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6. 11. 19:45ㆍ성인들 가르침/기타 비이원론 가르침
바시슈타가 계속 말했다.
오, 라마여! 깊은 수면과 같은 침묵에 의지하며, 생각의 움직임이 전혀 없는 상태에 견고하게 자리를 잡고 영원히 계십시오.
라마나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이시여! 저는 지금까지 말의 침묵이나 눈과 기타 감각기관의 침묵에 대해서는 들어 보았읍니다. 그리고 또한 극단적인 고행의 엄격한 침묵에 대해서도 들어 봤읍니다. 그러나 깊은 수면과 같은 침묵이란 무엇입니까?
바시슈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라마여 ! 두 가지 유형의 무니(모우나, 즉 침묵을 지키는 현자)가 있습니다.
하나는 엄격한 고행자이고, 다른 하나는 해방된 현자입니다.
전자는 강제로 그의 감각들을 억제하며, 열광적으로 무미건조한(지혜가 전혀 없는) 끄리아(수행)를 행하고 있읍니다.
반면에 해방된 현자는 무엇이 무엇인지를 (진리를 진리로, 비실재적인 것을 비실재적인 것으로) 알고 있고, 참나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기에서 평범한 사람처럼 활동하고 있습니다. 침묵 즉 모우나로서 간주되는 것은 이들 루니들의 본성과 활동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네 가지 유형의 침묵이 기술되어 왔읍니다.
첫째는 말의 침묵이고,
둘째는 눈같은 감각기관의 침묵이며,
셋째는 격렬한 억제이며,
넷째는 깊은 수면의 침묵입니다.
마음의 침묵이라고 하는 또 하나의 침묵이 있읍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죽은 사람이나, 엄격한 침묵수행자(까스카 모우나)나, 혹은 깊은 수면의 침묵을 수행하는 사람에게만 가능합니다.
이들 중 앞의 세 가지는 엄격한 모우나의 원소들을 필요로 합니다.
정말로 해방에 도움이 되는 것은 네번재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의 세 가지 유형의 모우나에 의지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일으키는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나는 그 세 가지에는 바람직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깊은 수면과 같은 침묵은 해방에 도움이 됩니다.
그 속에서는 쁘라나 즉 생명력이 억제되지 않으며, 또한 촉진되지도 않습니다.
감각들은 먹을 것을 받지도 않으며, 또한 굶어 죽지도 않습니다.
다양성에 대한 자각은 표현되지 않으며, 또한 억압받지도 않습니다.
마음은 마음이 아니며, 또한 마음 아님도 아닙니다.
어떠한 구분도 없고, 그러므로 그 구분을 없애려는 어떤 노력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깊은 수면의 침묵이라 불으며, 그곳에 자리를 잡은 사람은 명상할 수도 있고, 명상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본질에 대한 지식이 있고, 의심은 전혀 없습니다.
그것은 완전히 아무 것도 없는 텅 빔입니다.
그것은 지지물도 없습니다. 그것은 지고의 평화 그대로인데, 거기에 대해서는 그것이 실재한다고도 할 수 없으며, 실재하지 않는다고도 할 수가 없읍니다.
사람이 " '나'라는 것도 전혀 없으며, 또 다른 것도 없으며, 마음도 없고, 또한 마음에서 파생된 어떤 것도 없다"라는 것을 알고 있는 상태와,
사람이 "'나'라는 것은 이 우주에서 단지 하나의 개념에 불과하고, 또 그것은 실제로 순수한 존재이다."라는 것을 알고 있는 상태,
바로 그것이 깊은 수면의 침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한한 의식인 그 순수한 존재 속에서, '나'라는 것과 " 또 다른 것'이 도데체 어디에 있겠습니까?
-바슈시타 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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