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정한 마음은 모든 차별의 모습을 떠나 존재한다.

2018. 7. 21. 09:59성인들 가르침/불교 교리 일반



먼저 '청정한 마음은 모든 차별의 모습을 떠나 존재한다'는 측면에서 이 마음이 중도 제일의제(中道第一義諦)로서의 진여일심임을 밝혀 보겠다.

{譯註 : 우리의 청정한 마음은 속제로서의 현상적인 모습과 진제로서의 진리의 모습 등 이러한 상대적인 분별이 없는 공, 불공여래장(空 不空 如來藏)인 중도제일의지(中道第一義諦)로서 허망하지 않고 진실하며 생멸의 변화를 따르면서도 그 본질만은 변치 않는 여여(如如)한 마음이다.}

우리 마음의 자성은 원만하고 원융하며{譯註 : 원만하다는 것은 시공을 초월하여 보편하게 일체의 사물을 모두 포섭할 수 있다는 의미이며, 원융하다는 것은 현상세계의 어떤 장애에도 걸림이 없이 생사로부터 해탈하여 자유자재한 상태라는 것을 뜻한다.} 자성의 자체에 <공덕의 성품인> 대용(大用)을 모두 갖추고 있다. 그러나 이 마음의 자체는 깨달음을 성취한 성인의 지혜로써 알 수 있는 것이지 보통 사람의 망정(妄情)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다.

그러므로 선가(禪家)에서 이르기를 '마음의 자체는 언어로도 미치지 못하며(不可議), 또한 우리의 인식으로도 도달할 수 없는 (不可思)경지'라고 표현하고 있다.

또한 마음의 자체는 언어적 명칭을 가지고 말할 수 없으며, 마음이 그려내는 차별적인 모습을 생각으로써 추리해 낼 수도 없다. 왜냐하면 마음의 자체는 언어적 명칭과 인식으로 그려내는 차별적인 모습을 초월하여 존재하기 때문이다.

마음의 자체가 이미 언어적 설명을 초월하여 존재한다면 상(相)을 가지고 마음의 자체를 논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마음의 자체 모습을 설명하고 싶어도 그것은 참으로 어렵고 불가능하다. 오직 언어적 설명과 차별상을 떠나 존재하는 마음은 명상(名相)으로 논할 수 없고, 다만 차별적인 모습을 분별하는 망상을 돌이켜 한 생각 일어나기 이전 무념(無念)의 경지를 깨달으면 저절로 알(契合)수 있다. 그래서 이 마음의 자체는 항상 일체 차별적인 모습들을 초월하여 존재하며 지극히 평등하고 고요한 상태이다.

한편 마음의 자체는 어떤 모양이 있는 것(亦有相)도 아니며, 그렇다고 아무 것도 없는 상태(無相)도 아니며, 어떤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닌 것(非有相)도 아니며, 또한 아무런 모습이 없는 상태가 아닌 것(非無相)도 아니다. 역시 어떤 모습이 있기도 한 상태(亦有相)도 아니며, 역시 아무런 모습도 없는 상태(亦無相)도 아니다. 한편 우리 마음의 자체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대에 존재하는 모습도 아니며 상,중,하근기의 구별이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너(他)와 나(自)의 상대적인 모습이 있는 것도 아니며, 그 자리는 지극히 고요한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어떤 움직이는 요동체도 아니다. 그리고 번뇌에 물들어 있는 것도 아니며, 청정한 것도 아니다. 마음의 자체는 항상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죽음으로서 아주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또한 밝은 것도 아니며, 어두운 것도 아니다. 이것은 하나의 모습도 아니며 다른 모습도 아닌 일체의 어떤 언어적 설명(四句法)으로 도달할 수 없는 상태이다.

결국 마음의 자체는 일체의 언어적 설명이나 사념(思念)으로 파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전혀 언어로 설명하거나 인식으로 추리해 낼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언어적으로 설명하거나 인식으로 사념할 수 없다고 한 것은, 다만 어디까지나 언어적 설명과 인식적 사념이 가능하다는 것을 상대적으로 대비하여 말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또한 자체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성질의 것이 아니므로 우리의 청정한 마음 자체는 아니다. {譯註 : <법화경>에서는 이러한 경지를 '제법적멸상(諸法寂滅相)은 불가이언설(不可以言說)이다'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 것(可說), 설명할 수 없는 것(不可說), 인식으로 사념할 수 있는 것(可念), 인식할 수 없는 것(不可念), 이러한 등등의 법은 전부 우리의 청정한 마음이 아니고 단지 우리의 마음에서 나타난 거짓된 모습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분별망상으로 나타난 허상(虛相)은 각각 실제가 아니기 때문에 있는 듯하지만 그것은 실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그 관념마저도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현상세계에 존재하는 것은 실재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심 자체에도 어떤 실체가 없는데 하물며 현상세계에 존재하는 모습들이 어찌 실재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의 청정한 마음 자체는 인식으로 분별하거나 사념하여 알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며, 언어적 설명을 통하여 나타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의 청정한 마음 이외에 따로 존재하는 법은 하나도 없다.{譯註: 현상세계에 존재하는 일체법과 우리의 청정한 마음은 상대적인 개념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이므로, 인식으로 사념하여 도달할 수 없으며 언어적 설명으로도 파악하기가 불가능하다.}

만일 우리의 청정한 마음 이외에 따로 존재하는 법이 없다면 어떻게 이 마음을 주관적으로 분별하고 사념하며 또한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주관적으로 분별하고 사념하며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단지 망상이므로 그것은 실제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즉 어떤 법이 현상세계에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자세히 고찰해 보면 본래 실제가 없다. 따라서 우리가 주관적으로 사려하고 분별하는 그 망상이 이미 실제가 아니라면, 분별하는 대상이 어찌 실재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주관적인 분별망상과 분별하는 대상인 현상세계는 실제가 아니며 오직 우리의 청정한 마음만이 실재하는 법임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까닭에 인식의 사려분별로는 우리의 청정한 마음의 자체를 알 수 없다.

비유하자면 스스로 자신의 눈을 보지 못하므로, 자신의 눈을 보기 위해서는 자신의 눈 이외에 따로 다른 어떤 눈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이와 달리 단지 한결같고 여여(如如)할 뿐이며, 여여한 마음이외에 실재하는 마음은 없다. 또한 우리의 청정한 마음은 스스로 분별하지 않는데, 어찌 우리의 청정한 마음을 상대적으로 인식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러한 이치를 모르고 우리의 청정한 마음을 상대적인 대상으로 생각하여 분별하려 하니, 이것은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눈을 크게 뜨고 다시 자신의 눈을 찾으려는 것과 같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는 갖가지 모습들이 자기 눈의 모습인데도 끝내 제 눈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를 못한다.

그러므로 분별하는 주관적인 인식과 분별의 대상인 현상세계를 상대적인 대립관계로 보는 자는 자기의 청정한 마음을 항상 번뇌망상으로 익혔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의 본성을 모르고 망상 속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망상을 일으키는 사람임을 알아야 한다. 중생들은 자기의 마음 밖에 청정한 마음의 모습을 따로 설정해 놓고 다시 망상으로써 집착하여 그것을 자기의 청정한 마음이라고 고집한다. 그러나 자기가 고집한 마음의 모습 {譯註 : 중생은 망상으로 분별한 허망한 마음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집착(着有)하고, 외도(外道)는 아무 것도 없다는 단견(斷見)에 빠져 있으며, 성문,연각은 청정한 마음 자체가 따로 존재한다는 변상공(變相空)에 빠져 있고, 보살은 중도라는 하나의 모습에 집착하며, 대승종교(大乘終敎)에 이르러야 공(空),가(假), 중(中) 3제(三諦)가 원융한 경지를 체득한다}은 분별망상으로 인식한 모습이지 실제로 그것은 청정한 우리의 마음이 아니다.

                                             -남악혜사 원저, 원경 옮김 <大乘止觀法門>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