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엄경 공부(69)

2015. 7. 23. 22:00성인들 가르침/능엄경

 

[무한진인의 능엄경 공부하기 69회]

 

2-2. 번뇌가 어떻게 생기는지 잘 살펴야 번뇌를 항복받을 수 있다 

[본문]

[阿難 汝今欲今見聞覺知遠契如來 常樂我淨인댄 應當先擇死生

根本하고 依不生滅하야 圓湛性成하야 以湛旋其虛妄滅生하야 伏還元

하고 得元明覺無生滅性하야 爲因地心 然後圓成果地修證이니

澄濁水에 貯於靜器하야 靜深不動하면 沙土自沈하고 淸水現前하리니

名爲初伏客塵煩惱 去泥純水名爲永斷根本無明이니라 明相靜純

하면 一切變現호대 不爲煩惱하고 皆合涅槃淸淨妙德하리라 ]

 아난아! 네가 지금 견문각지하는 것으로써 멀리 여래의 상락아정(常

我淨)에 계합하기를 바란다면, 먼저 생사의 근본을 가리고 불생멸의

맑고 원만한 성품에 의지하여, 이 원만하고 고요한 성품으로써 허망한

생멸을 돌이켜서, 이를 항복받아 원명한 깨달음으로 돌이키고, 원명한

깨달음인 생멸이 없는 성품을 얻어 인지(因地)의 마음을 삼아야만 과

(果地)의 수증(修證)을 원만하게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마치 흐린 물을 맑히고자 할 때에 고요한 그릇에 담아서 고요함

이 깊어져 흔들리지 않게 되면 모래와 흙은 저절로 가라앉고 맑은 물

앞에 나타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경계를‘처음 객진번뇌를 항복 받는 것이다’고 이름하고

다시 진흙을 버리고 순수한 물만 남게 되면, 이를‘근본무명을 영원히

끊었다’고 이름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명상(明相)이 정밀하고 순수해

지면 일체가 변하여 나타나더라도 번뇌가 되지 아니하고, 모두 열반의

청정한 묘덕(妙德)에 부합하게 되기 때문이다.

[해설]

견문각지(見聞覺知)는 육근,육진,육식의 작용을 말하고, 여래의 상락아정(常樂我靜)이란 열반의 사덕(四德)이라고 해서 최종 깨달음 상태를 말하는데, 베단타에서 말하는 브라만의 상태인 사뜨-찌뜨- 아난다(존재-의식-지복)과 같은 개념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신의식(神意識)상태를 말하는데, 불교에서는 常(항상 변함없음), 樂(지복스러움),我(참나), 靜(고요함)으로 부처의 해탈경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육식의 분별마음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부처의 해탈상태인 상락아정 상태로 계합을 하려면, 첫번째로 할일은  생사심(生死心-파동의식), 즉 생멸(파동성)하는 분별심의 근본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가려 낼 수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멸심이 어디서 어떻게 생겨나오는지 확실하게 알아야 되는데, 앞서 우리는 오탁(五濁)에서 생멸심이 어떠한 과정으로 생겨나와서 서서히 발전하면서 커가는지를 공부한 바 있습니다. 이 능엄경에서는 오탁(五濁)이라고 했지만, 오음(五陰)이나 오온(五蘊)도 같은 개념이고, 또 유식학에서 말하는 육체,전오식,전육식,칠식,8식도 또한 같은 개념입니다. 또 베단타에서 말하는 육체의 껍질, 생기의 껍질,마음(생각)의 껍질,지성의 껍질,지복의 껍질과 같은  개념도 모두 이러한 생멸심(파동의식)의 거친 단계부터 미세한 단계를 설명해 주는 비슷한 개념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개념을 통해서 생멸심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일단 이해하고 나서,이것들을 전부 제외시키면 마지막 남는 것이 바로 생멸심이 없는 불생멸심(不生滅心)인데, 이 불생멸심을 처음부터 인지(因地)로 삼아서, 그 인지를 바탕으로 생멸심을 관조하는 수행을 해야만  불생멸심의 과지(果地)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그렇지 않으면 위의 오탁 중의 하나인 생멸심을 가지고 불생멸심을 얻을려고 한다면 수백년을 수행한다고 해도 맨날 생멸심의 낮은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생명심과 불생멸심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하고, 그 불생멸심을 바탕으로 생멸심을 되돌려 비쳐서(회광반조) 보면 생멸심이 소멸하므로, 그 생멸심이 소멸된 상태에서 불생멸심을 유지하고 안정시키는 수행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멸심은 우리가 인지하고 알 수 있는 것들이지만, 불생멸심은 우리가 전혀 알 수 없고 모양도 성질도 없으므로, 불생멸심이 어떤 것이다 직접적으로 언급할 수가 없고, 다만 '생멸심이 이런 것이다' 라는 것을 분별해서 이 생멸심을 다 제거하고 나서 마지막 남은 상태, 즉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상태를 불생멸심(不生滅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불생멸심은 대상으로서 알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양없는 주체 그 자체이기 때문에, 뚜렸하게 지적할 수가 없고 다만 생멸심을 제거하고 남은 마지막 모양없는 바탕을 말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이 이 말을 듣고는 "그게 말이 되느냐? 불생멸심이 무엇인지 알았다면 그것이 깨달음인데, 무엇하러 또 그 불생멸심으로 수행해서 불생멸심을 얻는다는 것이냐?"라고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가 있겠죠. 그러나 일단 불생멸심이 무엇인줄 알아도 그것 자체가 된 것은 아니고, 생멸심이 무엇이고 불생멸심이 무엇인줄 분별할 줄 알아서, 생멸심이 일어나는 것을 억눌러서 불생멸심을 항상 유지하는 수행을 해서, 생멸심의 원습을 소멸하고, 불생멸심을  지속적으로 자기 자신으로 동일화해서 에고를 완전히 소멸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실제 수행에서 유사하게 체험할 수 있는 상태를 말로 표현할 수는 없을까? 대략 정신수행에 관한 책을 본 분들에게 이해할 수 있는 비슷한 말을 해 보자면, 보통 우리들의 이원적인 모든 생각하고 느끼고 보고 듣는 마음과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 은 모두 생멸심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불생멸심에 대해서는 상상도 할 수 없지만, 억지로 비슷하게 말해보자면 '꿈도 없는 깊은 잠'의 체험상태가 불생멸심의 상태와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상 깨어 있는 상태에서 아무 생각이 없고 자신의 존재조차 느끼지 못하는 무심의 삼매상태가 지속된다면 그것이 불생멸심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깊은 무상삼매 상태가 불생별심이라고 볼 수 있지만, 삼매의 깊이에 따라서 다를 수도 있습니다. 보통 무심(無心)상태라면 단순히 깨어있으면서 아무 생각도 없는 상태가 완전히 안정적으로 지속되는 상태인데, 만일 "나"라는 개인 존재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무심상태라고 말할 수가 없죠. 화두선에서는 아무 생각없음의 무심상태가 되기 위해서 화두의심 속에 완전히 몰입해서 일념 삼매가 되는 것을 계속유지하는 수행을 하는 것이죠. "오직 모름"이라는 상태를 유지하여 모든 망심이 나오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 의심 속에 완전히 마음을 묻어 버리면 점차로 생멸심이 가라앉게 되는 것이죠.그런 무심삼매상태를 깨어있는 상태에서 계속 유지하고 있어야 결국은 마음 중심의 고요한 바탕으로 생멸심의 습이 서서히 가라앉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불생멸심은 우리들의 일상적인 생멸심 바탕에 항상 깔려 있습니다.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을 자각한다는 것은 바로 변하지 않는 자가 아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모든 망상, 우리들의 감각기관 위에 나타나는 이 모든 변화하는 물리적 심리적 현상은 변하지 않는 묘각정심(妙覺靜心)에 의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생멸심의 이전에서 지켜보고 있는 불생멸심이 자신의 본래 마음자리라는 것을 완전히 믿고, 그렇게 따르면 그 상태가 불생멸심자리에 있는 것이죠. 그렇게 될려면 처음부터 가만히 쉬면서 공짜로 얻을려고 하면 안되고 대단한 노력 정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처음 단계에서는 번뇌 망상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마음의 주의를 한곳에 집중하여 마음의 작용이 제맘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망상을 고요하게 다 잡는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한곳에 집중해서 다른 잡생각이 얼씬거지리 못하게 일념으로 집중해 있으면 점차로 복잡하게 얼켜서 진동하던 잡음 파동의 망심들이 점차로 밑바탕으로 가라앉기 시작합니다. 마치 진흙이 섞인 진흙탕물을 그릇에 담아서 움직이지 않고 고요하게 놓아두면 점차로 진흙 찌꺼끼가 밑바닥으로 가라앉는 것처럼, 마음의 각종 잡음 파동의 샘멸심들과 그 종자 먼지들을 조용하게 가라앉히면, 맑은 불생멸심이 나타나는 것이죠.  

이와같이 수행의 첫번째 단계는 생멸심인 객진번뇌를 가라앉히는 과정이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생멸심이 무엇인지 불생멸심이 무엇인지 잘 분별할 수 있으므로, 가라앉은 생멸심의 찌꺼기를 버리면 맑고 정화된 불생멸심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화두수행자들이 수행을 열심히 해서 생멸심의 찌꺼기는 어느 정도로 가라앉혔는데, 그것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여, 오랜 수행을 했어도 탐진치(貪嗔稚)가 그대로 남아 있어서 간혹 어떤 고참스님들은 주지직같은 직책에 미련을 가지고 구도자로써 남보기 민망한 언행으로  대중사회를 시끄럽게 하거나, 여러가지 구도자로써의 계율에 어긋나는 언행을 한다든가, 직책과 명예,재산이나 여성문제등으로 분란을 일으키는 승려분들도 간혹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원래 완전히 객진번뇌를 정복해서 묘각명심(妙覺明心)에 안정되고 나면, 주변에서 온갖 유혹이나 변화를 겪더라도 그것들이 번뇌로 작용하지 아니하고, 항상 상락아정(常樂我靜)의 상태로 안정되게 유지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第二義者 汝等必欲發菩提心하야 於菩薩衆生大勇猛호대 決定棄損

諸有爲相인댄 應當審詳煩惱根本호대 此無始來發業潤生하나니 唯作

아하라 阿難汝須菩提호대 若不審觀煩惱根本하면 則不能知虛妄

根塵 何處顚倒하리니 處尙不知어니 云何降伏取如來位리오 ]

 둘째 이치는 너희들이 반드시 보리심을 발하여 저 보살의 수행[乘]

크게 용맹을 내어 결정코 가지가지 유위상(有爲相)을 버리려고

한다당 번뇌의 근본이 시작이 없는 옛날부터 업을 드러내고 생멸

을 더하는‘누가 업을 짓고, 누가 업을 받는지’를 자세히 살펴야

한다.

 아난아! 네가 깨달음을 닦는데, 만약 번뇌의 근본을 자세히 살피지 아

면 허망한 근진(根塵)이 어느 곳에서 전도되었는지를 알 수 없을

다.

전도된 곳을 아직 모르는데 어떻게 항복시켜 여래의 지위를 취할 수 있

가?

[해설]

위에서 언급한 첫번째의 수행원리는 생사심, 즉 번뇌망상을 제거하고 고요하고 청정한 마음을 바탕으로 번뇌망상을 회광반조{回光返照)하여 불생멸심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신 것이고, 이번에 두번째에서는 번뇌망상이 일어나는 근본이 무엇인지, 무엇이 업을 짓고 또한 무엇이 업을 받는지 자세히 살펴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번뇌망상의 허망한 작용이 일어나는 것을 마치 진실된 것처럼 착각하여 살게 되므로써, 진리를 잃어버리고 헛되게 전도되어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중생의 삶은 육근,육진,육식의 작용으로 나타난 의식의 허상들에 말려들어 진실한 자기 본연의 참마음을 잊어 버리고, 헛된 꿈 속에서 처럼 스스로 속아서 전도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위에서 유위상(有爲相)이란 우리들의 감각의식 위에 나타난 모든 심리적 물리적 현상을 말하는데, 앞에서도 이 유위상이 생기는 과정을 오탁을 통해서 배웠습니다. 수행에서 생멸심에 사로잡혀서 수행이 안되는 것이 바로 번뇌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죠. 따라서 '어느 것이 (번뇌)를 짓고 어느 것이 받는가?'를 잘 살피라고 했는데, ​이런 번뇌 또는 생멸심은 불귀칙한 잡파동의식으로써, 식(識)과 관계된 것이며, 육근(六根), 육식(六識), 육진(六塵)의 상호작용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시 설명이 나옵니다.  

                                                                                   -무한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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