옳바른 포기

2016. 7. 7. 09:47성인들 가르침/시다르메쉬와르 마하리지



쾌락에 대한 집착은 속박이다.

만일 그대들이 "나는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면, 모든 문제가 끝난다.

"나는 원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

"나는 원치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일체를 얻는다.

사자는 집착으로 인해 함정에 빠지고, 코끼리는 음식에 대한 집착 때문에 속박된다.

이것이 幻(마야)이며, 이것이 이른바 속박이다.

 

남자는 여자에 대한 집착 때문에 애처로워진다.

그가 매혹의 덫에 빠지는 것은, 여러 날 동안 쾌락을 갈망하여 그것이 그의 욕구가 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집착에 대한 몰두가 증대되면 그 사람은 마치 사슬에 묶인 듯 노예가 된다.

사람이 수갑을 찬 것처럼 결박되는 것은 욕망이 커져서 그런 것일 뿐이다.

그 욕망이 무욕으로 대체되면 속박은 풀어진다.

이것이 주 크리슈나가 그의 제자 웃다바에게 준 가르침의 본질이다.

나중에 웃다바는 크리슈나에게 어떻게 하면 우리가 완전히 무욕이 될 수 있는지를 물었다.

그는 사뜨바 성질에서 나온 순수한 무욕을 갖고 싶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남들로부터 집착의 나쁜 효과에 대해 듣고 나서 무욕이 된다면, 이런 무집착은 따마스적 무욕이라고 말한다.

만일 진아지를 얻기 위한 목적으로 어떤 것을 포기한다면, 그 무집착의 상태는 라자스 성질에서 나온 라자스적 무욕이다. 모든 대상이 환(幻)임을 마음이 확신할 때, 이것이 이른바 사뜨와적 무욕이다.

우리가 순수한 사뜨와적 무욕을 가지고 있으면, 무엇을 포기한다는 관념에 대해 웃음이 나올 것이다.

 

포기할 어떤 속박이 어디에 있기라도 했는가?

그대들은 존재하지 않는 밧줄로 자신들을 결박해 두었다.

그대들은 그 족쇄를 풀어버렸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실은 자기 것도 아닌 것을 단단히 붙들고 있었을 뿐이다.

무엇이 그대들의 것이었는가? 무엇을 놓아버렸다는 것인가? 이것이 이른바 참된, 순수한 사뜨와적 포기다.

내려놔야 할 것이 아예 아무 것도 없었다면, 놓아 버릴 것이 뭐가 있겠는가?  ​

쥐는 고양이 앞에 있는 음식물을 자신이 포기했다고 당연히 말할 수 있겠지만, 쥐의 자랑은 쓸데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먹으려 들었다가는 죽을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쥐는 그것을 포기했다고 말한다.

그것을 먹으려고 했으면 죽었는데, 그러지 않았기 때문에 살아 있는 것이다.

포기를 자랑하지 않는 것도 포기의 중요한 측면이다.

만일 그대들이 여건상 할 수 없이 무엇을 포기한다면, 어떤 희생을 치른 것인가?

이 '나'가 누구였고,'나'가 '누구'와 어떻게 관계되기나 했는가?

'내 것'은 누구였고, 무엇이 '내 것'이기나 했는가?

그것은 모두 환(幻)일 뿐이다.

어떤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그는 언젠가 천 명의 사제(브라만)에게 공양을 베풀면 큰 공덕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자신은 그렇게 할 만한 돈이 없었다. 그래서 공덕을 얻기 위해 단 한명의 브라만에게 10루피를 주었고, 천명에 대한 식사 준비는 하지 않았다. 이처럼 그는 십루피로 한 명의 브라만을 만족시켰을 뿐이다. 자, 천 명분의 공양을 회피했으니 이것은 어떤 종류의 희생(공덕의 포기)인가?

자신이 한 포기를 선전하는 사람들은 ​실은 위선자일 뿐이라는 점을 알아라.

옛날에 바르뚜루하리 라는 이름의 왕이 있었는데, 자신이 모든 것을 포기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기 마음을 신에게 고정하는 대신, 포기행위를 했다는 데 대해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런 포기는 참된 포기가 아니다. 그대들은 자신이 포기했다는 데 대해 어떤 자부심도 갖지 말아라.

자신이 포기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진정한 포기자가 될 수 없다.

                                          -싯따르메쉬와르 마하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