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2. 1. 01:11ㆍ성인들 가르침/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
마하리지 : 나는 그대에게 아무 것도 바라지 않으므로, 있는 그대로 자유롭게 나 자신을 내놓는 것이오. 어떤 무지한 사람이라도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바로 깨달을 것이오. 어째서 그럴까요? 스승에 대한 믿음, 스승이 말한 귀중한 한 마디에 대한 믿음 때문이오. 머리로만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대개 시계부랄처럼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할 뿐이라오. 내가 그대에게 해 준 말을 완전히 섭취해서 그대의 것으로 만드시오. 그러면 어떤 방편이나 수행도 할 필요가 없소.
굳은 확신만으로도 그대는 일체를 초월할 수가 있소.
그대는 무슨 밑천을 가지고 있소? 바로 '내가 있다' 존재감 뿐이오. 그것은 다섯가지 음식 기운(지수화풍공)에서 나온 것이오. 처음엔 이 의식 자체가 되고, 그 다음에 그대가 바로 현상계 자체라는 것을 깨달으시오.
이 몸은 이 거친 흙, 채소 등에서 나왔기 때문에 온갖 오물과 질병을 담고 있는 그릇이지만, 스승의 말을 따라서 의지한다면 바로 이 몸을 잘 활용할 수가 있는 것이오.
진아를 깨달은 사람이 사는 곳은 그 뒤에 많은 사람들의 순례지가 되는데, 싸이바바같은 경우도 사람들이 그의 상(像)을 숭배하면 그들의 기도가 이루어진다고 하오. 그 상(像)이 무엇이오? 그냥 돌로 만들어진 것이오.
나 같은 경우, 나의 스승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나는 무조건 믿고 그 말을 절대적으로 따랐는데, 그 확신으로 인해서 내가 이렇게 깨달음을 얻은 것이오.
최고의 신은 '내가 있다'는 앎이라는 굳은 확신을 가져야 하오. 그 자신은 '내가 있다'앎을 인지하고 또한 그것을 초월한 진인인 자기 스승으로부터 직접 그 말을 받아야하는 것이오.
<바가바드 기타>에서는 우리에게 다섯가지 감각의식이 있는데 아주 미세하다고 하오. 이 감각들보다 더 미세한 것은 마음이고, 마음보다 더 미세한 것은 지성이며, 이것보다 더 미세한 것은 생기라고 하오. 그런데 그보다 더 미세한 것은 그 '존재성', 즉 '내가 있다'인 것이오.
그러나 절대자는 이러한 범주들이 아니고 그것들을 초월해 있소. 그대가 바로 그 절대자요.
질문자 : 저는 마하리지께서 하시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하리지 : 그대는 여기 앉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소. 그 앎에만 주의를 기울이시오. 그냥 그대의 존재성 안에 머무르시오. '내가 있다'는 그 지각성(앎)이 전 우주를 창조했소. 그것을 착파하시오. 달리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소. 그 원리를 인식하고 나면 그것이 고요해져요. 그것과 하나가 되시오. 그러면 그대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충족될 것이오.
어떤 단계에서도 그 원리를 잊어버리지 마시오. 무슨 일을 하든 그대의 주의는 거기에 가 있었야 하오. 밥을 먹을 때, 먹는 것은 누구요? 바로 그 존재성이오. 그대가 무슨 일을 하든 그것을 하는 것은 그 존재성이오. 그 존재성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오.
질문자 : 통역되고 있는 말에 주의를 집중하다보면 '내가 있다'가 사라지는 것 같고, 제 내면에서 아무 생각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하리지 : 그럴 때 행복한가요?
질문자 : 행복도 없고 불행도 없습니다. 저는 단지 고요한 상태에서 지켜보고 있고 아무런 느낌도 없습니다.
마하리지 : 그것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오, 아니면 단지 지성적으로 자기 자신과 씨름하고 있는 것이오?
질문자 : 씨름하고 있지 않습니다.
마하리지 : 그대 자신이 평화로움이 되는 것이오? 그것이 궁극적인 기준이오.
질문자 : 늘 그렇지는 않습니다. 거기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지 않으면 말려 듭니다.
마하리지 : 그 말을 하는 것은 누구요?
질문자 : 그 지각성은 나중에 나옵니다. 어제는 많은 감정이 일어났고, 거기에 눈이 멀었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을 때 저는 제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했습니다.
마하리지 : 감정이 일어날 때 그대는 그 감정과 하나였고, 주시하지 못한 것이오.
질문자 : 깨달은 존재도 그런 느낌에 말려 듭니까, 아니면 지켜보기만 합니까?
마하리지 : 그대의 존재성은 하나이지만 - 이것도 되지 않고 저것도 되지 않는 것이오- 즉, 그 존재성이 몸-마음의 감정과 자신을 동일시했기 때문에 문제가 시작되는 것이오. 그 의식을 별개로 유지하시오. 그러면 말려들지 않을 것이오.
질문자 : 감정이 터져 나오고 나면 왜 정화되는 느낌 비슷하게 느껴 집니까?
마하리지 : 그것은 일시적인 마음 상태요. 그 마음 상태가 사라지면 그대의 본래적인 평화로운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오. 요기는 행복,불행에서 벗어나는 요령을 알고 있소. 그래서 생명기운을 정지시키는데, 그러나 근본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소. 그것은 하나의 상태요. 그대는 모든 감각기관과 정신적 요소(마음)을 가지고 있소. 그 각각의 기능을 이해하고 그것을 적절히 사용해야 하오. 그것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말하지 말고, 쓰지 않아서 고장나게도 하면 안되오.완전히 사용하시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서 그대가 생존할 수 있으니까요. 그대는 거기에(감각기관과 마음)에 말려들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하게 이해해야 하오. 그대는 오직 말없이 지켜보는 주시자일 뿐이오.
만일 그대가 왕이 되고 싶으면 백성과 군대, 그리고 행정부가 있어야 하는데, 그와 마찬가지로 진인이 되려면 그런 주변적인 것들이 있어야 하고, 그것들을 전부 이해해야 하오. 그래야만 다스릴 수 있소 (185)
-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 대담록-
[閑 談]
위의 마하리지 말씀은 한 마디로 "내가 있다"에 머물러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줄기차게 마하리지가 말씀하시는
"내가 있다" 가 무엇을 말합니까? 위에서도 말씀하셨듯이 <감각의식과 마음>을 지켜보는 주시자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주시자가 우리 마음이나 느낌으로 대상화 될 수 있습니까? 만일 마음이나 감각의 대상화가 된다면 그것은 뒤에서 지켜보는 주시자가 아닙니다. 따라서 "내가 있다"는 우리가 마음이나 느낌의 대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내가 있다"가 이런 것이다라고 머리속으로 상상을 하면 그것은 망상입니다. 지금 현재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이 작용 그대로가 바로 말없고 모양없는 주시자가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더욱 깊히 들어가기 위해서, 모든 감각기관의 대상이나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의 움직임을 지켜보라는 수행이 주시자가 되려고 하는 연습입니다. 자꾸 이런 수행들을 하면 고요한 주시자가 됩니다. 주시자는 보는 대상에, 듣는 소리에, 온갖 느낌이나 감정에 전혀 이끌려 다니지 않습니다.
주시자는 말없이 그 자리에서 꼼짝않고 지켜볼 뿐이지, 대상에 전혀 휘둘리지 않습니다. 주시자자체가 되면 대상과 일체가 되서 마음이 평화롭습니다. 걱정꺼리가 없어집니다.
마하리지가 말씀하시는 "내가 있다"에 집중하라는 것은 바로 주시자에 집중하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마음으로는 전혀 알수 없는 곳입니다. 그렇다고 "오직 모를 뿐"이라고 마음으로 미리 "모른다"라는 것을 결정해서 마음의 문을 꽉 닫을 필요는 없습니다. 모든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작용들이 작동하고 있는 그 과정 속에서 동시에 주시자가 항상 동반하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어야 합니다. 망상이 없으면 적정(寂靜)도 없습니다. 대상이 있어야 주시자도 있습니다. 대상을 통해서 주시자로 들어가야 합니다. 또한 명상과정에서 삼매라는 문을 통해서 주시자 자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 첫번째 문에 마하리지가 말씀하시는 "내가 있다"앎에 머물러 있으라는 것입니다. "내가 있다"앎은 마음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마음을 지켜보는 마음으로는"모르는 것"입니다. 원래 영어번역을 해서 "내가 있다"앎이라고 했지만, 엄밀히 말해서 "존재"자체를 말합니다. "존재"자체가 "앎"입니다. 앎 = 존재로서 앎과 존재는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있다" 앎이라고 번역이 되었는데, "존재앎"이라고 번역하면 마치 "내가 있다"에 또다른 앎이 붙어 있는 것처럼 여길 수가 있는데, 그게 아니고 "존재" 자체가 바로 "앎"그 자체라는 뜻입니다. 이 경우에 이원적인 앎, 즉 대상적인 앎이 아니라, 순수 존재만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는 보통 "책을 본다" 할 때에 이것을 더 세밀하게 표현해 보면 "책을 본다는 것을 안다"라고 표현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모든 보고 듣고 느끼는 감각작용에 '앎'이 각각 붙어있고, 또 그 앎을 아는 기본적인 바탕 앎이 있습니다. 그 바탕의 앎이 바로 존재입니다.그런데 "내가 있다"앎은 바로 마음 표면에 나타나지 않은 바탕 앎을 말합니다. 이 바탕 '앎'은 살아 있다는 느낌이 있는 한 항상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내가 있다"라는 "존재"로 말하기도 하고 동시에 "내가 있다"앎, 또는 존재앎이라고도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말하는 "내가 있다"는 존재와 존재앎이란 같은 것입니다. "내가 그것을 안다"와 "내가 그것을 알고 있다"는 같은 말이죠. "안다"와 "알고 있다"는 같은 말이지만, "안다"는 앎만 있고 "알고 있다"는 앎과 존재가 같이 붙어 있습니다. 대개는 그냥 "안다"고 하지, 거기에 "있다(현존)"는 존재는 붙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있다(현존)"는 그 자체가 바로 "앎"입니다. 순수한 존재앎은 그 대상이 없는 앎입니다. 따라서 전체 현상계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앎이 우주적 존재앏입니다.
주시자로 가는 기초수행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불교의 위빠사나가 있습니다. "위빠사나"라는 말에서 "위"는 "다르다,분리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빠사나"는 "통찰하다"라는 의미인데, 주,객으로 분리시켜서 주시한다는 것입니다. 마음과 감각기관에 드러난 느낌과 현상화된 대상들을 객관화로 분리시켜서 지켜본다는 것입니다. 모든 감각활동과 몸, 마음 등을 대상화시켜서 지켜보는 훈련이 바로 위빠사나 수행인데, 주시자로 가는 수련방법중의 한가지 입니다.
또한 크리스나무리티가 자주 언급했던 " 흘러가는 그대로 따라가지 말고 지켜만 보라" 도 궁극적으로는 주시자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방법입니다. 이 세상에 나온 대부분의 명상법을 그 내부구조를 들여다 보면 거의가 집중과 지켜봄,의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원각경에 나오는 '삼마발제 '도 바로 온갖 감각작용과 마음의 망상들을 말없이 지켜보는 주시방법을 말합니다.
주제가 좀 엉뚱한 방향으로 바뀌었는데, 여하튼 "내가 있다"앎을 착파하라는 마하리지의 말씀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몇가지 다른 수행법의 예를 들어 보았습니다만, 마하리지가 말씀하시는 내용은 어떤 수련과정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즉바로 주시자 자체가 되어 그것을 꼭 붙들고 집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므로 다른 수행법도 생각나는대로 간단하게 언급해 보았습니다.
-무한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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