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봉선사법문] 망두석과 화두

2019. 8. 9. 19:41성인들 가르침/과거선사들 가르침



법좌에 올라 주장자를 세 번 치고, 한참 묵묵히 있다가 이르시기를

하늘이 높으니 사람이 헤아릴 수 없고

땅이 두터우니 누가 어찌 알겠는가

흰구름은 편편히 산마루를 지나고

물은 잔잔히 시내 아래로 흐르네

天高人莫測

地厚誰寧知

白雲片片嶺頭過

流水潺潺澗下流

누구든지 활발하게 산 정신으로 이 세상을 살아야 한다.

낙엽이라도 아주 활기로워서

하늘에 가득한 바람과 비에 훨훨 난다

落葉方能生活氣

滿天風雨碧空飛

그러니 낙엽이 떨어져 있으면 ​사람도 밝고 개도 밟아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지만 바람과 비에 벽공(碧空)으로 활기롭게 난다. 낙엽도 벽공을 풀풀 나는데 만물 중에 가장 슬기로운 사람이 좀 실패를 당했다 해서 근심에 잠겨 있대서야 되겠는가.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힘을 내야 한다. 이것이 이른바 끊어진 곳에서 다시 사는 (絶後更生) 패배할 수 없는 인간인 것이다.

자주 소옥이를 부르지만 소옥이에게는 일이 없다

다만 낭군에게 들어오라 알리는 소리일 뿐

頻呼小玉元無事

只要檀郞認得聲

이 시에 얽힌 고사(古事)는 참으로 재미있다.

양귀비(楊貴妃)가 밤으로 자주 그의 몸종 소옥이를 부른다.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실은 그의 정부(情夫) 안록산(安祿山)을 부르는 암호로써 소옥아 소옥아 하고 부르는 것이다.

이 게송을 소염시(小艶詩)라고 하는데, 오조법연(五祖法演) 스님이 손님과 이 시(詩)를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원오극근(園悟克勤)선사가 도를 알았다.

부처님이 설법하시려고 사자좌에 앉아 있는데 외도(外道)가 와서 물었다.

"있는 것도 묻지 않고 없는 것도 묻지 않습니다."

유무(有無) 밖의 말을 하여 달라는 말이다.

부처님이 묵묵히 있다가 법좌에서 내려 오셨다.

외도가 절을 하고는 "참으로 법문 잘 들었습니다."하고 물러갔다.

아난존자(阿難尊者)가 곁에 모시고 있다가 묻기를 " 그 외도가 무엇을 알고 갔습니까?"하자,

"천리마는 채찍 그림자만 보아도 잘 달린다." 하셨다.

모두들 자기 찾는 이 일이 급한 것인데 이렇게 바쁜 것은 바쁘지 않다하고, 바쁘지 않은 일을 바쁘다고 야단들이다.

그래서 여기 소변소 이름으로 휴급소(休急所)라고 하였는데, 아무리 바쁘더라도 ​소변부터 보아야 다른 일을 할 수 있지 별 수 있나. 그러나 거기서 급한 것을 좀 쉬어가라는 뜻이다.

그리고 변소를 화장실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해우소(解憂所)라 하였다.

먹을 때는 좋지만 가스가 꽉 차 있으면 배설시켜버려야 된다는 말이다. 그래야 속이 편하고 좋다.

배에도 하찮은 가스가 꽉 차 있으면 속이 불편한데 마음 가운데 못된 생각, 하찮은 생각, 어두운 생각을 확 비워 버리면 얼마나 좋은가. 대소변 보는 일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될지 모르나 절대로 그렇지 않다.

여기에 인생의 심각하게 큰 일과 근본 문제가 달려 있다. 이 대소변 보는데 아주 큰 진리가 있는 것이다.

여러분이 자고나면 세수를 하고 화장도 하지만, 마음 가운데 때가 있고 없는 것은 생각도 하지 않는다.

하루에 한 번씩만 내 마음 가운데 하찮은 생각이 있나 하고 살펴 볼 일이다.

무생곡(無生曲)이 하나 있다.

동천에 걸린 달아 우주 만상 빛이 되어

영축산 높은 봉에 너의 얼굴 나타났네

만고에 불멸의 정신은 너도 또한 가진 듯.

예전에 비단장수가 비단을 팔려 다녔다. 산을 넘다가 몸이 고단해서 양지바른 곳에서 비단짐을 베고 낮잠을 잤다.

한참 자고 일어나 보니 베고 자던 비단을 잠든 사이에 누가 훔쳐갔다.

비단을 팔아서 먹고 살아가는 처지에 그것을 누가 훔쳐갔으니 살 길이 막연해서 고을 원님에게 소지를 정했다.

소지란 말은 지금으로 치면 진정서를 낸다는 말과 비슷하다.

원이 비단장수에게 자세히 말하라고 했다.

"예, 소인이 비단을 팔러 다니다가 비단짐을 베고 잠든 사이에 어느 놈이 비단짐을 몰래 가져갔습니다."

"그럼 누가 본 사람이 없느냐?"

"아무도 본 사람이 없습니다."

"무엇이 봐도 봤겠지."

원이 자꾸 다그쳐 묻자 비단 장수가 말했다.

"아무도 본 사람은 없습니다. 망두석이나 봤으면 봤을까?"

"망두석이 있더냐?"

"예"

"그럼 사령들은 듣거라. 그 망두석이 범인을 봤을 테니 속히 망두석을 잡아 오너라."

원의 명령이라서 어쩔 수 없이 망두석을 잡으러 가지만 아전들이 조소를 했다.

"망두석이 보기는 무얼 봤다고 - - - 사또가 참 시원치 않군."

아전들이 망두석을 묶어다 동헌 뜰에 엎어 놓았다.

원이 망두석을 보고 심문을 시작한다.

"망두석 듣거라 ! 비단 장수가 비단을 베고 자다가 비단을 잃어버렸다고 하는데 네가 범인을 보았을 테니 본 대로 바로 말하렸다 !"

하지만 망두석이 어디 말을 할 수 있나. 원이 노발대발하며 영을 내렸다.

"저놈을 장판 위에 올려 놓고 매우 쳐라 !"

사령들이 곤장으로 망두석을 토닥토닥 치니, 이 희안한 광경을 지켜보고 서 있던 구경꾼들이 어찌나 우습던지 폭소를 타뜨리고 아전들도 웃고 모두들 웃으며 속으로 저 세근 없는 사또의 하고 있는 꼴 좀 보라는 듯이 수근거리자 사또가 노발대발하며 다시 영을 내렸다.

" 저기 웃는 놈들을 모조리 잡아 가두어라. 사또가 정사를 다스리는데 무엄하게 조소하고 저렇게 소란을 피우니, 저런 놈들은 좀 때려야 하니까 우선 가두어 놓아라 !"

사또가 명령을 내려 잠아 가두게 하자, 도망친 사람도 있고 미처 달아나지 못하고 붙들린 사람이 한 삼십여명이 되었다. 사또가 아전을 시켜 은근히 옥에 갇힌 사람들에게 전하기를,

"너희들이 사또께서 치민치정(治民治政)하는데 조소하고 소란을 피웠으니, 그 죄로 비단 한 필씩만 가져오너라. 그러면 놓아줄 것이다."

모두들 어서 나갈 생각으로 그 가족되는 사람들에게 비단 한 필씩 가져 오게 해서 전부 나갔다.

그렇게 해 걷어들인 비단을 쌓아놓고 비단장수에게 네 비단이 여기 있는가 찾아보라고 하니, 이것이 제 것이올시다. 저것도 제것이 올시다 하며 여러 필을 찾았다.

사또가 나졸을 시켜서 " 이 비단을 어디서 샀는가, 그 산 곳과 사람을 비단 가져온 사람에게서 알아오너라."

여러 필을 골라가지고 산 곳을 캐보니 아무 동네 아무개에게 산 것이 드러나서 그 사람을 잡아들여 엎어놓고 몇 차례 때리니 전부 얘기한다.

"제가 어느 곳을 지나다 보니까 비단을 베고 자기에 욕심이 생겨서 가져갔습니다."

다른 사람이 비단은 다 임자에게 돌려주고 비단장수의 비단은 전부 찾아 주었다.

망두석을 곤장 칠 적에 모두 웃었지만 진범인 도둑이 거기서 나올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어떤 것이 불법(佛法)의 적실한 뜻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庭前柏樹子)이니라."

자기 자성(自性)자리를 찾는데, 왜 얼토당토 않은 잣나무는 찾는가.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마른 똥막대기니라."

변소의 똥 젓는 장대란 말이다. 부처가 - - -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삼이 서 근(麻三斤)이니라."

이 모두가 내 마음 찾는 데에는 얼토당토않는 십만 팔천 리 밖의 말이다.

그러나 이것을 들어 의심하고 참구(參究)하여 구경(究竟)에 나아가 무아(無我)의 경지에 이르면 앞에 말한 망두석을 잡아다가 때리는데 도둑놈이 잡히듯이 무위진인(無位眞人, 위가 없는 참된 사람)이 나타난다.

얼토당토 않은 것이지만 그것을 자꾸 참구하면 자기의 본성(本姓)을 볼 수 있다.

망두석을 치는데 도둑놈이 나오고, 마른 똥막대기, 또는 삼 서근 등을 참구하여 구경을 가면 위가 없는 참된 사람이 나온다.  이 몸을 자기 라고 하지만 과학적으로 합리적으로 이론적으로 따져봐야 이것은 부모의 물건이지 내 물건이 못된다. 참된 자기는 눈 앞에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역력히 외로운 밝은 그 자리가 참된 자기이나 그것을 알 수 있을 때까지  ​공안(公案)을 참구해야 한다.

요사이 처음 발심하여 출가한 이들에게 말하여 주기를

"바보가 되거라. 사람 노릇하자면 일이 많다. 바보가 되는데 사람이 나온다."한다.

참선(參禪)하는 이들은 마삼근(麻三根)이나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나 무(無)자나 똥막대기 등 천칠백 공안 중에 하나를 들고 자꾸 참구하여 나아가 지극히 고요한 경지에 이르면 본래 이 자리가 고요한 것이지만 편안함이 그 어디에도 비할 수 없는 아늑함이 생긴다.

몸과 마음이 지극히 편안해진다.

그러다가 더 나아가면 내 마음 본래 맑은 지극히 밝은 그 경지에 이른다.

거기서 밝은 데 이르러 통하게 된다. 어두운 것이 없어지면 밝아진다.

이 도리는, 오고 가고 죽고 사는 것이 본래 공(空)하고 알고 모르고가 없는 것이나 말을 하자니 이런 말을 하게 된다.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려 하면 자기도 물에 들어가야 하는 격이다.

옛 성현이 말하기를,

범부는 유(有)에 머물고 소승(小乘)은 무(無)에 머물고, 보살(菩薩)은 유무(有無)에 머물지 않나니

이 또한 자기 마음으로 망상을 내는 것이다.

색(色)이 색이 아니니 저 색에 물들지 않으며, 색이 비색(非色)이 아니므로 비색(非色)에도 물들지 않는다.

또한 견(見)을 보지 않으며, 불견(不見)함도 보지 않으니 이 이름이 견법(見法)이며,

안다는 지(知)를 알지 못하며 또한 알지 못하는 것 까지라도 알지 못하니 이 이름이 지법(知法)이다.

이러한 견해를 짓는 이것을 이름하여 망상(妄想)이라 하였다.

수행하는 이는 이것을 재삼 살펴볼 일이다.

달빛은 구름에 어려 희고

솔바람은 이슬에 젖어 향긋하네

좋다 이 참소식이여

머리를 돌이켜 자세히 보아라.

月色和雲白

松聲帶露香

好笛眞消息

回頭仔細看

할 일할하고 법좌에서 내려 오시다.

                                                         - 경봉스님 설법집 <니가 누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