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신에게 드려라

2018. 5. 19. 11:27성인들 가르침/시다르메쉬와르 마하리지


도처에 오직 신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모든 곳에서 브라만의 체험을 얻는다.

그것은 '있다'와 '없다'를 넘어선 어떤 것이다.

우리가 자신이 사람임을 알면 더 이상 '나는 사람이다'라고 계속해서 되뇌일 필요가 없다.

'나는 브라만이다'라는 개념도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다.

그런 때에 바로 그 구도자는 빠라브라만이 된다.


모두가 브라만이라는 것을 그가 이해하면 , 무욕의 헌신이 저절로 드러난다.

근심없이 머물러 있는 것이 제일 좋은 수행이다.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 나름대로 좋은 일이며, 여러분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확신에서 퇴보하지 않는 것이 브라만의 상태이다.

행위들은 어떤 과보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할 수도 있고, 그런 욕망없이 할 수도 있겠지만, 모든 행위는 아뜨만에 의해 행해진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그것을 알고 나면 모든 행위는 자연스럽게 신, 곧 주 크리슈나에게 내맡겨진다.

"나와 하나인 헌신자가 진실로 참된 헌신자이다"라고 크리슈나는 말했다.

 

일상 생활 속에서 우리가 하는 노력이 성공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 또한 신에게 맡겨야 한다.

우리가 홀리(신을 위한 축제) 축제를 즐길 때도 그것을 신에게 드려야 한다.

어떤 사람이 강도를 피하기 위해 밀림 속에 숨었는데, 뜻밖에도 거기서 금을 좀 발견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떤 사람의 행위로 인해 어떤 이익을 얻는다면, 그것도 신에게 올려 드려야 한다.

"모든 행위는 빠라마트만에 의해 행해진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나와 하나가 된다"고 크리슈나는 말했다.

만일 남편이 아내를 때리거나 아내가 남편을 때린다면, 그행위를 신에게  드려라.

언제나 신을 생각해야 한다.

코트를 입는다면 그 행위를 신에게 드려라. 신발을 신으면 그 행위를 신에게 드려라.

언제나 신만을 생각해야 한다.


모든 행위는 의식의 형태로 신에 의해서 행해지는 것이다.

그러니 여러분은 마치 자신이 신인 것처럼 모든 일을 해야 한다.

누군가가 우유 단지를 넘어뜨렸다면, 신이 그렇게 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크리슈나에게 드려라.

(매우 쓴 열매인) 여주로 쑨 죽일지라도 아주 정성스럼게 신에게 드려라. 신은 그것도 좋아 할 것이다.

어쩌다 밀가루를 내버렸다면 그것도 신에게 드려라.


다시 말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것 때문에 어떤 슬픔을 느껴서는 안된다.

어떤 것이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으나 그것만을 자꾸 생각하면 좋지 않다.

여러분이 어떤 이득을 얻거나 어떤 손해를 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여러분의 마음은 만족하고 있어야지 슬퍼하면 안된다. 언제나 걱정없는 상태로 머물러 있어라.

(연극 속에서) 호랑이 역활을 하는 사람이 먹는 음식은 실제 호랑이가 먹는 음식이 아니라 연기하는 그 사람이 먹을 뿐이다.

어떤 것을 신(크리슈나)에게 드린다고 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것은 모든 것이 근본 존재에게로 회귀된다는 뜻이다.

무엇이 땅에 떨어지거나 썪는다 할지라도, 조금도 허비되는 것이 아니다.

모두가 본래적인 실재에게로 회귀하는 것이다.

달리 어디로 갈 데가 있다는 말인가?

또 다른 어떤 갈곳이 있을까?


모든  몸 안에서 유일한 행위자는 의식, 곧 라마이다.

이것은 모두 빠라마트만 그 자체의 행위일 뿐이다.

이것을 아는 것이 진정한 지성, 곧 지혜인 것이다.

특히 그 지성을 신에게 드려야 한다.

바깥세상에서는 무아적 헌신을 보이면서도 내면에서는 불타는 욕망을 여전히 감추고 있는 것은 좋지 않다.

생명기운 짜이따니아가 여러분을 위해서만 있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는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가?

어떤 사람들은 대단히 많이 박식하고 유식하지만, 그들은 지식에 대한 자부심 때문에 남들과 떨어져 있다.

예를 들어 소금을 물에서 분리할 수 있지만, 그것은 다시 물 속으로 녹아들 수가 있다.

그러나 귀하게 여겨지는 진주가 물에서 나오면, 어떤 여자의 귀걸이에 끼워져 거기에 고정되어 속박된다.

영리한 많은 사람들은 어떤 요가 명상수행을 열심히 공부해서 그들의 업을 증가시킨다.

왜냐하면 무엇을 '하라', '마라'가 장애물이 되어, 그들이 행위에 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잘못된 행위를 하지 않으려고 너무 신경을 많이 쓰고, 그러면서 자부심도 아주 강해진다.

크리슈나는 그의 헌신의 길에는 속박이 없다고 말한다.

(자기가) 행위를 한다는 자부심을 놓아 버리고 자유로운 상태에 머무르는 사람들이 신의 진정한 헌신자들이다.

다른 모든 사람은 '지(知)에 대한 자부심(에고)'의 힘 때문에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다.- - ->(다음 회 계속)

                                                                -싯다르메쉬와르 마하리지 대담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