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은총이 있기 때문에 그대는 신(깨달음)을 생각한다.

2018. 3. 15. 09:41성인들 가르침/라마나 마하리쉬


질문자 : 실재와 비실재 간의 분별은 그 자체로 우리를 불멸의 깨달음으로 이끌어 주는 효력이 있습니까?

마하리쉬 : ​모두가 설명하는 바이고 모든 참된 구도자들이 깨달은 바이지만, 지고의 영(靈) 안에 확고히 자리잡는 것(브라만 안주)만이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알고 깨닫게 해 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것이고 우리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분별도 우리를 단 한걸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줄 뿐입니다. 즉 우리로 하여금 포기자가 되게 하고, 우리가 찰나적인 현상(현상세계)을 내버리고 영원한 진리이자 현존하는 것만을 확고히 붙들도록 자극해 주는 것입니다.

또, 신의 은총은 깨달음에 필수적입니다. 그것은 사람을 신의 깨달음 세계로 이끌어줍니다. 그러나 그런 은총은 참된 헌신자나 요기, 즉 자유를 향한 길 위에서 끊임없이 열심히 노력해 온 자에게만 주어집니다.

질문자 : 요가 책에서는 여섯 군데의 중심(짜끄라)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개아는 심장 안에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마하리쉬 : 그렇지요. 개아는 깊은 잠속에서는 심장 안에, 생시에는 두뇌 안에 머물러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심장을, 피를 밀어 보내는 네 개의 방을 가진 그 근육질기관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이런 견해를 뒷바침하는 근거 구절들이 실제로 있습니다. 또 그것은 그 부위 주위에 있는 한 무더기의 신경절(神經節), 즉 신경중심들(태양신경총)을 뜻한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어느 견해가 옳은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 외에는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것(영적인 심장,진아)은 우리가 내면에 확실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어떤 의심이나 논란도 있을 수 없습니다.

심장은 베다와 경전들에서 '나'라는 관념이 솟아나오는 곳을 뜻하는 말로 사용됩니다. 그것이 그 살덩어리(염통)에서 솟아납니까? 그것은 우리 몸의 중심에서 오른쪽에 있는 우리 내면의 어떤 곳에서 솟아납니다. 그'나'에게는 장소가 없습니다. 일체가 진아입니다. 그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심장은 '나'라고 생각되는 우리 자신과 전 우주의 전체 덩어리라고 해야겠지요. 그러나 수행자를 돕기 위해서 우리는 우주 혹은 그 몸의 유한한 한 부분을 가리켜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심장이 진아의 자리라고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은 우리는 도처에 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우리이고, 다른 아무 것도 없습니다.

질문자 : 신의 은총은 성공적인 일념집중(三昧)을 성취하는데 필요하다고 합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마하리쉬 : 우리가 신(이스와라)입니다. 신견(神見, 우리자신을 신으로 보는 것) 그 자체가 신의 은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의 은총(깨달음)을 얻기 위해 신의 은총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마하리쉬님이 미소를 지으시고 , 주변의 헌신자들도 모두 따라 웃는다)

질문자 : 또 신의 은총과 별개로 신의 총애도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마하리쉬 : 신에 대한 생각이 바로 신의 총애지요 ! 그는 본래 은총 그 자체입니다. 그대가 신을 생각하는 것은 신의 은총 때문입니다.

질문자: 스승의 은총은 신의 은총의 결과 아닙니까?

마하리쉬 : 그 둘을 왜 구분합니까? 스승은 신과 동일하며 그와 다르지 않습니다.

질문자 : 올바른 삶을 살려고 노력하고 진아에 대한 생각에 집중하다 보면 떨어지거나 끊어질 때가 종종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하리쉬 : 결국은 잘 될 것입니다. 그대의 결의(決意)에 꾸준한 충동이 있어서 그것이 떨어지거나 끊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서게 해 줍니다. 그러다가 점차로 장애들이 다 극복되고 그대의 (내면의)흐름이 더 강해집니다. 결국에는 다 제대로 됩니다. 필요한 것은 꾸준한 결의입니다.

                                                           -라마나 마하리쉬 대담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