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듣는 이가 누구인가?

2017. 5. 20. 13:11성인들 가르침/과거선사들 가르침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 대장부가 또 무엇을 의심하는가?

눈에서 작용하는 이가 다시 또 누구인가?

잡히는 대로 쓰며 이름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심오한 뜻이다.

이와 같이 볼 수 있다면 싫어할 것이 없는 도리이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마음은 만 가지 경계를 따라 흘러가지만 흘러가는 그 곳이 ​참으로 그윽하여라.

마음이 흘러가는 그 곳을 따라 성품을 깨달으니 기쁨도 없고 근심도 없도다'라고 하였다. ​

                                                                      -임제스님 어록-​

[閑 談]

달마대사의 <무심론>의 앞부분을 잠깐 들여다 보겠습니다.

(제자) 문 : 마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스승) 답 : 무심(無心)이다.

문 : 이미 마음이 없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누가 능히 보고 듣고 생각하고 아는 것이며,

누가 마음이 없다고 아는 것입니까?

답 : 도리어 마음이 없으니, 보고 듣고 생각하고 아는 것이며, 도리어 마음이 없으니, 능히 마음이 없음을 안다.

문 : 이미 마음이 없다고 한다면 곧 보고 듣고 생각하고 아는 것이 없어야 합당할 텐데, 어찌 보고 듣고 생각하고 아는 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답 : 내가 비록 마음이 없다 하였으나, 능히 보고, 능히 들으며, 능히 생각하고, 능히 아느니라.

문 : 이미 능히 보고, 듣고, 생각하며 안다면 곧 마음이 있다는 것이 되는데 어떻게 없다고 할 수 있습니까?

답 : 단지 보고 듣고 생각하며 아는 것일 뿐, 그대로 무심(無心)이다. 보고 듣고 생각하며 아는 것을 떠나 어디에 다시 따로 무심이 있겠는가? 자네가 이해하지 못할 까봐 염려되어서 내가 이제 하나하나 너에게 해설하여 자네가 진리를 깨달을 수 있도록 하겠다. 가령 종일토록 볼지라도 보는 것이 보지않음에 연유(緣由)하니, 보는 것 또한 무심(無心)이다.

종일토록 듣더라도 듣는 것이 듣지 않음에 연유하니, 듣는 것 또한 무심이다.

종일토록 생각하더라도, 생각함이 생각하지 않음에 연유하니, 생각함 또한 무심이다.

종일토록 알아도, 아는 것이 알지 못함에 연유하니, 앎 또한 무심이다.

종일토록 조작하더라도 작(作) 또한 무작(無作)에 연유하며, 그래서 작(作) 또한 무심(無心)이다.

까닭에 보고, 듣고, 생각하며, 아는 것 모두가 무심(無心)이라는 것이다.

 -달마스님의 <無心論>에서 일부 발췌​-

위에 인용한 문장은 달마의 무심론(無心論)의 맨 처음에 나오는 문장입니다.

임제스님의 이 법문을 이해하려면 이 무심론에 인용한 문장만 보아도 금방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보고 듣고 생각하는 당처(當處)가 그대로 무심(無心)임을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마음의 본래 뿌리가 무심(無心)이므로 자유롭게 여러가지 보기도 하고, 온갖 소리를 마음대로 듣기도 하고, 화도 내기도 하고, 근심걱정도 하기도 합니다. 거울이 본래 맑고 깨끗한 공적(空寂)의 상태에 흔들림없으므로 더러운 것 깨끗한 것, 어두운 것 환한 것 등을 평등하게 비출수가 있는 것이죠. 만일 거울이 맑지 못하고 지저분하게 오염되어 있고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것이라면 거울 표면에서 온갖 것을 비추지 못하고 아무 것도 드러나지 못할 것입니다.

마음은 좋아하는 것 뿐만 아니라 싫어하는 것도 드러납니다. 마음은 원래 보여지는 것(見)이 아니므로 마음에 비친 모든 사물이 보여질 수가 있습니다. 마음은 본래 아무 생각도 없는 까닭에(無心) 온갖 생각이 모두 드라납니다. 그래서 온갖 생각 그 자체가 바로 무심(無心)입니다. 무심(無心)의 자리가 그 생각(當念)을 떠나서 어디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생각(當念)에서 무심(無心)임을 확실히 알게 되면 그것이 바로 위에서 임제스님이 말씀하시는,

<마음은 만 가지 경계를 따라 흘러가지만 흘러가는 그 곳이 ​참으로 그윽하여라.마음이 흘러가는 그 곳을 따라 성품을 깨달으니 기쁨도 없고 근심도 없도다> 에서, <생각이 흘러가는 그윽한 그곳> 이며, <그곳은 기쁨도 없고근심도 없는 곳> 무심의 바로 그 자리입니다.

모든 생각은 무심(無心)으로부터 생(生)겨서, 무심을 바탕으로 있다가(住),무심 속으로 소멸(滅)해 들어 갑니다.

모든 생각은 무심 위에서 생주멸(生住滅)하는 것입니다. 생각을 보는 자도 무심이고, 말이나 소리를 듣는 자도 무심이며, 모든 것을 보는 자도 무심이고, 모든 것을 아는 자도 무심입니다.

어떤 그림이라도 그것은 "아무 그림도 없는 백지"를 바탕으로 그려진 것이고, 어떤 소리나 말이라도 그것은 "소리없음"의 바탕에서 나온 것이며, 또한 온갖 소리를 듣는 것도 "소리없음"이  듣는 것이고, 온갖 형상을 보는 그것은 "모양없음"이 보는 것입니다. 온갖 생각을 아는 그것은 "아무 생각도 없음(無心)이 아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굳게 믿으면 임제스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더 이상 선방에 다리꼬고 죽치고 앉아 있는 좌선수행을 안하고 일상생활 속에서 온갖 일을 자유롭게  즐기면서도 바짝 깨어서  바탕마음인 무심에서 벗어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위의 임제스님과 달마스님의 몇마디 말씀을 확신을 가지고 완전히 이해한다면, 오늘 이 글을 읽을 수 있는 인연이 닿은 분들은 모두가 참으로 정신적으로 귀한 로또 복권 일등당첨에 버금가는 행운(無心確信)을 붙잡은 복받은 분들인 것 같습니다. ㅎㅎ

                                                                                                     -무한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