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7. 15. 09:56ㆍ성인들 가르침/향기로운 시
<끊긴 전화>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들었다 말이
없었다 잠시 그렇게 있다 전화가 끊어졌다
누구였을까 깊은 밤 어둠 속에서 아직도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가 두근거리는 집게손가락으로
내 가장 가까운 곳까지 달려와
여보세요 여보세요 두드리다 한 발짝을
더 나아가지 못하고 넘어서지 못하고
나도 그러했었다 나도 이 세상 그 어떤 곳을 향해
가까이 가려다 그만 돌아선 날이 있었다
망설이고 망설이다 항아리 깊은 곳에
버린 것을 눌러 담듯 가슴 캄캄한 곳에
저 혼자 삭아지도록 담아둔 수많은 밤이 있었다
그는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채 나 혼자만 서성거리다
귀뚜라미 같은 것을 허공에 던지다
단 한 마디 전하지 못하고 돌아선 날들이 많았다
이 세상 많은 이들도 그럴 것이다.
평생 저 혼자 기억의 수첩에 썼자 지운
저리디절은 것들이 있을 것이다.
두 눈을 감듯 떠오르는 얼굴을 내리닫고
침을 삼키듯 목 끝까지 올라온 그리움을 삼키고
입술 밖을 몇 번인가 서성이다 차마 하지 못하고
되가저간 깨알 같은 말들이 있을 것이다
한 발짝을 더 나아가지 못하고 넘어서지 못하고
-도종환-
<행복>
저녁 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힘들 때
마음 속으로 생각할 사람이 있다는 것
외로울 때
혼자서 부를 노래가 있다는 것
- 나태주-
<부치지 않은 편지>
풀잎은 쓰러져도 하늘을 보고
꽃 피기는 쉬워도 아름답긴 어려워라
시대의 새벽길 홀로 걷다가
사랑과 죽음의 자유를 만나
언 강바람 속으로 무덤도 없이
세찬 논보라 속으로 노래도 없이
꽃잎처럼 흘러흘러 그대 잘 가라
그대 눈물 이제 곧 강물 되리니
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 되리니
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 새여
뒤돌아보지 말고 그대 잘 가라
-정호승-
<새로운 길>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 - - 내일도 - - -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윤동주-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
나는 문득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
누군가 이사 오길 기다리며
오랫동안 향기를 묵혀둔
쓸쓸하지만 즐거운 빈집
깔끔하고 단정해도
까다롭지 않아 넉넉하고
하늘과 별이 잘 보이는
한 채의 빈집
어느 날
문을 열고 들어올 주인이
'음, 마음에 드는데 ....'
하고 나직이 속삭이며 미소 지어줄
깨끗하고 아름다운 빈집이 되고 싶다.
-이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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