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 29. 19:13ㆍ성인들 가르침/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
마하리지 : 그대의 스승에 대한 믿음이 있소?
질문자 : 예, 그분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마하리지 : 왜 자기 스승을 떠나 이렇게 돌아다니는 거요? 그분에게 도로 돌아가시오
질문자 : 제가 아직 흡족하지 않습니다. 망설여지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마하리지 : 망서려지는 것이 있다면 그 스승을 떠나는 것이 낫지요. 그렇지 않으면 그대 자신을 완전히 내맡기시오. 의식과 믿음, 일체를 말이오.
그대가 어떤 스승을 받아들였으면 절대적인 믿음과 완전한 순복이 필요하오. 스승이 그대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고나면 일단은 그 스승을 받들어야 하오. 그 스승의 가르침을 그대로 흡수하여 그것과 하나가 되어야 하오.
어떤 스승에게 순복하기 전이에는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구도자로써,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해도 좋소. 어디든지 가서 영적인 정보들을 수집하거나 무슨 수행이든 하고 싶은 것을 해봐도 좋소. 그러나 일단 한 스승에게 귀의한다면 완전한 순복이 있어야 하오.
그 스승이라는 것을 어떤 사람이라고 규정하지 마시오. 스승이 꼭 어떤 한 사람이라야 되는 것은 아니고, 스승이라는 것은 저 "내가 있음"이고, 또한 그 존재성이라는 것은 바로 현상계 그 자체요. 이 전체 세계가 존재성이면서 바로 스승이란 말이오.
질문자 : 더 이상 살아 있지 않는 사람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다 해도 그런 말씀이 해당됩니까? 선생님께서는 만일 우리가 한 스승에게 순복했으면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헤메지 말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하리지 : 그런 스승이 더 이상 있지 않았다면 그대가 세계를 어떻게 경험할 수 있겠소. 이 존재성을 이해하고 그것을 초월하는 사람이 진짜 스승이요. 그렇지 않으면 그저 깨달음법을 파는 장사꾼 같은 스승들만 있을 것이오.
질문자 : 선생님께서 절대적 입장에서 말씀하실 때는 저는 선생님과 동일합니까, 아니면 동등합니까?
마하리지 : 우리는 하나요. 스승의 말씀 안에 머므르시오. 이 제자는 자신의 어깨 위에 얹힌 개념에 묶여 있소. 나의 스승님은 여러 제자들에게 똑같이 이 지(知)를 전해주셨지만, 각 제자의 받아들임은 다르오. 각자가 스승이 말씀하신 것에 대해 서로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고, 자기가 가장 선호하는 개인적인 취향의 개념에 집착하는 것이오.
"내가 있다"의 의미를 이해하도록 노력하십시오. 그것의 의미를 캐보려고 애를 쓸수록 그 깊은 맛이 더욱 미묘하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오. 스스로를 하찮게 평가하지 마시오. 그대는 여자도 남자도 아니오. 그대는 모든 것이 나온 근원인 그 원리인 것이오.
질문자 : 어제 저는 이 '내가 있다'의 상태에 들었다 나왔다 하고 있었는데, 제 마음의 눈에 보석들이 보였습니다. 아주 영롱했습니다. 어두운 호박색으로 빛나는데 아주 아름답더군요.
마하리지 : 그것은 지(知)의 보석이오. 그 보석들은 지(知)에서 방사되어 나오는 것이오. 그 보석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비추어지면 그들이 해탈하겠지오. 그 보석들이 그런 것입니다. 그대가 무엇이라고 제가 말해주었는데도 그대는 여전히 몸에 집착하면서 죽음을 받아들입니다.
질문자 : '다른 사람들에게 비추어준다'고 말씀하신 것은 무슨 뜻입니까?
마하리지 : 해가 '내 빛이 남들에게 비추어지겠느냐'고 묻습니까? 그대는 자신이 누구인지 확인했습니까?
질문자 : 제가 해라고 하는 개념은 저에게는 어렵습니다.
마하리지 : 아무 개념없이 있으십시오. 그대는 몸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십시오.
질문자 : 어떻게 하면 남들에 대한 사랑을 개발합니까?
마하리지 : 누군가를 사랑하려고 하지 말고 사랑이 되십시오. 그대가 사랑일 때, 그 사랑은 인류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마치 물과 같이, 그대가 물이면 일체가 자라나겠지요.
질문자 : 그리스도는 우리가 남들을 자기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마하리지 : 일체가 그대 자신이고, 남이라고는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그대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저는 동일한 언어로 계속 반복해서 주입하지 않겠소. 그대가 스스로 흡수해야만 하오.
-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 대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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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閑 談]
베단타 수행에서는 "진아"을 찾기 위해서 모든 것을 부정합니다. 몸도 아니다, 마음도 아니다, 생기도 아니다, 불교 식으로 말하자면 색, 수,상,행,식,은 모두 내가 아니다. 라고 부정합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부정하고 나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결국 마지막에 남는 것은 침묵 밖에 남는 것이 없는데, 그러면 그 침묵상태를 계속 유지해서 그 침묵상태에 안정되면 저절로 진아(절대바탕)안주하는 것이죠. 자기가 침묵하고 있다는 것도 모를 때에 비로소 나가 사라집니다.그러나 대부분의 수행자들은 무엇인가 자기가 인식하는 개념이나 체험, 또는 어떤 이미지가 나타나길 기다립니다. 말하지면 어떤 지극한 체험을 하기를 기다리는데, 이러한 체험을 기다리는 마음 자체가 장애가 되기 때문에 더 이상 수행이 진전이 안됩니다.마음 안에 어떤 체험이나 이미지가 나타나면 이것은 아직 에고인 '나'가 남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즉 보는 자가 아직 남아서 이원화 상태를 유지하고 있을 뿐입니다.수행의 마지막 끝은 보는 자 ,아는 자가 사라져야 합니다.마지막 남은 침묵마저도 사라져야 합니다. 그래야 이원화 의식의 강물 저편 언덕으로 건너간 것입니다.
그래서 마하리지는 위에서 '그저 아무 개념없이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 개념없이 있으라'는 말씀은 질문자가 이미 침묵의 무아상태를 체험한 것으로 알고 그러한 고급 충고를 주었으나, 질문자는 아직 그 수준에 까지 도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것이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화두들도 "이것이 무엇인가?"하고 묻는 그 끝에서 어떤 대답이 나올리는 없습니다. 이것은 내면에서 어떤 대답을 들을려고하는 질문이 아니라, 마음의 주의를 내면으로 향하기 위한 하나의 부지깽이 역활만 하는 것입니다. 옛날 재래식 농촌 부얶의 아궁이에 불을 때면서 나무땔감을 아궁이 속 깊숙히 집어 넣기 위하여 부지깽이라고 불리는 나무 막대기를 썻습니다. 불이 아궁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부지깽이로 자꾸 나무 땔감을 아궁이 속으로 밀어 놓듯이, 마음의 내면 속으로 주의를 밀어넣기 위하여 "이것이 무엇인가?" 또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부지깽이 의문을 스스로에게 마음 내면으로 밀어넣어서 스스로 내면 속으로 깊히 들어가는 것입니다. 결국은 아궁이 불을 다 때고 나면 마지막에 부지깽이마저 아궁이 깊이 던져 넣어서 부지깽이 마저 다 태워버리듯이, "이것이 무엇인가" 또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화두도 마지막에 부지깽이처럼 다 사라지게 되면, 그때 비로소 "나"가 없는 무아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수행자들은 "이것이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라고 묻고나서 그 답이나 어떤 체험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마치 아궁이에 불을 때면서 부지깽이로 아궁이 속에 있는 장작불을 아궁이 밖으로 끄집어내어서 혹시 있을지도 모를, 장작불 속 감자나 고구마 구운 것을 찾는 행동이나 비슷합니다.
나는 몸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고, 생기도 아니고, 영혼도 아니고, 모든 것이 내가 아닌데 그러면 "나는 무엇인가?" 이러면 끝입니다. 더 이상 말도 필요없고 체험도 필요없고, 그저 "누구인가?" "무엇인가?" 이것으로 다 끝난 것입니다. 더 이상 어떤 생각도 개념도 상상도 기다림도 없으면 거기 무심의 암벽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무심의 암벽과 친해져서 그것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 즉 무심으로 안정되기만 하면 끝입니다.수행 중에 몸과 마음,세상이 모두 사라진 삼매를 몇번이고 겪어 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완전한 확신으로 굳어졌을 때에 비로소 성인의 흐름(流) 속으로들어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알고 보면 아주 단순하고 간단합니다. 그러나 성인들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과 인내,성실성이 지극히 필요합니다.
-무한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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