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 28. 11:26ㆍ성인들 가르침/과거선사들 가르침
대덕아 ! 무엇을 찾느냐?
지금 바로 눈앞에 법문을 듣는 그 사람,
아무 것도 의지하지 않은 무의도인(無依道人)은
너무도 분명하고 결코 부족한 것이 없다.
그대들이 만약 할아버지 부처님(祖佛)과 다르지 않기를 바란다면
다만 이와 같이 보면 된다.
의심하여 그르치지 말라.
그대들의 순간순간의 마음이 다르지 않음을 이름하여
살아있는 할아버지(活祖)라 한다.
마음이 만약 다르면 성품과 형상이 다르게 되지만
마음이 다르지 않기 때문에 성품과 형상이 다르지 않다.
-임제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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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閑 談]
"무엇을 찾느냐?"라고 말씀하신 것은
찾는다는 것은 대상이 있어서, 찾는 자와 찾는 대상이 주객 이원화가 성립되어야
찾을 것이 있는데, 내 마음의 부처(절대본체)는 그렇게 주객 이원화상태에서 찾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찾을려면 대상화된 것이야 되는데, 부처, 절대진아는 주,객이 없는 절대상태이므로 찾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법문을 듣고 있는 것을 아는 그것, 그것이 바로 내 마음 안에 있는 부처, 절대진아인데,
이것은 공적(空寂)해서 분별의식(마음)으로 알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공적(空寂)하지만 작용은 듣기도 하고 보기도 하고 느끼기도 하고 알기도 하는 등 모든 의식작용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소리(有)는 소리없음(無)이 소리를 듣고, 모양(有)은 모양없음(無)이 모양을 보고, 냄새는 냄새없음이 냄새를 맛보고, 맛은 맛없음이 맛보고, 생각은 생각없음이 생각을 알고, 느낌은 느낌없음이 느낌을 느끼고, 아는 것은 앎 없음이 아는 것인데, 소리없음(듣는 자), 모양없음(보는 자), 냄새없음(냄새맡는 자), 맛없음(맛보는 자), 생각없음(생각을 아는 자), 느낌없음(느끼는 자), 앎없음(아는 자)은 바로 의식의 뿌리이며, 이 모든 감각의식의 없음은 동일한 하나의 뿌리인데, 그 뿌리가 바로 부처, 우리들의 참나로부터 생겨나온 것입니다. 물론 듣는 자는 소리와 소리없음을 둘다 듣지만, 그 자신도 소리없음입니다.보는 것, 맛보는 것- - 등도 마찬가지로, 모양과 모양없음을 동시에 보지만, 그 자신도 모양없음입니다.
이 부처, 절대바탕은 공적(空寂)하고, 아무 형상도 없고, 아무 성질도 없지만, 이 절대진아에서 세상전체와 모든 작용이 다양하게 나오는 것입니다.
오감각기관과 육식에 의해서 전체적으로 전개되는 이 현상세계 자체가 바로 내 마음안의 부처, 절대진아로부터 생겨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궁극적인 측면에서,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소리를 듣는 자, 모양을 보는 자, 냄새를 맡는 자, 음식 맛을 보는 자, 생각이 흘러가는 것을 아는 자, 행동하는 것을 주시하는 자, 이 모든 것을 아는 자는 바로 우리들의 마음 속에 있는 부처, 절대 진아입니다. 그것이 바로 참나입니다, 우리들의 일상생활 그 자체가 바로 부처의 작용 그 자체입니다.
위에서 임제스님이 말씀하시는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홀로 독야청청 있는 무의도인(無依道人)이 그 주인공입니다. 아무 것에도 조건화되지 않는 대자유인이 바로 무의도인(無依道人)입니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서 그 소리를 듣는 자, 온갖 물건과 현상을 보는 자 그 자체가 바로 부처이므로, 일부로 찾을 것도 없고, 찾기 위해서 수행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 임제스님 말씀입니다. 마음이 참으로 편해집니다.
위에서 "그대들의 순간순간의 마음이 다르지 않음을 이름하여 살아있는 할아버지(活祖)라 한다."라고 했는데,
대상들은 다양하게 순간 순간 변화하지만, 듣는 자, 보는 자,맛보는 자, 느끼는 자, 아는 자, 등 궁극적으로 아는 자는
항상 공적(空寂)해서 변화하지 않습니다. 이 공적한 주인공이 바로 살아있는 부처 할아버지입니다.
대상들은 얼마든지 변해도 그 아는 뿌리 마음은 항상 변함이 없습니다.
왜냐 하면, 모양이 없고 성질이 없기 때문입니다.
움직임을 아는 것은 움직임이 없기 때문에 움직임을 압니다.
다시 말하면 움직임(動) 속에 항상 <움직임없음(靜)>이 동시에 존재해 있고 , 그 움직임(動)과 움직임없음(靜)을 동시에 아는 주인공(眞我)이 있습니다. 그래서 진아가 있기 때문에 움직임도 있고 움직임없음도 있습니다.
소리(有)를 듣는 속에는 동시에 소리없음(無)도 동시에 공존해 숨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겁니다.
만일 소리있음에 배경인 소리없음이 동시에 없다면 소리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소리없음이 없다면 소리를 듣는 자가 없기 때문에 소리자체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모양이 있으려면 모양(有)과 모양없음(無)인 보는 자가 있어야 하는데, 그 모양과 모양없음을 보는 자도 모양없음(眞無)입니다. 모양없음이 보지 않으면 모양도 없습니다.
모양은 다양하게 변화하지만 모양없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모양은 모양없음과 조합되어야 비로소 모양이 현상화 되어나타납니다.(모양(有) + 모양없음(無)= 모양(有)), 모양없음은 분리되지 않은 전체이고, 모양은 일부분인데, 일부분의 모양은 전체배경이 없이는 개별모양은 나타날(현상화)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개별적인 모양이 전체(모양없음)와 연기(緣起)관계로 짜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소리(有)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리(有)는 소리없음(無)이 동시에 있어야 소리가 들립니다. 만일 소리없음(無,배경)이 없으면 소리자체(有)의 존재가 형성되지 않습니다. 소리는 어떤 물건이 진동해서 공기중에 진동에너지가 전달되는 것인데, 이 진동 움직임자체가 정지와 움직임이 반복적으로 변하는 현상입니다. 진동자체에 정지와 움직임이 조합되어 반복하면 일정파동이 생겨서 그것이 주변에 퍼져서 소리를 듣게 되는 것입니다. 소리(진동파동),모양(빛파동), 냄새(기체분자파동), 맛(액체분자파동), 감각(접촉파동), 의식(의식파동), 이 모든 정신작용이 의식의 파동움직임이기 때문에, 이 모든 의식의 파동움직임 속에는 정지(無)와 움직임(有)의 요소가 동시에 포함되고, 정지는 전체성(절대진아) 요소이고, 움직임은 개체성인데, 모든 개체성에도 정지와 움직임의 파동형태이기 때문에, 어떤 개체성에도 전체성이 동시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 보통 깨닫지 못한 중생들은 이원화 세계에서의 대상들에 대한 "있음(有)"만 알고 있습니다. 그 "있음(有)"을 아는 것이 바로 "없음(無)"이라는 것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선 "있음(有)"만 아는 사람은 "없음(無)"을 알아야 합니다. "있음(有)"와 "없음(無)"는 사실 같은 차원에 있는 것이지만, 그래도 "없음(無)"에 대해서 모릅니다. 수행의 처음단계엔 "있음(有)"을 관찰하고, 그 "있음(有) 또는 움직임(動)"을 관찰하다보면 그 배경에 "없음(無)"이 있음을 압니다. "없음(無)"이 전체 움직이는 현상계(有)의 뿌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그 자신이 무(無)임을 깨칩니다.
그 다음 단계는 "없음(無)"을 관조하다보면 "있음(有)"과 "없음(貿)"넘어에 "아무 것도 아님"(절대바탕)임이 있음 을 알게 됩니다. 있는 것(有)도 아니고 없는 것(無)도 아닌 "아무 것도 아님"이 바로 부처, 절대 진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현상계의 개체는 겉으로는 "있음(有)"이지만, 내면으로 들어가면 "없음(無)"이고, 또한 더 깊히들어가면 "아무 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의 바탕"이 전체에 편재해 있는데, 그것이 부처(절대진아) 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 온갖 만물에는 각개마다 부처가 포함되어 있으며, 모두가 부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 내 책상에 놓여있는 책이 부처이고, 귤 몇개가 부처이고, 시계가 부처이고, 찻잔이 부처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이 모든 보고 듣고 느끼고 행동하는 것을 아는 그것이 바로 부처라고
임제스님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없으면 이 세상도 없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만든 주인공이며, 바로 내가 부처(진아)입니다.
위의 임제스님의 말씀을 굳게 믿으면 부처님의 공덕을 저절로 얻습니다. .
-무한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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