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8. 4. 19:48ㆍ성인들 가르침/금강경
*무한진인의 금강경 이야기(9)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동쪽 허공을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헤아릴 수 없읍니다, 세존 "
"수보리야 남서북방과 네 간방과 위 아래 허공을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 "헤아릴 수 없읍니다. 세존"
"수보리야, 보살이 상에 머무르지 않고 보시하는 복덕도 또한 이와 같아서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다,
수보리야, 보살은 다만 가르친 바와 같이 머물러야 한다."]
전번 회에서는 어떤 대상에도 마음을 머물게 하지 말라는 내용이지만,
이번 회에는 마음을 어떻게 머무는가에 대하여 수보리의 대답을 통해서 부처님이 가르쳐 주십니다.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물었읍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금강경의 여러 대화장면을 대략적으로 살펴 보면, 부처님은 비이원적인 절대입장에서 많이 이야기하고 있고, 수보리는 이원적인, 중생의 입장, 또는 아직 수행중인 보살의 입장을 대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고 볼 수가 있읍니다.
그런데 이번 대화에서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묻는것은 이원적인 마음의 반응을 묻는 것입니다.
즉 비유적인 이야기지만,수보리에게 비이원적인 문제를 제시하면서도 그 답을 이원적인 마음의 반응이 어떻냐고 물어 보았읍니다.
이렇게 비이원적인 절대상태를 이원적인 마음의 반응으로 수보리가 대답하도록 부처님이 유도하는 것이 이 금강경의 묘미라고 할 수 있읍니다.
부처님 스스로는 비이원적 입장을 고수하고 있으면서 수보리를 통해서 이원적인 마음 상태로 표현하도록 유도한 것이죠.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동쪽 허공을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헤아릴 수 없읍니다, 세존 "
"수보리야 남서북방과 네 간방과 위 아래 허공을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 "헤아릴 수 없읍니다. 세존"]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마음의 반응을 물어 봅니다.
'동쪽 허공을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여기서 '허공'이라는 말은 지구 또는 이 땅 위에서 하늘 허공을 바라본다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없는 저~ 먼 우주허공 한 가운데서 동쪽이라는 방향을 짚어 본다는 말씀입니다.
지구 땅에서 동쪽 하늘을 보면 동쪽 허공이라는 것을 가리킬 수가 있죠.
그러나 동서남북 방향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지구 땅위에서만 정해진 것이지,
저~ 먼 우주공간에서는 기준점이 없으므로 동,서,남,북이라는 방향이 있을 수가 없죠.
바로 그런 기준점이 없는 무한한 우주공간에서 동쪽이라고 지정할수 있는 허공이 있겠느냐?
이렇게 부처님이 물어본 것입니다.
무한하고 아무것도 없는 우주 공간에서 어느 쪽이 동쪽 허공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겠느냐는 것이죠.
수보리는 당연히 "생각할 수가 없읍니다." 대답합니다.
또한 다음 질문에서도 남쪽,서쪽,북쪽,과 북서,북동,남서,남동의 네 간방, 그리고 상,하,이렇게 시방(十方)의 각 방향 별로 따로 따로 허공의 경계를 갈라서 생각해 볼 수가 있느냐? 라고 물었읍니다.
먼저 동쪽을 하나 대표로 물어 보고, 그 다음에는 나머지 9방의 방향을 따로 따로 경계를 갈라서 헤아려 볼 수가 있느냐고 재차 물었읍니다.
수보리는 '헤아릴 수 없읍니다.' 라고 대답했읍니다.
수보리 대답은 이원적인 마음과 감각기관으로는 " 전혀 알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부처님은 경계없이 무한하고 모양없는 허공을 비유해서, 절대 본체,즉 절대공(空)에 동서남북--이라는 경계 명칭을 붙혀서 수보리에게 마음으로 알 수 있겠느냐고 비유해서 물어 본 것이죠. 허공에 생각으로 경계선을 긋고 이름을 붙일 수 있겠느냐? 당연히 생각할 수 조차 없죠.
부처님이 4분 처음에서 "보살은 색과 소리,향기,맛,법이라는 경계에 머물지 말고 보시를 해야 한다. 즉 상(相)에 머물지 말고 보시를 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읍니다. 만일 보살이 각종 감각의 현상적인 대상에 머물러서 보시를 행한다면 마치 무한한 허공에다가 동쪽, 남쪽, 서쪽 북쪽-- 등등으로 모양없는 무한한 허공에 경계를 짓고 명칭을 붙혀서 거기에 집착하는 어리석은 짓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은연 중에 비유적으로 말씀하시는 내용인 것 같습니다.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으로 나타난 온갖 현상적인 대상이란 마치 아무 것도 없는 무한한 우주허공에다가 북쪽이다, 남쪽이다 라고 이름과 경계를 붙힌 것이나 다름 없다고 간접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실제로 그 감각과 의식으로 나타난 대상들은 아무 실체가 없이 단순히 "헤아릴 수 없는 " 절대무(無,空)위에 모양의 경계와 이름이 붙은 것이죠.
따라서 바로 이 자리에서! 모든 감각과 의식 상에 나타난 온갖 다양한 현상적인 대상들이 <헤아릴 수 없이 무한한 절대본체 그 자체>라고 볼 수가 있읍니다.
절대 공(空)이 우리의 이원적인 마음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듯이,
우리가 마음으로 온갖 경계를 접할 때에도 대상에 머물지 않으려면, 온갖 감각적인 의식의 대상에 대해서도 " 헤아릴 수 없는 것"으로 대한다면 마치 경계없는 절대 무(無,空)을 대하는 것과 다름 없겠죠.
"헤아릴 수 없읍니다. 세존"
"수보리야, 보살이 상에 머무르지 않고 보시하는 복덕도 또한 이와 같아서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다,
수보리야, 보살은 다만 가르친 바와 같이 머물러야 한다."]
<보살이 상에 머무르지 않고 보시하는 복덕>이란 바로 절대무,공(無,空)의 지혜, 즉 삼먁삼보리심을 얻는 것을 말합니다.
<생각으로 도저히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은 이원적인 분별마음으로는 비이원적인 절대지혜를 도저히 알 수가 없다는 것이죠. 수보리로써는 전혀 "전혀 모르겠다"는 대답입니다. 이 현상적인 마음 경계를 초월해서 있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 생사(生死)도 없고, 헤아릴 수 없이 무한한 전체 우주자체가 자기자신이라는 것 만큼,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큰 복덕>이 어디에 있겠읍니까?
부처님은 마지막에 <수보리야, 보살은 다만 (이와같이) 가르친 바와 같이 머물러야한다> 라고 말씀하신 부분을 다시 확인해 보자면,
수보리의 "헤아릴 수 없읍니다"(전혀 모르겠읍니다)라는 대답이야 말로 보살이 머물러야 할 마음의 자세라고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즉, 형상, 소리, 냄새, 맛, 촉감,법에 머물지 말고 보시하라는 부처님의 말씀은 바로 보살이 내면의"생각할수 없는 것"에 항시 주의를 기울이면서 보시를 하라는 말로도 이해할 수가 있겠읍니다.
이것은 마치 간화선이나 염불 수행자가 행주좌와 어묵동정 중에 내면에서는 화두를 항상 잊지 않고 챙기면서도 겉모습의 일상생활에 아무런 지장없이 정상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평범하게 생활을 해나가는 것과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2분에서 수보리의 첫 질문에 부처님이 대답하신 "이와 같이 머물고, 이와같이 마음을 항복시켜야 된다"라는 대답에서 <이와같이>가 의미하는 대답인 것입니다.
<헤아릴 수 없다>라는 것은 이원적인 마음상태에서는 절대로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모른다"라는 상태라고 볼 수가 있읍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안다', '모른다' 상대적인 "모름"이 아니라, 그 "모름"을 넘어서 있읍니다. 그 "모름"을 넘어서 "앎과 모름"을 말없이 지켜보는 "그것"이죠.
그래서 제2분에서 수보리의 그 첫 질문하는 순간의 그 의문스러워하는 마음 자체가 바로 <그와같이>의 뜻이 있다고 전에 2분에서 이야기한 바 있읍니다.
그 "의문"자체는 "모름상태"일 뿐더러, 앎과 모름의 역동적인 움직임으로, 그 역동적인 움직임을 오직 모름의 내면으로 꾸준히 향하면 그 의문의 중심에 닿게 되고, 그 의문의 중심을 통해서 그 모름 조차 넘어 갈 수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그 "모르는 의문"이 바로 제4분 마지막 부처님의 말씀에서 "헤아릴수 없는 상태로 머물러라"하는 말씀과 같다는 것을 확인해 보았읍니다.
결국 이 4분의 전체 요지는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으로 나타난 대상에는 마음을 머물게 하지 말고, 내면의 생각할 수 없는 전혀 모르는 곳에 마음을 머물게 하라>라는 내용입니다.
마지막에 부처님은,
어째서 <헤아릴 수 없는 것(생각할 수 없는 것)>에 머무르라고 말씀했을까요?
지금 현재에서, 내가 있다는 느낌을 비롯해서 모든 알려진 대상들과 아는 느낌은 그것이 밖으로 새어 나와서 이원화로 드러난 것이며(有漏),
다양하게 분화된 과거 결과물의 그림자 영상들입니다만,
반면에 지금 현재에서 알수 없는 것은 현존(現存) 그 자체이며,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고 분화되지 않은 무루(無漏)상태이며,
모든 알려진 것과 아는 느낌의 그 이전(以前)에 홀로 존재하는 것이며,
온갖 변화하는 것들을 담고 있는 그릇으로써 변화하지 않은 실재(實在)이기 때문에, 수보리의 대답을 통해서 일부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라고 드러내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 "생각할 수 없는 무심"으로 마음 상태를 꾸준히 끊어지지 않게 유지한다면 자기 앞에 나타난 어떤 대상에도 머물지 않을 수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결국엔 <모름>을 아는 그 <주시자>가 <모름>과 함께 완전히 사라진 때가 바로 금강석 같은 지혜, 절대 변하지 않는 절대바탕인 "그것"에 도달한 때입니다.
궁극엔 주시자가 사라져야 최고의 지혜인 아뇩삼먁삼보리심이 드러난다고 말할 수 있겠읍니다.
제2분에서 수보리의 첫 질문에 부처님이 대답하신 "이와같이 머물고, 이와같이 마음을 항복시켜야 된다"에서 <이와같이>란 뜻이 <여래의 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미묘한 상태>를 의미한다고 하더라도, 그 기본 뜻은 이원적 마음으로는 <모르는 것>이므로 결국 이 4분의 마지막 수보리의 대답을 유도해내서 <헤아릴 수 없는 것>을 직접 가르쳐 준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읍니다.
금강경의 본론인 <어떻게 마음을 머물고 어떻게 마음을 항복시킵니까?>라는 수보리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부처님의 답변은 이것으로 모두 끝났읍니다.
사실 금강경의 굵은 줄기는 이것이 끝입니다.
이후는 다시 이와 유사한 질문과 대답이 세 바퀴정도 돌아가면서 반복됩니다.
그 사이사이에 금강경을 잘 수지독송하라는 가르침이 중간 중간 끼어 들어간 것이죠. 그외에 이 3분과 4분에 제시된 가르침을 좀 더 보완하고 ,금강경에 대한 믿음을 더욱 굳이게 하기 위한 보조 가르침이 나오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이 2분~4분이 금강경의 핵심이며, 중심기둥이라고 말할 수 있겠읍니다.
그러면 여기서 <헤아릴 수 없는 것>을 어떤 마음 자세로 유지해야 하는가를 금강경의 내용과 관계없이 그 응용한 실예들을 간단하게 몇가지 들어 보겠읍니다.
<헤아릴 수 없는 것>은 이원적인 일반 중생의 분별심, 생각 ,사고작용으로는 도저히 알 수는 없는 것이죠.
앎과 모름을 주시하는 존재앎을 넘어 가서, "그것" 자체를 체험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앎과 모름을 아는 주시자인 존재앎이 함께 완전히 사라져야 합니다.
옛 조사선의 예를 들어보면, 스승이 제자에게 상식에서 벗어난 말도 안되는 비논리적 언어로 두뇌의 사고작용을 순식간에 끊어 버려서 갑자기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는,어쩔수 없는 상태>를 만들면 그 순간에 제자가 마음을 넘어가는 사건이 마치 전기 스파크가 튀듯이 일어납니다.
순간적으로 제자의 이원적인 분별마음이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못하는 상태로 몰아 붙혀서 외부로 향한 분별심의 사고흐름이 끊어지면서 내면을 향해 파고들도록 제자의 등을 절대바탕의 낭떨어지로 몰아 붙혀서 떨어뜨립니다.
대부분의 화두가 이렇게 순간적으로 제자의 사고작용을 끊어버려서 <생각할 수 없는 상태>로 데려다 주는 기능을 했읍니다만, 요즘의 현대 간화선의 화두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어서 <사고 작용을 멈추는 부레이크 > 역활을 제대로 못하는 것 같읍니다. 그래서 간화선 수행자는 허구헌날 유명화두를 하나 택해서 화두의심을 끌어 안고 의정과 씨름을 하고 있는 것이죠.
또한 기도수행이나 절 수행시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입으로 중얼중얼 어떤 염원을 외거나 마음 속으로 어떤 염원이나 부처명칭을 외지만, 그러나 가장 이상적이고 효과적인 기도나 절 수행 요령은 바로 아무 생각없는 무심(無心)으로 바짝 깨어서 기도나 절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면, 염불이나 다리니 수행같은 것인데, 염불이나 다라니의 언어적 의미(말뜻)를 완전히 제거하고, 단순히 그 소리, 음 자체만 외면서 스스로 듣는 기능 만을 유지하는 수행도 있읍니다. 소위 관음 수행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관세음보살을 염불할 때에 관세음보살이라는 글자나 말의 의미, 이미지,그 역사적 상상력등 그에 따르는 모든 말뜻과 상상적 관념과 이미지를 전부 없애고, 오직 관,세,음,보, 살,이라는 각 소리만을 스스로 입으로 내면서 그 소리를 듣는 관(觀)을 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도 말의 의미(뜻)를 완전히 없애고, 오직 <생각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모름> 속에서 소리만 외고 스스로 듣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더라도 실은 마음은 소리를 듣고 제8식의 저장식에서 잠자고 있는 원초적 의식종자를 일깨워서 관세음보살의 순수한 공덕을 받게 됩니다.
즉 <모름>을 유지하는 것은 <사고작용>을 끊기 위한 것이며, 쉽게 말해서 <망상잡념>이 나오는 구멍을 <모름>으로 틀어 막는 것이죠.
화두수행이나 염불관,다라니 수행 등은 말의 의미를 완전히 없애서 <오직 모름> 속에서 사고의 흐름작용을 끊어 버린 채 수행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의할 것은 <모름(無心)>과 함께 항상 깨어있음, 즉 주시가 생생하게 살아 있어야 되겠지요.
그러나 결국에는 모름과 그 모름을 아는 깨어있음, 소리와 소리를 듣는 자가 모두 함께 사라져야 합니다. 즉 주시자가 사라진 삼매상태를 겪어 보아야지 마음을 넘어 설수가 있는 것이죠.
이 자리를 안정되게 지키기 위해서 행하는 것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어떤 현상적 대상에도 머물지 않는 것에 머무는 무위적 행위를 하는 것이죠.
이것이 아마도 금강경에서 말하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는 것>에 대한 응용적인 한 예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대상에 머물지 않고 모든 행위를 하라>를 실천하려면,구도자는 항상 내면으로 들어가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죠.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라는 것은 바로 오직 모름을 향한 궁극적인 의문입니다. 왜냐하면 전혀 알 수 없는 것이 궁극의 샴먁삼보리심이기 때문입니다.
금강경 이야기는 여기서 잠시 멈추었다가,
얼마간 지난 다음에 다시 시작해 볼 예정입니다.
이제~ 그 지루한 장마기간도 끝나가는가 보네요,
또 다시 무더위와 친구로 지내야만 할 시절이 온 것 같읍니다.
건강들 조심하세요.
-무한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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