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3. 30. 19:22ㆍ무한진인/참나 찾아가는 길목
다시 " 조작하는 수행을 하지 말라"라는 말을 활구화두로 보지 말고, 일반적인 이원화의 말뜻으로 다시 살펴 보자.
그러면 이 "아무 것도 하지 말라", "억지로 수행 행위로 조작하지 말라" 라는 옛 선스승들의 충고가 어떻게 해서 나왔는지 탐구해 볼 필요가 있다.
한 사람이 잠을 자면 아무것도 알 수 없지만, 아침에 깨어나서부터 자기를 알기 시작해서 세상 안에서 온갖 일상 행동과 생각이 연속으로 진행된다.
수행이란 것도 깨달음을 목적으로 개인의식을 벗어나기 위하여 전통적으로 전수되어 온 방법으로 개인의식이 행하는 일상활동과 같다.
그런데 사람의 의식은 겉으로 알려지는 모든 생각과 활동이 있고, 그 활동과 마음 넘어에는 알려지지 않은 주시자 의식이 있다.
앞에 있는 개인의식은 앎의 대상으로서 알려져 있지만, 뒤의 주시자 의식은 알려지지 않고 말없이 침묵하고 지켜 볼 뿐으로 소위 "말없이 보는 자" 또는 "주시자"라고 정신 수행계통에서는 부른다. 이 보는 주체와대상의 이원화로 나눠진 것은 의식의 파동성 움직임 때문인데, 항상 진동상태로서 일정한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냥 움직임으로 인한 그림자가 주체와 객체로 분리된 것이다.
그 중에 주체라고 하는 보는 자를, 인도의 성자인 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는 "내가 있다" 앎의 뿌리, 즉 존재의식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른 측면에서 말하자면 절대 참나가 밖으로 나와서 "주시자와 개인의식,세상"의 둘로 갈라져 나왔는데, 주시자는 알려지지 않고, 개인의식과 세상은 대상으로서 의식에 알려지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움직이거나 알려지는 것은 대상으로써 나라는 느낌과 대상 앎, 개인성,마음 육체, 세상 등은 주시자인 존재 의식 안에서 대상으로써 알려지는 것들이다.
따라서 수행하고 있는 개인의식은 보편의식의 대상일 뿐이다. 거울에 비치는 반사상이 실제가 아니듯이 개인의식도 존재의식이라는 반투명 거울에 비친 하나의 그림자허상일 뿐이므로 그 그림자 허상이 어떤 수행을 해도 그림자 없는 보편의식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허상의 나라는 개인의식으로서 수행행위를 한다는 것은 쓸데없는 행위이므로, 눈 밝은 스승들은 수행에 파뭍혀 헤어나지 못하는 제자에게 적당한 기회를 보아서 수행을 집어치우라고 충고하면서 미혹의 구렁텅이에서 나올 수 있도록 충고하는 것이다.
즉 '수행을 그만두고 아무 것도 안한다는 것'은 바로 아무것도 안하고 뒤에서 말없이 지켜보는 주시자(존재의식)로써 동일화하라는 가르침인 것이다. 어떤 스승은 그냥 보는 자 자체가 되라고 충고하기도 한다.
그러나 '보는 자'가 되라고 충고하는 것보다는 숫제 '가만히 있으라'라고 충고하는 것이 주시자의 특성에 곧 바로 실천적으로 접근하는 길로 보일 수도 있다.
일상사에서 행동하고 말하고 생각하는 때는 언제나 말없는 주시자가 항상 붙어 있기 때문에 그냥 조작만 안하면 전체를 바라보는 주시자 특성에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그냥 조작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있으라"라는 충고가 한가지 방편이 될 수가 있다.
"조작으로 수행을 한다'함은 개인의식(에고)의 특성이므로, 행위자라는 이 에고의 특성에서 벗어나므로써 자연스럽게 더 넓은, 말없이 지켜보는 주시자 범위 내로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런데 옛 선사들이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말을 아무곳에서나, 아무 한테나 마구 말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좌선수행을 오랫동안 한 근기가 무르익은 수행자들에게 수행을 집착으로부터 빼내 주기 위하여 극히 제한된 사람에게만 해 주었다.
현대에서 "가만히 있으라"는 가르침을 편 이들 중에 인도 아드바이트 베단타 스승인 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가 생애말기에야 비로소 이러한 비슷한 가르침을 펼쳤으며, 라마나 마하리쉬도 이러한 비슷한 가르침을 펼쳐다. 니사르가타님의 제자인 발세카 역시도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라는 가르침을 펼쳤으며, 라마나 마하리쉬의 제자들인 슈리 푼자나 그외의 여러 제자들도 라마나 마하리쉬의 말씀을 그대로 흉내내면서 현시대 여러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펼쳤다.
일반적으로 보면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가르침이 특정인에게 한정된 아주 특별한 가르침이나 방편은 아니다.
모든 구도자가 일정 수준의 존재의식상태에 도달하면 자연적으로 전개되는 실참 상태이다. 또한 "가만히 지켜 보라" "말없이 지켜보는 주시자 상태가 되라"
"자기가 말없는 주시자임을 알라" 등등, 지두 크리스나무리티의 "대상을 쫏아다니지 말고 지나가는 것으로 가만히 지켜만 보라" 이런 말들이 결국은 "어떤 조작도 하지 말라"는 주시자 입장이 되라는 방편적인 가르침과 다 같은 말인 것이다.
또한 수능엄경에 나오는 관세음보살의 이근원통 수행법도 일종의 온갖 소리를 주시하는 주시자를 자각하는 수행법으로 " 말없는 주시자"가 되는 수행인 것이다.
이러한 온갖 수행방편들이 항상 침묵하며 주시하지만 자연스럽게 모양없이 존재하는 바로 "주시자 자체"가 되는 방편이지만, 말과 표현 방법만 각각 다를 뿐이다.
그렇다면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무위행(無爲行)이 모든 사람에게 깨달음으로 향하도록 해 줄 수 있을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오히려 정신수행을 하는 초심자나 일상생활을 하면서 도를 추구하는 일반 구도자는 마음을 닦는 처절한 정신 수행이 꼭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 "가만히 있으라"는 방편은 적어도 이원화 마음이 깨끗이 정화된 사람이나 존재의식 수준에까지 도달한 수행자, 또는 원인체의 유상삼매를 체험한 사람에 한해서 조작된 수행이 아닌 무위수행으로 들어가는 고급 수행방편인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자연스러운 무위행을 하기 전에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것은 인의적으로 덧칠해진 이원적인 인간 마음을 욕망과 세속 집착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수행을 하지 않은 일반인은 어차피 아무 것도 않하고 단 1분이라도 자연스럽게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어떤 것에 억지로 마음을 쏠리게 하지 않고는 단 5분도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따라서 "가만히 있으라"는 방편을 가지고 가르침을 펼치는 스승들은 자기가 말하는 강의 내용만을 생각이나 어떤 분별도 없이 들으라고 가르친다.
즉 스승의 말에만 분별없이 집중하면 그 말의 내용과 무분별의 수용성에 의하여 간혹 갑자기 주시자 의식으로 변하는 구도자도 생겨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깨달음이라기 보다 존재의식 상태에 가까이 접근이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성문(聲聞) 수준의 깨달음(解悟)이 온다.
이렇게 스승의 법문을 아무 판단이나 분별심없이 듣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나는 주시자 의식이 되어 잠간이라도 전체성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이런 경우에 그 수용력이 지성(知性)을 통하는 것이므로 주시자 의식이 된다해도 지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지성외에 전체적인 8식의 청소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이전에 전6식,7식의 정화가 제대로 안되었기 때문이다
설사 스승의 말씀 한 마디에 깨쳤다 하드라도 그 깨침은 선불교 개념 안에서의 깨침이고, 그 스승이 가르쳐 주는 그 수행체계 범위 안의 깨침으로 보편적이고 전체적인 깨침은 못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깨친 구도자가 다음 세대의 구도자들에게 가르침을 펼칠 때에 그 스승이나 전통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웃물 안의 개구리 도인이 되는 것이다.
또한 수행을 하지 않고 강의만 반복적으로 듣는 경우에 일어날 수 있는 위험성 중에는, 특수한 경우이긴 하지만, 깨닫고자하는 강렬한 염원과 그동안 얻어들은 깨달음에 대한 여러가지 체험지식을 저장식에 메모리하고 있기 때문에,스승이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강의 내용에 듣는 사람이 강렬하게 집중함에 따라서 자연적으로 자기도 모르게 최면상태로 유도되어 마치 잠재의식(7,8식)이 스스로가 깨달음 체험과 유사한 가상 체험상태를 조작하여 마음에 보여주는 상황도 벌어질 수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심층의식은 다양한 환상의 창조자이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러한 깨달음 법문, 특히 소위 선불교 선사들이 말하는 단순하면서도 미묘한 돈오 법문에 대해서 전적으로 믿고 있는 한 스승에게 깊히 빠져버려서 강의를 여러번 계속 반복적으로 들으면 그 사람의 잠재의식 속에 깊히 새겨져서 마치 세뇌를 당하는 것처럼, 또는 반복 주입에 의한 체면암시를 당하는 것처럼 되어, 그가 전에 배운 그런 유사한 체험을 하거나 그 유사체험에 맛들여서, 더욱 더 깊고 미묘한 체험을 얻기 위하여 강의하는 스승에 대해서 절대 순복을 하게 되고, 그 스승과 조직을 위해 전력 봉사를 하는 경우가 되기도 한다.
그 스승을 하늘 같이 떠받친다.그러나 그가 체험했다는 그 체험이란 반복적 암시에 의해서 잠재의식에서 만들어진 상상물일 수도 있으며, 그의 마음이 그런 요술을 부리지만 그 자신조차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다.
또한 같은 수행단체 안에서 어떤 동료구도자가 견성 체험을 했다고 소문이 나면, 그 조직 내에서 다른 사람들은 은근히 부러워하고 질투도 하며 한편으로는 자기도 어서 빨리 그런 체험을 해야 되겠다고 서둘르는데, 그러한 잠재욕망이 내면에서 유사체험을 만들어 내어 실지로 그런 유사체험을 얻기도 하는데, 그러다 보니 그 단체 안에서 여기 저기서 비슷한 견성체험을 했다는 사람들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실례는 명상단체나 사이비 종교조직에서 아주 흔하게 발생하는 현상일 뿐이다. 누구나 그런 일을 당할 수 있는 일이다. 이것이 꼭 나쁘다고 말할 수도 없다. 어느 때는 진짜로 본성을 찾는 지름길에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선을 지도하는 스승이 반복 암시기법의 서술형 언행도 문제가 있을 뿐 아니라, 전적으로 그 가르침을 따르는 구도자 개인의 책임이 더 크다. 즉 구도자 스스로가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즉 구도자 스스로가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정확히 말해서 그의 의식 속에 있는 깨닫고자 하는 욕심과 무지가 스승이 반복적으로 주입시키는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그의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도를 구하는 구도자는 일단은 처음부터 몸 마음을 정화해서 속세의 욕망과 집착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있는 인의적인 수행을 해서 전 6식,7식,8식을 정화하는 정신수행을 해야 된다.
왜 그런가? 바로 6,7,8식은 육체가 태어나면서 엄마 품으로부터 인의적으로 조작된 관념들을 반복적으로 주입되어 한 사람이라는 관념과 의식습관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원래는 개인의식은 없는 것이지만, 육체를 가진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외부에서의 정보주입으로 인하여 그 육체가 소속된 환경과 조건에 의해서 인의적으로 형성된 바탕관념들을 제거해서 순수한 의식을 드러내려면 소정의 시간이 요하는 인의적인 수행이 필요한 것이다.
원래 사람이 타고난 본성은 순수하지만, 육체 주변환경에 의해서 인의적으로 주입된 관념들은 인의적으로 노력을 해서 벗어나야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류 역사상 태고적부터 종교와 정신수행체계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인간 마음이 신(神)에 가까이 가도록, 아니면 신의 마음이 되도록 인의적인 노력의 전통이 생긴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처음부터 조작없는 무위행을 한다는 것은 가장 이상적인 수행법이지만,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거의 불가능하며, 선불교의 초대조사 격인 혜능의 전설적이고 신비한 돈오 깨달음에 관한 설화는 그의 수제자인 하택신회가 단경을 저술할 때에 의도적으로 조작했다는 설이 있다.
그리고 일반인을 상대로 하는 명상원이나 선원에서 아직 욕망과 세속의 집착도 못 벗어난 사람들에게 " 조작된 수행을 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아주 근기가 높은 구도자에게 적용될 방편을 가지고 말한 다는 것은 학문적으로는 몰라도 실참상으로는 너무 무리한 법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일단 자기 본성을 깨닫기 위해서는 마음이 무엇이며, 어떻게 이 마음이 형성되었고, 왜 이원화 작용이 잘못되고 실제로는 허황한 것인지, 또한 진실한 것은 무엇이며,허황된 것은 무엇인지 분별해 보는 등, 이론적으로 충분히 이해하고 나서
이원적인 마음을 정화하는 기존 수행방편을 따라서 마음을 안정시켜 망상을 조용하게 다듬어 준다음, 더 깊은 수행으로 들어가서 유상삼매(원인체)에 깊히 잠겨서 그 동안 침전되어 있던 마음의 습의 찌꺼기들을 없애게 되면 자연히 "아무 것도 조작하지 않는 자연스러운 침묵"상태에 접어 들게 될 때에야 비로소 "조작이 없는 무위행"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조작없는 무위행도 억지로 조작하여 실천하려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억지로 조작하는 유위행이 되는 것이다.
즉 "조작 수행을 하지 말라"라는 말 자체가 조작이라는 것이다. 하는 것도 조작이지만, 또한 하지 않는 것도 조작 행위에 들어간다.
일반인이나 심지어 중급 구도자들, 초보 구도자의 마음은 항상 움직이고 망상이 있는 것이 조작이 없이 자연스러운 것인데, 이 무지하게 움직이는 마음을 억지로라도 인의적인 수행으로 조용하게 보듬어 주는 수행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정 의식수준까지 올라가서야 비로소 원래부터 있던 자연스럽게 조작없고 말없는 무위행으로 전개될 수가 있는 것이다.
보통사람은 인의적인 조작으로 형성된 이원화 마음이기 때문에 역시 인의적인 수행으로 마음과 몸을 정화해야 자연스러운 "있음"의 존재상태로 들어 갈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요즘 불교조직에서 운용하는 것이 아니라,몇몇 일반인이나 불교학자들이 운용하는 선원에서 일반 사람들을 상대로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강의만 들으라"는 무위행의 가르침은 그 방편이 수숭한 것이기는 하나 일반 사람들에게는 너무 수준 높은 법문이 아닌가 하는 의견이다.
마조,임제 스님의 법문이나 기타 선불교 선사들의 돈오 법문이 아주 수숭하고 구도자 마음에 충격을 줄 수 있는 활구법문이긴 하지만, 실제로 일반 구도자들의 마음자체를 닦는 과정에서는 별로 활구 화두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마치 유치원생이나 초등학교생들에게 대학원 강의를 하는 것과 같이 알음알이 지성을 이용해서 깨달음을 얻게 한다는 것은 바로 깨달음 자체가 성문계의 알음알이 수준 정도가 될 뿐이다.
돈오(頓悟)라는 말 자체가 무슨 깨달음을 얻는 방편이나 특별한 과정이 아니라, 모든 본성의 깨달음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어떤 스승의 말 한마디 자체에 몰록 깨달았다는 것이 돈오가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 깨달음 자체는 돈오로서 일어나는 것이지, 어떤 특별한 우연스러운 깨달음 만을 돈오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돈오가 어떤 특별한 방편이나 과정으로 자연스럽게 깨닫는 상태를 말한 것은 아니다. 수십년을 좌선수행을 하다가 어느 날 저녁 몰록 깨치면 그 깨친 것이 바로 돈오로 깨친 것이다.
여하튼 시중에 몇몇 선원에서 가르치는 방편인 "조작하는 수행은 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가르침은 원래는 심지법문을 직접 가르쳐 주는 조사의 활구 화두로 이해해야 하지만, 이법문을 이원화 말뜻으로만 잘못 이해하여 가르쳐 주면 일반인 또는 수행자 지망생들에게 마음 닦는 수행없이 깨달을 수가 있다는 게으름의 견해를 줄 수가 있는 것이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원래부터 그대로 있는 것이긴 하지만, 인의적으로 덮어씌운 사람의 정신적인 껍질을 스스로 벗겨내야 그 자연스러운 것이 드러나게 된다.
따라서 " 조작하는 수행을 하지 말라"라는 말을 활구화두로써 바꾸어서 마조스님 말씀에 대하여 "어째서 수행을 조작하지 말라고 했을까?"라는 심지법문(心地法文)으로 깊히 탐구해 보면 직바로 깨우침으로 들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무한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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