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의 " 몸의 모양으로 여래를 볼 수 있는가?"에 대하여(2)

2013. 8. 17. 19:48성인들 가르침/금강경

 

 

 

 무한진인의 금강경 이야기(11)

 

凡所有相 皆是虛妄

범소유상 개시허망

若見諸相非相 則見如來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무릇 있는 바 상이

다 허망한 것이다.

만약 모든 형상을 상이 아닌 것으로 볼 것 같으면

그 즉시 여래를 볼 것이다.  

                                          -구라마집 한역본-

 

위의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비상 즉견여래>는 그 유명한 금강경 사구계의 첫번째 구절입니다.

여기서 상(相)이라 함은 꼭 어떤 형태, 모양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으로 나타난 정신 물질적 모든 형태의 경계와 대상을 말합니다.

 

모든 상이 허망하다는 것은 그 자체가 실체성이 없이 임시로 나타난 것이며, 언제나 변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죠.

말하자면 모든 나타난 현상은 그 자체의 고정적인 자아나 고유적인 존재성이 없으며 모두가 전체 인연작용으로 인해 어느 한계 내에서 일시적으로 잠깐 드러나 보이는 지나가는 그림자와 같다는 것이죠. 

그 모양이나 성질은 항상 변하는 것으로서 원래부터는 없었던 것이고, 그래서 언제든지 사라지거나 변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난 형태와 모양을 실체라고 믿고 좋아하고 집착하다가 그것을 잃거나 변화하게 될 때에 스스로 고통과 슬픔을 겪으며 괴로움 속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스스로 상을 만들고 또 그것에 집착하고, 행복을 만들고, 다시 그것을 잃고 슬픔을 겪는 것은 마치 꿈을 꾸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읍니다.

우리의 이 현실, 살아있다는 이 감각이 바로 꿈 세상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진리의 법계, 우리들의 본연의 세계는 여전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조용할 뿐입니다. (서부전선 이상없음.ㅎ)

 

어떤 것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소멸할 것도 없고, 소멸할 것도 없으니 괴로워 할 것도 없는 것이 이 본연의 바탕세계입니다.

바다 표면에는 온갖 거친 파도와 물거품이 거세게 몰아 닥쳐도 바다 밑바닥은 고요합니다.

온갖 별별 사건이 일어나며 싸우고 슬퍼하고 괴롭고 행복하다가도 슬픔에 젖는 이 현실세계란 바로 의식이 꿈을 꾸고 있는 잠(무지)상태에 있읍니다.

그래서 우리 구도자들은 이 꿈꾸는 의식 밑바닥으로 들어가 그 의식의 본체가 어떤 것인가를 알아야 되겠지요.

의식의 뿌리는 어떤 것이며, 그 의식이 어디로부터 나왔는가?를 스스로 탐구해 가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로 의식이 의식 스스로를 자각하며 깊히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의식 스스로가 자신을 완전하게 자각하는 순간에 의식 자체도 사라지는 것이죠.

바로 그 의식이 자기가 나온 바탕으로 합일되는 순간에 의식 자체가 사라집니다.

그 의식이 사라진 상태를 우리는 절대바탕, 여여, 진아, 무아, 본성, 본연의 세계, 진리 등등 여러가지로 부르고 있읍니다. 

 

이 모든 상이 허망한 것인 줄만 확실하게 깨달으면 그 이상 더 어떤 행위나 개념이 필요 없는 것이죠.

그래서 다음 구절에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若見諸非相 則見如來)>라,

즉 <모든 형상을 형상 아닌 것으로 본다면, 그 즉시 여래를 볼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아주 주의해야 할 것은 바로 <비상(非相)>이라는 단어입니다. 누구든 이 문장을 읽거나 또한 모든 해석서들은 이 비상을 공(空)이나 무(無)라고 이해하거나 해석하고 있읍니다.

왜냐하면 상(相)의 반대현상은 아무 것도 아닌 공(空)이나 무(無)라고 말 할 수 밖에 없고 또 그렇게 배워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금강경을 잘못 읽는 근본적인 자세입니다.

이렇게 <비상(非相)>을 공(空)이나 무(無)라고 읽는 것은 단순히 이원화 지적(知的)인 유희(遊戱) 일뿐, 금강경을 읽는 진짜 공덕(무념)에는 아무 효과도 없읍니다.

만일 공(空)이나 무(無)와 같다거나 절대바탕이니 무아니 하는 비슷한 의미의 개념어로 이해를 했다고 한다면 백날가야 맨날 그대로 이원화 지적인 유희에 머물러 있을 수 밖에 없읍니다.

이렇게 구태의연한 이해만 가지고는 이원화 넘어, 말의 개념 넘어, 생각의 개념 넘어로 절대로 넘어 갈 수가 없읍니다.

 

그럼 어떻게 <비상(非相)>을 이해하여야 하는가?

바로 <불가사의(不可思意)>, 즉 <생각할 수 없는 생각>을 그대로 뒤퉁수에 항상 붙혀 놓는 수 밖에 없읍니다.

쉽게 말해서 <전혀 생각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것>으로 모든 망념을 정지시키는 것입니다.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함>이 모든 사념의 흐름을 막는 철벽이 되게 해야 합니다.

 

제4분에서 <수보리야, 동쪽 허공의 경계를 헤아릴 수 있겠느냐? 헤아릴 수 없읍니다, 세존이여> 이 문답에서 동쪽 허공이라는 이름만 있지, 사실 동쪽 허공은 실체와 경계가 없는 줄은 잠깐 생각하면 누구나 이해를 합니다.   

마찬가지로 <상(相)>이나 <비상(非相)>이나 그 경계의 이름만 있지, 그 실체가 없으므로 이원화 상태에서는 오직 <생각할 수 없는 것>일 뿐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생각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자세가 그냥< 그게 그런가보구나> 하는 정도로 이해하고 그것으로 관심없이 뒤도 돌아 보지 않는데, 진짜 금강경을 옳바르게 공부하는 구도자는 <아 ! 생각할 수 없는 것, 전혀 알 수 없는 것>이것에 관심을 집중하고 계속 <이것>을 탐구하며 내면으로 향해서 주의를 준단 말입니다.

바로 <이 생각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내면을 향해 탐구해 나가는 것이 금강경 전체 내용에서 계속 강조하고 있는 핵심이며, 유일하게 본바탕으로 들어가는 <문>인 것입니다.

 

참고적으로 금강경의 원래 범어 명칭은 <아리야바즈라체디까쁘랑나빠라미따마하야나쑤뜨라>라고 부르며, 이 뜻은 <성스러운 금강처럼 자르는 지혜를 완성시키는 대승의 경>이라는 뜻입니다.

이 경전의 제목을 줄여서 <능단금강반야바라밀경(能斷金强般若波羅蜜經)>이라고 불렀고, 다시 이것을 줄여서 <능단금강경(能斷金剛經)>이라고 불렀읍니다.

그런데 <능단(能斷)>이라는 단어는 "능히 자르는~" 이라는 뜻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고 무엇이든지 자를 수 있는 금강으로 된 지혜의 칼날이라는 뜻이죠.

무엇을 짜른다는 것일까요?

바로 무지(無知)와 망상을 짤라버린다는 것이죠.

이것은 이원화로 나타난 모든 상과 망상을 과감하게 싹뚝 짤라버리는 금강으로 된 지혜의 칼날이라는 뜻입니다.

그 금강 지혜의 칼날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 생각할 수 없는 것, 전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무지에 의해 이원화로 나타난 모든 상(相)과 망상(妄想)을 짤라버리는 강하고 날카로운 다이아몬드 칼날이 바로 "생각할 수 없는 것, 전혀 알 수 없는 것"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상이 아닌 것>에 대하여 무슨 딴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까?

<전혀 모릅니다.> - 이 모름이 바로 온갖 잡생각,망상을 차단해 줍니다.

그 모름에 주저앉고 그 모름이 없어질 때까지 짓뭉개 버려야 모름 속으로 들어 갑니다. 그 이전에 얻어 들은 <공(空)>이다, 무(無)다 하는 이원화 언어관념은 전부 잊어 버려야 합니다.

그런 지적(知的)인 관념들이 바로 여래를 보는데 장애물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오래 수행한 구도자가 어떤 수행방편으로 선수행을 한다든지 명상을 하는 중에 마음에 나타나는 공(空),빛, 색갈, 부처상,신상, 등 신비 이미지와 여러가지 신통능력이나 체험 등이 바로 상(相)이며, 따라서 이러한 명상 중에 나타나는 현상들에 스스로 속지 말고,즉시  "상이 아닌 것"으로 회광반조하여 그런 상들에 주의를 주지 말고, 쓸데없이 일시적으로 나타난 초능력 같은 것에 메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모든 형상을 형상이 아닌 것으로 볼 때는 그 즉시 여래를 볼 것이다>

모든 형상을 그 형상이 진짜라고 보지 말고 꿈 속의 일처럼 허상으로 보며, 또한 형상 아닌 것을 공(空)이나 무(無)로도 미리 상상하지 말고, 그저 <생각할 수 없는, 오직 모르는 것>으로 내면 깊히 탐구해 가는 자세를 길러야 합니다.

 

이 구절에 대하여 현장본과 티벳트 서장분의 해석은 아래와 같이 좀 차이가 납니다.  먼저 현장본은 아래와 같읍니다.

 

乃至諸相具足皆是虛妄

내지제상구족개시허망

乃至非相具足皆是非虛妄

내지비상구족개시비허망

如是以相非相 應觀如來

여시이상비상 응관여래

'구족한 상(32상)'은 허망하나,

'구족한 상이 아닌 것'은 허망하지 않느니라.

그러므로 '상'과 '상 아닌 것'으로써, 여래를 보아야 하느니라.

                                                               -현장본-

위의 현장 본에서 구족한 상은 부처의 육체적 특징인 32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32상은 석가모니가 깨달은 사람이란 타고난 증표라는 표시이긴 하지만, 그것이 드러난 상이므로 허망하다는 것이고, 그 표징되는 상이 아닌 것은 생기지 않았으므로 없어질 것도 없으므로 허망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좀 번역이 이상한 것은 "구족한 상"으로 제한을 해 버렸기 때문에 단순히 부처의 육체적 특징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다고 잘못 이해할 수도 있겠읍니다.

 

그리고 "상"과 "상 아닌 것"을 통해서 여래를 보아야 한다고 했는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관(觀)"이라는 글자입니다.

이것은 요즘 말로는 '주시한다'는 관수행(觀修行)을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또한 "相"은 이원화 대상이 되는 것이고, "상이 아닌 것"은 <상을 보는 자> 또는 <주시자>로서, 이 <대상과 주시자>를 넘어서 있는 여래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죠.

여기서 <상이 아닌 것>은 <상을 보는 모양없는 주시자>라는 것을 은근히 상징하며, <상>과 <상이 아닌 것>을 동시에 알면(주시하면), 그 넘어에 있는 여래를 알수 있다는 의미로 표현한 것 같습니다.

여기서는 <상(相)은 보이는 대상이고, <상이 아닌 것>은 <상을 보는 주시자> 즉, 요즘 베단타 스승들 식으로 표현해 보자면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을 말하며, 이원화 대상과 존재의식을 넘어서야 절대본체인 여래를 알 수 있다는 식으로 이해할 수 있겠읍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상이 아닌 것>은 <생각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도 바로 이원화 마음측면에서는 <모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모든 보이는 대상 이면에는 주시자인 모양없는 '내가 있다'가 항상 배면에 펼쳐져 있는 것이죠.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말없는 앎"이 항상 주시하고 있읍니다. 그 '말없는 앎'(존재의식의 뿌리)이 되어야지 여래(절대진아)를 볼 수 있는 여건이 됩니다.

 

특징을 갖춘 것에는 허망함이 있고,

특징이 아닌 것을 갖춘 것에는 허망함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특징이 없는 특징'을 통해서 여래를 보아야 한다.

                                             -티벳본 한역(전재성 박사)-

위의 문장은 초기경전의 번역전문가인 전재성 박사가 티벳 서장본의 금강경을 번역한 것인데, 위에 있는 현장본과 비슷한 번역이지만, 마지막 구절에서 약간 차이가 나네요. 마지막 구절의 <특징없는 특징을 통해서 여래를 보아야 한다>라고 번역이 되었는데, '특징없는 특징' 바로 공(空)이나 무(無)를 말하는데, 이것이 바로 이원화 상태에서는 대상을 보는 주시자, 의식의 뿌리이며,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자체를 말합니다. 즉 존재의식을 통해서 절대바탕으로 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이죠.

따라서 이 문장에서도 '특징없는 특징'이란 이원화 관념으로는 전혀 모르는, 생각할 수 조차 없는 상태입니다.

 

무릇 상이 갖추어져 있다면, 그것은 모두 거짓이다.

또 상이 갖추어져 있지 않다면, 그것은 거짓이 아니다.

그러므로 여래는 '상이 없음을 상으로 한다'고 보아야 한다.

                     -산스크리트 원본 ->영역본-> 한글번역(정**번역)-

 

위의 번역문은 모 출판사에서 펴낸 금강경 번역본입니다. 번역자 정** 박사의 머릿말에 의하면 산스크리트어 원본을 영어로 번역한 것을 다시 한글로 번역한 것이랍니다.

<모든 상은 모두 가짜고, 상이 없는 것이 진짜다. 그러므로 여래는 '무상(無相-상이 없는 것)을 상으로 보아야 한다>

이 번역은 좀 그 의미를 이해하기가 애매합니다. <여래는 '상이 없는 것(無相)'으로 보아야 한다>고 했는데, <상이 없는 것>은 위의 문장들에서 본 바와 같이 <상을 보는 주시자>도 <상이 없는 것>이라고 말 할 수 있읍니다.

즉 <상이 아닌 것>자체가 여래가 아니라, <상을 보는 자>도 <상이 아닌 것>이므로, <상과 상이 아닌 것>을 통해서 <여래>를 본다고 되어 있읍니다.  

따라서 이 문장에서 "여래는 상이 없음을 상으로 보아야 한다"는 표현은 위의 다른 번역서들과는 좀 다르며, "상이 없음을 상으로 본다"라는 문장에서 또 구태여 상을 본다는 관념을 뒤늦게 내세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상이 없음(無相)의 상을 본다'라는 것은 보는 자와 보는 대상인 무상이 상호작용하는 주객 이원화 행위를 묘사한 말입니다.

이 번역문에 대하여는,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 개인 관점에서 보자면, 원래의 금강경 사구게의 핵심의미가 좀 빗나간 묘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이상으로써 금강경 제5분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에 대한 이야기를 이만 마치겠읍니다.   

                                                                               -무한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