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7. 11. 09:47ㆍ성인들 가르침/불교 교리 일반
계환 스님 지음 <대승기신론의 세계>
[論- 49 원문번역]
진여 훈습의 뜻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하나는 자체상 훈습이며, 둘째는 용훈습이다.
자체상 훈습이란 무시이래로부터 무루법을 갖추고, 구체적으로는 부사의법을 갖추고 있어 경계의 성품을 만든다.
이 두 가지 뜻에 의해 항상 훈습하여 힘이 있기 때문에, 능히 중생으로 하여금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기꺼이 열반을 구하게 하며 스스로 자신에게 진여법이 있음을 믿어 발심수행하게 하는 것이다.
묻기를, 만약 이와 같은 뜻이라면 일체중생은 모두 진여가 있어 평등하게 다 훈습해야 하거늘 어찌하여 믿음이 있기도 하고 믿음이 없기도 하여 무량한 전후의 차별이 있는 것인가. 모두 응당히 일시에 스스로 진여법이 있음을 알고 부지런히 방편을 닦아 똑 같이 열반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답하기를, 진여는 본래 하나이지만 무량무변의 무명이 본래부터 자성에 차별이 있다. 두껍고 엷음이 같지 않으므로 황하의 모래보다 많은 상번뇌(上煩惱)가 무명에 의하여 차별을 일으키며, 아견과 애염의 번뇌가 무명에 의지하여 차별을 일으킨 것이다. 이와 같이 일체 번뇌는 무명에 의지하여 일어난 것이며, 전후의 무량한 차별을 오직 여래만이 능히 알기 때문이다.
또한 제불의 법은 인이 있고 연이 있어 인연을 구족하여야 이에 (법을) 이룰 수 있다. 나무 속에 있는 불의 성질은, 이것이 불의 정인(正因)이지만 만약 사람이 알지 못하여 방편을 빌리지 않고 능히 스스로 나무가 탄다고 한다면 이런 도리는 없는 것과 같이 중생도 또한 그러하다. 비록 정인이 훈습하는 힘이 있다고 할지라도 만약 불보살, 선지식 등을 만나, 이로써 연을 삼지 않고 능히 스스로 번뇌를 끊어 열반에 들어간다고 한다면 곧 이런 도리는 없을 것이다.
만약 외연의 힘이 있다고 하더라도 안으로 정법(淨法)에 아직 훈습력이 없으면, 역시 능히 끝내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기꺼이 열반을 구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인연을 구족한다면, 이른바 스스로 훈습의 힘이 되고 또한 불보살 등의 자비 발원에 의하여 옹호되므로 능히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열반이 있음을 믿어 선근을 닦아 익힌다. 선근을 닦음이 성숙함으로써 곧 불보살이 보여주고 가르쳐 주며 이롭게 하고 기쁘게 해줌을 만나 이내 능히 진취하여 열반의 도로 향하는 것이다.
[해설]
앞의 망심훈습(妄心薰習)은 진여의 정화(淨化) 작용이 망심을 훈습하여 이를 정화해 나가는 수행과정이었다면, 앞으로 이 단락에서 설명할 진여훈습은 그 진여의 정화작용이 어떠한 것인가에 대한 내용이다. 즉 정화시키는 힘을 말한다. 이 진여훈습(眞如薰習)도 두 가지로 설명하는데, 자체상훈습(自體相薰習)과 용훈습(用薰習)이 그것이다.
전자는 진여가 안에서부터 훈습해 나오는 것으로, 다시 말하면 자기의 본성인 진여의 체대, 상대가 안에서부터 훈습하여 발현하는 것이다. 즉 진여의 체상을 합친 작용으로 범부나 보살을 대상으로 설해진다. 이에 비하여 용훈습이란 진여의 용대(用大)의 작용을 의미하며, 진여의 작용에 보신,화신이 나타나 그것이 외연(外緣)이 되어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다. 즉 진여의 자재로운 작용을 나타낸 것으로, 불타의 활동을 가리킨다. 전자는 안에 있는 진아의 소리를 듣는 것이며, 후자는 밖으로부터 진여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진여에는 체(體),상(相),용(用)의 삼대(三大)가 있는데, 이 중에서 체대(體大)와 상대(相大)를 합한 진여의 작용이 자체상훈습이다. 그리고 심생멸문에서는 자성청정심으로서의 진여의 활동이 있기 때문에 그 활동을 통해서 진여의 체와 속성(相), 작용이 구별되게 된다.
이 진여의 내훈(內熏)이 무시이래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 힘에 의하여 중생은 불교에 눈뜨게 되는 것이다. 즉 중생이 생사의 괴로움을 싫어하는 것은 중생의 망심의 힘이 아니라 진여의 힘에 의하여 괴로움을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열반의 즐거움을 바라고 자기에게 진여법이 있는 것을 믿고 발심수행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가 진여법을 믿는" 것이 이 각(覺)을 향한 작용의 출발점은 되지만, 그것 역시 여래에 의한 가르침이 없으면 모르는 것이 된다.
다시 말하면, 진여내훈의 작용에서 알 수 있듯이 일체중생은 모두 진여를 지니고 있다. 이렇게 되면 이 진여는 불변 평등하게 똑같이 중생에게 훈습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한 가지 모습으로 발심 수행하여 똑같이 열반에 들어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신심이 있는 사람도 있고 없는 사람도 있으며, 발심 전후에도 차이가 있고 장차 발심할 사람도 있다. 즉 본래부터 모든 사람이 본각진여를 지니고 있다면 수행에 의해 모두 깨달음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할 것인데, 현실적으로는 발심수행하여 깨닫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전혀 불가능한 사람도 있다.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하여 두 가지로 답하고 있다.
첫째, 진여는 본래 평등하여 사람에 따라 차별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무량무변한 무명이 있어, 사람에 따라 두터운 무명에 덮힌 사람도 있고 얕은 무명에 덮힌 사람도 있다. 이는 근본무명으로부터 일어나는 무수한 번뇌에 여러 가지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둘째, 불교에서는 인연화합을 말하고 있는데, 어떠한 것이든 내인(內因)과 외연(外緣)이 갖추어져 있어 여러 가지 일이 성취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나무가 불에 타는 것은 나무 자체에 타는 성질이 있기도 하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나무가 타지 않는다. 사람이 나무에 불에 붙는 외연(外緣)을 만나야 비로소 불이 붙을 수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와 같이 일체의 번뇌는 무명에 기준해서 일어나기 때문에 그 전후나 상위(相違) 등은 무명의 차이에 따라 천차만별이라 할 수 있다. 그 차별은 오직 부처님만이 알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인간의 본성은 진여이고, 그 점에서 일체중생은 평등하지만 인간 개개인의 무명은 다르기 때문에 발심수행의 차별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 생각은 인간의 본성인 지혜는 어느 누구나 한결같이 같은 것이지만, 그 지혜를 장애하는 무명은 인간에 따라 각각 다르다고 하는 견해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외부에서 중생에게 작용하는 불보살의 연(緣)이 같지 않다는 점이다. 즉 인(因)만으로 모든 것이 성취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이 있더라도 연에 의해 그것이 개발되지 않으면 인은 힘을 나타내지 않는다. 때문에 제불의 가르침에는 반드시 인(因)과 연(緣)이 설명된다.
어떤 경우에든 인과 연을 겸하여 갖춘 것에 의하여 목적을 달성한다.
중생의 경우도 이와 같아 진여의 내훈이라는 인훈습력(因熏習力)은 어느 누구에게나 있다. 이 훈습력은 어느 누구에게도 있지만 만약 제불보살, 선지식 등에게 지도라는 연(緣)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면 자력으로 번뇌를 끊고 열반에 드는 것은 있을 수 없게 된다. 즉 인이 있어도 연이 없다면 일은 성취되지 않는다. 이것이 연기(緣起)의 도리이다.
그러나 모든 제불 보살의 연력(緣力)은 위대하지만, 연력만으로는 일이 성취도지 않는다. 외부로부터 제불보살이 무언가를 강력하게 작용해 주더라도 중생의 내부에서 무명의 힘이 강렬하기 때문에, 중생들이 생사의 괴로움을 싫어하고 열반을 즐겨 구하는 마음을 일으킬 수 없다. 이것은 인(因)이 결여된 것이다. 그래서 "생사의 고통을 싫어한다"는 말은 '즐거움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열반을 기꺼히 구한다"는 의미에는 열반이 참된 즐거움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깨달음의 세계라는 것은 바로 부처님의 세계이다. 부처님이라는 존재는 지혜를 가지고 자비심을 갖추어 중생을 위해 작용하는 힘이다. 그 지혜와 자비 등이 '상(相)'이며 그것 없이는 부처님이라 말할 수 없는, 불가결의 덕성(德性)과 덕상(德相)이다. 그것을 제외한 부처님 그 자체, 부처님의 '體'라고 하면 그것은 단지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그와 같은 무루법이 중생심에도 본래 갖추어져 있다고 볼 때, 중생의 심진여도 여래장의 이름으로 불린다. 그 여래장이 중생으로 하여금 고(苦)를 싫어하고 열반을 구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이 여기에서의 주안점이다.
-계환 스님(현 동국대 불교학교수겸 불교대학장,불교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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