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즉 "내가 있다"라는 말의 정확한 의미

2015. 9. 21. 10:13무한진인/참나 찾아가는 길목

어떤 미국인이 아쉬람에서 이주일정도 머물다가 이제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마하리쉬를 친견하면서

자기가 마하리쉬 스승님의 곁을 떠나면서 미국에서 일상생활을 하면서도 항상 기억하고 마음 속에 지니고 있어야 할 어떤 지침(말씀)을 한 미디 주셨으면 좋겠다고 마하리쉬님께 부탁을 드립니다.


마하리쉬님의 대답이, "스승은 그대의 내면에 있지 외면에 있는 것이 아니다.스승은 그대가 상상하듯이 그대의 밖에 있지 않다. 그는 내면에 있고, 실은 바로 그대 자신이 진아다.이 진리를 깨달이야 한다.

그대의 내면을 추구하여 거기서 그를 발견해라. 그러면 그와 부단한 결합을 갖게 될 것이다. 스승의 메세지는 항상 그대에게 있다. 그것은 결코 침묵하지 않는다. 그것은 결코 그대를 저버릴 수 없다. 또 그대도 결코 스승을 벗어날 수도 없다.

지금 그대의 마음은 밖으로 치달리고 있는데, 그 습성 때문에 마음은 밖에서 대상들을 보고, 그 대상들 중에서 스승을 본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는 그와 같지 않다. 스승은 바로 진아다. 마음을 내면으로 돌리면, 대상들이 내면에 있다는 것을 발견게 된다. 또한 스승이란 바로 그대의 진아이며,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지금 그대는 자신을 그 몸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대상들을 그대의 밖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대가 그 몸땡이인가? 아니지. 그대는 진아다. 그 진아 안에 온갖 대상과 전 우주가 있다. 그 어떤 것도 진아를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바로 그대의 진아인 스승에게서 그대가 벗어날 수 있겠는가? 그대의 몸이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간다고 생각해 보면. 그 몸이 그대 자신으로부터 조금이라도 옮겨가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스승없이는 그대가 결코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대략 이런 요지로 마하리쉬님은 그 미국사람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 미국사람이 평소에도 아쉬람에서 함께 있으면서 마하리쉬님의 이러한 비슷한 법문을 많이 들었지만, 특히 이번의 법문에 감동을 하며 마하리쉬의 앞에서 무뤂을 끓고

항상 스승의 은총이 함께 하기를 기원했습니다.


또 그는 어느 기술회사의 간부직에 있으면서 마하리쉬에게 배운 영적인 가르침을 자기회사에서 일상적인 업무생활에

응용하려고 애쓴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마하리쉬게서 대답하기를,

"그런 마음은 그런대로 좋다. 그러나 그것을 개인적으로 노력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대 자신을 더 높은 힘에 내맡기면 모든 일이 저절로 잘 풀어질 것이다. 그 높은 힘이 그대가 하는 일을 잘 풀리게 할 것이다. 그러나 그대 자신을 일하는 자라고 생각한다면 그대 자신, 개인이 한 만큼의 과(果)만 거둘것이다. 반대로 그대자신을 진아(신)에게 내 맡기고

그대의 개인적인 자아를 더 높은 힘의 한 도구로만 인식하면, 그힘이 그대의 일을 처리해주고 열매를 거두어 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행위들에 의해 영향을 안받게 되고, 순조롭고 자연스럽게 일이 진행될 수가 있다.

말하자면 자신의 의지로 무엇인가 애를 써서 한다는 유위적(有爲的)인 행위보다는 무위적(無爲的)으로 되어지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대가 그 힘을 인식하든 못하든, 진행되는 순서는 변하지 않는다. 단지 그것을 보는 자의 견해에 변화가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기차를 타고 여행하면서 자기 짐을 등에 짊어지고 있는 사람은 없다. 그 짐이 그대의 등에 있든 기차 바닥에 놓여 있든 상관없이 기차를 그대와 짐을 자연스럽게 날라다 준다. 그것을 그대가 등에 질머진다고 해서 기차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도 아니고, 그대 자신이 불필요하고 힘들게 애만 쓸 뿐이다. 개인들이 세상 속에서 자기가 행위자라고 생각하는 것도 이와같다. " 이런 요지로 마하리쉬가 답변을 해주었습니다. 즉 개인입장에서 억지로 무엇인가를 하려는 유위(有爲的) 행위를 그만두고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무위(무위)로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유위적 행위는 무조건 개인성을 만들고, 무위적인 자세는 저절로 전체성이 되게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이 자기는 베단타 철학의 이론과 수행공부를 한 20년이 넘게 했는데도 아직 깨달음은 커녕, 수행자들이 체험할 수 있는 특이능력, 즉 투시력이나 투청력 같은 초능력의 체험같은 것이 지금까지 한번도 없었다고  말합니다.


이에 대한 마하리쉬의 답변의 요지를 간략하게 추려 보겟습니다.

"오직 하나 영구적인 것은 실재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진아다. 그대는 '내가 있다', '내가 가고 있다', '내가 말하고 있다', '내가 일하고 있다' 등으로 평소에 말하고 있다.

그 모두가 '내가'와 '있다'를 하나로 연결하면 '내가 - 있다' 가 된다. 그것은 항상적이며 근본적인 실재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이 진리를 모세에게 가르쳤다. "나는 내가 있다는 것이다"(I AM that I AM). " 고요히 있으라. 그리고 내가 (있음이)신임을 알라" 고 말했다.그래서 "내가 있다"가 신이다.

그대는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느 한 순간도 자신의 존재성을 부인할 수가 없다. 또한 자기가 없다고 부인하려고 해도 그대가 있어야 부인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대의 마음을 고요히 하면 저절로 이해가 된다.

마음은 그 개인의 외향적 작용이다. 만일 마음이 내면으로 향해지면, 그것은 시간이 가면서 차차로 고요해진다. 그리고 저 '내가 있다"만이 전체에 두루하게 가득차 있다. '내가 있다'가 진리 전체이다. "

대략 마하리쉬님이 이러한 요지로 답변을 하셨다.

 

                                                               -라마나 마하리쉬 대담록 에서 발췌-


[덧붙임]

여기서 본글의 편집자(무한진인)가 한마디 덧붙혀 보자면, 우리 한국말로 "내가 있다"라고 번역된 영어원문이 "I AM " 인데, 이것을 올바르게 번역해 보면 "내가 있다"라기 보다는 "나는 ~이다" 또는 "나이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나 "나 이다"가 좀 이상하니깐 "내가 있다"라고 번역한 것 같은데, "나 이다"라는 것은 <이 모든 현상계(神)가 "나 이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내가 있다"를 어떤 사람은 우리가 보통 느끼는 '내가 살아 있다" 는 한 사람의 개인 육체적 느낌을 "내가 있다"로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라마나 마하리쉬나 니사르가다타 같은 베단타 스승들이 말하는 "내가 있다" , <I AM>은 밖으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드러나지 않은 내면의 주시자를 가리킨다. 말하자면 모양없는 神의 입장이 되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것이 바로 <I  Am>인 것이다. 주시자 또는 드러나지 않은 신의 입장에서 '내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즉 위에서도 말했듯이 "내가 가고 있다"했을 때에 이것을 한국말로 더 세밀하게 따져 보면 "나는 내가 가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라고 말해야 한다. "나는 ~ 알고 있다"가 바로 라마나 마하리쉬님이나 니사르가다타님이 말씀하시는 <I AM>, <내가 ~있다>의 정확한 한국말 버전의 해석인 것이다. 따라서 그냥 <아이 엠>을 <내가 있다>로 한국말로 그대로 번역하면 거의 대부분은 잘못 이해할 수 밖에 없다.  예를 들어 보자면, "나는 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이렇게 말할 때에  <나는 (내가 있다는 것을)알고 있다>에서 <나는 ~ 알고 있다>는 우리 내면의 주시자상태 또는 신의 입장을 말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이원적 분별심으로는 모르는 것이다. 다만 (내가 있다는 것을)은 우리가 마음으로 인지하고 있는 (드러난 대상인)것이다. 따라서 <아이 엠>이 한국말로 정확하게 표현하면 이렇게 달라진다는 것을 알아야 <내가 있음>이 무엇인지를 (神 또는주시자라는 것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가 있다.

또 다시 예를 들면 <내가 말하고 있다>는 한국말로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나는 (내가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라고 해야 한다. 따라서 가운데 ( ) 안의 (내가 말하고 있다는 것을)까지는 우리가 인지하는 것이지만, <나는 ~ 알고 있다>는 우리가 인지할 수 없는 주시자<I AM>이라고 하는 神을 말한다. 이것은, 영어는 그 기원이 인도어인데, 우리 한국어와 영어의 문장 표현구조(구문)가 다르기 때문에 애당초 한글번역을 할 때에 영어단어 그대로 표현을 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계속 이런 식으로 한국말로 <내가 있다>라고 읽어 오고, 말 그대로 '내가 있다'라고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참에 이글을 공부하며, 라마나님이나 니사르가다타님의 가르침을 공부하는 분들은 <I am>이나 <내가 있다>라고 한글번역된 용어에 대하여 좀 달리 <나는 (무엇무엇을 하는 것을) 알고 있다>라고 주시자 또는 神의 존재상태로써 이해해야 한다. 여기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본인 (무한진인)이 쓴 부로그 포스트 중에서 <나는 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라는 시리즈물에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놓은 것이 있습니다. <나는 (무엇 무엇을 하는 것을) 알고 있다>에서 맨 마지막 구절인 <알고 있다>는 말 그대로 분별앎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있음>이라는 내면의 주시자인 신(神)의 존재자체가 알고 있다(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나는 ( - - - ) 알고 있다>에서 맨 앞의 <나는>은 드러나지 않은, 즉 분별앎으로는 모르는 < 진아> 또는 <우주적 자아>를 말한다. <I AM> 자체가 우주적 자아 또는 전체 현상계, 혹은 신(神)을 말한다. 물론 진아는 神조차 넘어서야 한다. 또한 <알고 있다>라는 것은 존재 자체가 저절로 주시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 <알고>는 분별앎으로 아는 상태가 아니라, 그냥 <있음> 그 자체가 저절로 주시되는 현존상태를 말한다.

이렇게 라마나 마하리쉬 가르침과 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 싯따르메쉬와르 마하리지 등의 가르침에 나오는 <내가 있다>로 번역된 영어의 <I AM>은 한국말로 <내가 있다>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내가 ~~ 알고 있다>는 내면의 주시자인 우주적 전체 존재(있음)의 주시상태(현존상태)를 말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파악해 두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현시점에서 나는 개인이라는 개체성을 못 벗어났는데, 어떻게 수행을 하면 이 개인성을 벗어나서 우주적 신인 <I AM> 상태로 될 수가 있을까?

그것은 그렇게 억지로 될 수가 없다. 왜? 이미 나는 개인이 아니라, 전체 현상계를 아우르는 우주적 神인 <I AM>  그 자체에 그대로 되어있는 현존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엇인가를 수행해서 <I AM>이 되지는 않는다. 다만 확실하게 이해하고 믿기만 하면  있는 그대로 그것이 될 뿐이다. 내가 그것이라고 확실하게 알고 거기에 안정되면, 그 다음부터는 아직까지 끈질기게 붙어있는 탐진치(貪嗔痴)의 나쁜 習을 없애는 소정의 수행을 하면 된다. 이것은 집중수행과 주시수행을 겸한 정혜수련으로 더욱 믿음을 안정되게 다지고 탐진치를 사그러지게 하여 점점 진아 쪽으로 접근하게 하도록 길을 터주는 것이다. 괜히 깨닫는다는 욕심이 앞서서 돈오(頓悟)니, 누구 한마디에 몰록 깨쳤다느니,와 같은 요행이나 요령을 바라거나,쓸데없는 겉멋을 부리지만 않는다면 일상 생활자체가 저절로 道가 되어 소박해지고 차분해지는 날이 올 것이다.

어느 수준에 도달하면 깨달음을 바란다느니, 수행한다는 행위들 자체가 장애물이 되어 버리므로 저절로 무위행이 도래하게 된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진지하고 열심히 수행공부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이것만 확실하게 파악해서 익혀 놓으면 더 이상 자꾸 불교경전이나 조사어록을 뒤적거리거나, 라마나 마하리쉬 책이나 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 대담록을 반복해서 읽을려고만 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그런 후에는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가 얻은 것을 몽땅 되돌려 보시하는 회향(回向)만 있을 뿐이다.            

                                                                                    -무한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