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현상계는 "내가 있다"는 작은 점(부라마란드라)이 지탱하고 있다.

2016. 1. 24. 10:14성인들 가르침/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


질문자 : 진인의 육체가 죽으면 그의 참된 상태는 비조건화 되지만, 이 자비심은 죽지 않죠. 그럴 때에 그 진인은 다시환생합니까? 스스로 나타났다가 사라진 자비심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나요?

마하리지 : 전체 현상계란 이 자비심에서 나오는 자연성의 표현이오. 세상 속에서는 그대가 이 자비심의 순간적인 표현은 잘 깨닫지 못하는데, 예를 들면,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엄마의 젖가슴에는 젖이 생기고, 동시에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싶다는 자비심이 저절로 일어나지만, 여인은 남의 아이에게는 젖을 잘 주고 싶어하려고 하지 않아요.

질문자 : 제가 여쭈어 보고 싶은 것은 진인이 죽고 난 뒤에도 어떤 씨앗, 일종의 연속적인 것이 남는가, 아니면 진인도 새로운 몸을 받으려고 하겠는냐 하는 것입니다.

마하리지 :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이어지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개념 자체가 잘못된 것이오.그대가 완전한 진인이 되면, 그대 없이는 다섯 원소도 전혀 살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오.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이 지식은 간난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것과 같지만, 그대가 완전한 지식을 갖게 되면 그대의 존재성이 전 우주를 떠받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거요. 이 존재성이라는 것은 아무 가치도 없소. 그것은 불행을 가져다 줄 뿐이고 시간에 속박되어 있지만, 그러면서도 이 현상세계에서, 가장 작은 것(점)이 이 전체 우주를 지탱하고 있는 것이오.

그대가 가진 이 의식은, 마음대로 어떤 형상도 취할 수 있는 다양한 성품을 가지고 있는 반면, 그대의 참된 성품은 그 자체로 충만해 있고 불변하는 것이오.

그대는 인간의 성품과 의식의 성품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이상의 어떤 지식을 더 구하고 싶은 것이오?

질문자 : 실은 저는 지식을 넘어서고 싶습니다.

마하리지 : 실제로는 넘어서는 것이든, 이전으로 가든, "간다는 것"자체가 없소. 그 상태는 그냥 있소. 사람은 자기가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넘어가겠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는 "간다는 것"이 없소. 더 이상 그대가 추구해야 할 것이 있소?

질문자 : 모든 거짓된 집착, 거짓된 동일시를 그냥 털어 버렸으면 합니다.

마하리지 : 문제가 있다면 바로 그것이오. 그대는 어떤 잘못된 개념이 자신에게 와 있다고 생각하고 있소. 그런 개념은 의식 안에서의 움직임인데, 그 의식 자체가 사라지면 그와 함께 왔던 그 움직임도 사라지는 것이오. 그대는 이미 그 상태에 있고, 얻을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어요. 이제 그대는 이것을 아니까, 그대에게는 이런 것이 다 쓸데없소.

질문자 : 맞습니다. 저는 마하리지께서 브라마-란드라에 대하여 설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에 대한 요가의 가르침은 잘 알고 있습니다만, 마하리지님의 가르침은 약간 다른 것 같으네요.

마하리지 : 두 가지가 있는데, 세계와 그대의 존재,- 존재의 느낌, 즉 의식, 존재성이오. 그것이 브라마요, '내가 존재한다'라는 것이오. 란드라는 구멍 중에서도 가장 작은 것을 의미하오. 그 구멍 속에는 고요한 원초적인 소리가 있는데, 그것이 그대가 있다는 인상을 그대에게 주지만 실은 그대는 없소. 그 구멍 안의 이 소리가 그대가 있다는 느낌을 그대에게 주지만, 그대는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하오.

질문자 : 아주 좋습니다.

마하리지 : 나는 '내가 있다'를 몰랐던 그 원래 상태에 자리 잡고 있소. 이 몸과 존재성이 나왔지만, 그 성품을 아는 이상 나는 거기서 아무 것도 기대하지는 않소.

요기가 명상이나 요가에 완전히 몰입해 있을 때는 이 소리 없는 소리가 그를 워낙 가득 채워, 그는 한 동안 그것에 취해 있다가 나중에야 가라앉게 되오.

몸이 죽으면 이 개인적 의식은 전체 의식에 합일되는데, 그럼에도 그 전체 의식은 자신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오.

그리고 그것이 있다는 것을 그대가 아는 한, 그것은 이원성의 상태에 있는 것이오.  

                                                           - Seed of Consciousness -​

[한담(閑談)​]

​맨 위의 대화에서 "자비심"에 대해서 나오는데, 이것은 전체가 하나라는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무위자연적인 조화작용을 자비심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자연적인 인과작용, 인연작용이 자연의 자비심에 의해서 나온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마하리지께서 윤회작용을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말씀하시는 것은, 절대진아 입장에서 말씀하시기 때문에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 수준에서 일어나는 윤회작용을 부인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윤회작용은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그것은 미세한 파동의식의 에너지 이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존재의식자체가 미세한 파동의식의 상태에 있고, 사람이 죽으면 그 존재의식 범위 내에서 미세한 기본 파동에너지 뭉치(영혼)가 과거 습(習)에 의하여 뭉쳐져서 한 덩어리로 만들어지는데, 이 풀어지지 않고 얼켜있는 습의 파동에너지 뭉치가 일정기간 동안 미세하게 머물러 대기하고 있는 시기가 중음계(中陰界)이라고 하며, 이 중음의 일정기간(불교에서는 대략 49일이라고 함)을 지나 습업(習業)의 종별에 따라 자연적으로 분류되어 다시 다른 몸을 받고 이생에 환생되는 것입니다. 죽은 후에 남는다는 영혼이라는 것이 과거 습업(習業)으로 인해 얼켜서 뭉쳐진 피동 에너지 뭉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한 생에서 한생으로 이어지는 윤회작용이라는 것이 다 풀려지지 않은 습업(習業)의 파동에너지 뭉치이기 때문에, 영혼의 윤회 자체는 일종의 개념일 뿐이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존재의식조차도 그것이 가장 미세한 파동에너지 뭉치이므로 "내가 존재한다"는 것도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개념이 무엇인가요? 생각입니다. 생각이 무엇입니까? 파동의식의 작용입니다. 따라서 개념이 아닌 것은 파동의식의 움직임이 없는 절대 바탕 밖에는 없습니다. 가장 미세한 파동의식의 점상태에 있는 존재의식조차도 마하리지 말씀은 개념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개념이란 이원화 된 생각일 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파동의식이기 때문에 항상 변하는 것이죠. 파동이라는 것은 항상 변하기 때문에 실체가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정월대보름 아이들이 들판에서 쥐불놀이 할 때에 불깡통을 돌리면 불로 그린 큰 동그라미가 그려지는데, 그 불로 그려진 동그라미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냥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불깡통을 돌리는 짓을 그치면 금방 불로 그린 동그라미는 없었집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모든 개념과 생각, 현상세계의 만물은 이렇게 불깡통을 돌리면 불로 그려린 동그라미처럼 허망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존재감, 내가 있다는 이 느낌도 그와 같이 움직이는 파동의식의 진동에 의하여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뇌 속 한 가운데 아주 작은 구멍이 있는데, 그 빈 작은 구멍 속에서 어떤 미세한 진동파가 공진상태로 울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구멍 속에서 울리고 있는 진동파가 바로 "내가 있다"는 우리들의 존재감을 느끼게 해주며, 그 두뇌 가운데 있는 작은 구멍을 브라마 란드라라고 합니다. 

이 점 속의 미세한 파동 에너지가 전체 우주현상세계를 그리는 파동의식의 그림을 펼쳐낸다는 것입니다.  

명상 수행자가 그 두뇌 한 가운데 있는 브라마 란드라 속의 미세한 파동음과 하나로 공진되면 전체우주의식과 일체가 되는 삼매상태에 들게 됩니다. 그러나 이 우주의식을 아는 그 넘어는 "내가 있다"를 모르는 원래의 절대상태라는 것이죠. 구도자는 최종적으로 일단은 그 절대바탕 삼매상태를 도달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절대바탕에서 나와서 존재의식 상태를 이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 존재의식상태에만 도달해 가지고는 그것이 존재의식상태라는 것을 본인이 잘 모릅니다. 한번 맨 밑바탕에 까지 갔다가 다시 되돌아 나와야지 그 단계를 자기가 확인할 수가 있는 것이죠.

때에 따라서는 가까이 있는 스승이 확인을 시키는 기회가 있기도 하겠지만, 대부분은 존재의식상태에 도달했어도 잘 모르고 계속 하던 수행만을 집착 합니다.  그런데 사실 모든 것(비이원적 절대상태, 존재의식상태, 이원화상태)은 바로 지금 이 순간에 함께 다 있습니다. 명상으로 생각 이전으로 가고 넘어 가고 말고가 없습니다. 무엇을 넘어간다거나 건너간다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있는 자리, 바로 이 자리에 항상 그것 이지만, 이것을 이해하려면 일단 절대바탕의 삼매를 체험해 보아야지, 그것을 이해하지 그렇지 않으면 머리로 이해한다고 해도 확신이 없습니다. 요근래에 조계종 교육부장인 현응스님이 "깨달음은 이해하는 것이다"라는 말은 바로 이 비이원적 수준에 대해서 말하는 것 같은데, 사람들은 자꾸 이론적으로, 이원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깨달음에 방해된다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현응스님이 이야기하는 방향과 그것을 듣는 사람의 방향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대중적인 쟁점 다툼이 요즘 한참이어서 심심풀이 구경꺼리가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깨달음에 관하여 이해할 때는 이원적인 말의 논리구조를 따라가지 말고 비이원적으로 즉각 알아차려야(돈오) 합니다. 비이원적인 절대바탕 자리는 머리로 이해할래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절대삼매를 어떤 형태로든 직접 체험해 보아야, '아! 깨달음이 무엇인가 이해가 된다'는 말이 나옵니다. 말하자면 비이원적인 깨달음은 절대바탕의 (삼매)체험이 없이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깨달음이 '이해한다는 것'은 절대삼매체험을 겪고난 이후의 일입니다. 물론 이원적인 이해로는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는 것이죠. 이 경우에 체험 이후에 이해가 오는 것이지, 먼저 이해하고 나중에 체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통 이원적인 현상세계에서는 먼저 이해하면 그것이 체험으로 오지만, 비이원적인 경우는 먼저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삼매 체험을 한참 한 이후에야 나중에 이해가 오는 것입니다. 이 나중에 오는 이해가 바로 깨달음의 느낌입니다. 반면에 비이원적 체험만 가지고는 깨달음이라는 말조차 나오지가  않습니다. 체험 후에 나중에 그 체험을 이해해야 비로소 깨달음이라는 것을 이해합니다. 비이원 삼매 속에서는 깨달음이고 무지고 간에 아무 것도 없고 전혀 모르는 상태입니다.

한 가지 쉬운 예를 들어 비유해보면, 어떤 여인이 값비산 진주 목걸이를 깊은 연못에 빠뜨렸는데, 어떤 용감한 남자가 그 깊은 연못 밑바닥에 가라앉은 진주 목걸이를 건져내기 위하여 물 속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이 남자가 물 속에서 바닥에 가라앉은 목걸이를 찾아서 손에 쥐었지만, 물 속에 있기 때문에 진주 목걸이를 찾았다고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즉시 알려 줄 수가 없습니다. 물밖으로 나와서야 진주목걸이를 찾았다고 물밖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비이원적인 절대삼매 속에서는 깨달았다는 것을 알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합니다. 다만 절대삼매에서 이원화 현상세계(존재의식세계)로 나와서야 자기가 깨달았음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리게 됩니다. 따라서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자기가 절대삼매에 항상 있다는 것을 이원화 상태에 나와서야 뒤늦게 이해한 결과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이라는 것은 말없는 비이원적 체험 이후에 자기의 상태를 이원화 현상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방향으로 현응스님이 주장하는 논제인 "깨달음은 이해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해석한다면, 그 말도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하게 됩니다. 다만 이 경우 표현되지 못하는 비이원적 체험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습니다.  

                                                                                  -무한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