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는 자기의 성품을 돌이켜 듣는다

2018. 12. 26. 10:16성인들 가르침/과거선사들 가르침



화두가 아직 잘 들리지 않고 망상과 혼침이 많은 사람은,

'염불하는 것은 누구인가(念佛是誰)?' 할 때의 그 '누구인가(誰)?'를 보라(看).

망상과 혼침이 적어 질 때까지 보다가 '누구인가'가 사라지지 아니할 때, 곧 그 한 생각이 일어나는 곳을 보라.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을 때가 되면 무생(無生)이니, 능히 일념무생을 보게 될 것이다.

이를 이름하여 참으로 화두를 본다(看話頭)​고 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관세음보살의 '반문무자성(反聞聞自性: 듣는 자기의 성품을 돌이켜 듣는다)'​하는 것이 어떻게 참선이 되느냐고 묻는다.

내가 이제 말하겠다. '조고화두(照顧話頭; 화두를 비춘다)'라는 것은 바로 그대로 하여금 시시각각 밝고도 또렷한 일념으로 마음빛을 돌이켜(回光) 이 한 생각이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그 자리(不生不滅)를 반조(返照)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반문문자성'이라는 것은 바로 그대로 하여금 시시각각 밝고도 또렷한 일념으로 듣는 자기의 성품을 돌이켜 들으라는 것이다. 회(回)는 곧 반(返)이오, 나지도 아니하고 없어지지도 아니하는 것은 곧 자성이다.

들음(聞)과 비춤(照)은 바로 흐를(順流) 때에는 소리(聲)을 따르고 빛(色;形狀)을 좇아 가지만, 들음(聽)은 소리를 넘어서지 못하고 봄(見)은 빛을 넘어서지 못하며 분별이 뚜렷하다.

그러나 거꾸로 흐를(逆流) 때에는 듣는 자기의 성품을 돌이키게 되어 소리와 빛을 좇지 아니하여, 원래 하나인 정명(精明)한 들음과 비춤이며 별개의 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른바 '화두를 비춘다' 거나 '듣는 자가의 성품을 돌이켜 듣는다' 거나 하는 것이 절대로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만약에 눈으로 본다거나 귀로 듣는다면 이는 소리와 빛을 좇아 사물에게 부림을 당하는 것이어서 순류(順流)라 부른다.

만약에 밝고 또렷하게 빛나는 한 생각이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것' 가운데서 소리와 빛을 좇지 아니하면 이를 역류(逆流)라 하며, 화두를 비춘다고도 하고, 돌이켜 자성을 듣는다고도 한다. (<참선요지> 대성 스님 역)


                                                            덕산 편저 <염불하는 이 뭣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