도 없다. 그런데 그것이 지각된다면 이는 망령이고 귀신의 경계이다. 마음 뿐이어서 항상 마음 가운데 있으니 그 마음이라는 상이 지각됨이 없어야 한다. 그런데 마음이 느껴진다면 이 또한 망령이다. 항상 일체처(법계) 가운데 있는지라 일체처가 따로 지각됨이 없어야 당연하다. 마치 나무 가운데 들어가 있으면 그 나무의 상이 보이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런데 생사와 미혹, 번뇌, 해탈이 따로 지각된다면 이 또한 망령이다. 그러한 것은 단지 명(名), 상(相), 망상(분별),일 뿐이다.

그래서 능가경의 오법(五法)법문인 명(名),상(相),망상(分別), 정지(正智0,여여(如如) 가운데 명,상,망상(분별)이  얻을바 없는 환화(幻化)임을 요달(了達)한 지혜가 정지(正智)인데 이 정지는 바로 현행의 명,상,망상의 속성을 보아 얻게 된 것이다. 그 정지(正智)를 통해 명,상,망상이 적멸함에 항상 여여하게 된 것이다. 또한 그 정지 또는 본래 일어난 바가 없는 명,상,망상에서 일어난 까닭에 그러한 실(實)이 있었던 것이 아니며, 따라서 얻을 바 없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 이루어진 여여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뜻은 <능가경>에 설명되어 있다. 그래서 어떠한 것도 얻을 바 없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수행을 통해 무엇을 얻었다. 증득하였다 함도 망상이라 하는 것이다.


[본문]

: "제법(諸法 : 모든 존재)이 무법(無法: 없는 것)인데 어떻게 작불(作佛)하는 것입니까?"

: "작처(作處)에 즉하여 작처가 아니고, 작(作)하는 것이 없으며, 선처(善處)에 즉하여 선처가 없으니 불(佛)을 본다. "

[해설]

행하되 행함이 없고, 행하는 자리에서 행하는 자리가 없다. 그래서 표현은 작불(作佛)이라 하나 작(作)하거나 작(作)하는 곳이 있을 바 없다. 그것이 여래를 견증(見證)하는 길이다.


[본문]

: "불(佛)을 본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 " 탐(貪)에 즉하여 탐상(貪相)을 보지 아니하고 탐이라는 법(法)을 보며, (苦에 즉하여) 고상(苦相)을 보지 아니하고 고라는 법을 보며, (몽(夢)에 즉하여) 몽상(夢相)을 보지 아니하고 몽이라는 법을 보니, 이를 일체처에서 불(佛)을 보는 것이라 한다. 만약 상을 본다면 바로 일체처에서 귀(鬼)를 보는 것이다. "

[해설]

여기서 탐상(貪相),고상(苦相) 등과 탐법(貪法),고법(苦法) 등의 차이를 잘 알아야 한다.

탐상,고상 등은 탐(貪)과 고(苦)의 감정으로 드러난 것이고, 탐법,고법 등은 단순히 하나의 존재(법)으로서의 탐과 고 등일 뿐임을 가리킨다. 즉 일체의 현상은 모두 불가사의(不可思議)이고, 분별을 넘어서 있는 것이다. 또한 본래 상을 떠나 있다. 그래서 상(相)으로 봄은 귀(鬼)를 봄이라 하였다. 그러하니 탐심이 일어났을 때 이를 회피하거나 없애고자 할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의 상을 떠난 부사의(不思議)의 법으로서의 탐(貪) 자리에 그대로 안주한다면 탐심의 상이 사라진다. 탐심에 즉하면 탐심의 상을 볼 수 없고 단지 그 법만 있어 그 영향을 받지 않게 된다. 일체법은 그 실(實)이 없는 그림자요 환(幻)이며, 수중월(水中月)과 같은 것이기에 그것이 무엇에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다. 단지 미혹으로 인해 수중월과 같고 화(幻化)임을 몰라서 그 영향을 받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그 법에 감정이 실리어 영향 받을 것이 아니다. 마음에 일어나는 이러한 경계에 대하여 이러한 뜻이 구현되면 바로 부동심(不動心)이 되어 견불(見佛)하게 된다. <금강경>에 "만약 모든 상에서 그 상이 아님을 보면 바로 여래를 본 것다"고 함도 바로 그 뜻이다.


                                                -담림 편집,박건주 역주 <보리달마론> 운주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