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마나 마하리쉬 대담록 산책(29)

2012. 6. 3. 10:38성인들 가르침/라마나 마하리쉬

 

                                          <2012. 5. 23. 삼성산 국기봉에서>

 

. 방문자들이 왜 진아는 항상 존재하고 가장 친근한 것이면서 깨달아지지 않는지 비유로 설명해 달라고 청했다. 마하리쉬는 이러한 비유들을 열거하셨다. 

1. 자기 목에 걸려 있는 줄 모르는 목걸이 이야기.

2. 각자 자신은 빼고 세어 아홉명 밖에 세지 못한 열명의 바보이야기

3. 염소 무리에서 자라난 사자새끼의 이야기(자신이 사자인줄 모르는 경우)

4. 자신의 친부모를 몰랐던 까르나의 이야기('마라바하타'에서 아르쥬나의 어머니인 꾼띠는 결혼 전에 태양신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까르나를 바구니에 담아 강물에 떠내려 보냈는데, 어느 마차꾼 부부가 그를 건져내어 키웠다.)

5. 하층민의 가정에서 자라난 왕자의 이야기(거지왕자)

 

ㅇ. 어느 펀잡인 신사가 물었다. 그는 세계 여행가였다. 그는 하타 요가와 '나는 브라만이다'의 노선에 따른 얼마간의 명상을 해 왔는데, (명상을 시작하고) 몇분이 지나면 어떤 공백상태가 지배하면서 뇌에 열이 나고 죽음이 두려워진다고 한다. 그는 마하리쉬님으로부터 지도받기를 원했다.

마하리쉬 : 그 공백상태를 보는 것은 누구입니까?

방문자 : 제가 보는 줄 압니다.

마하리쉬 : 그 공백상태를 바라보는 의식이 진아입니다.

방문자 : 그 말씀으로는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저는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마하리쉬 : 죽음의 공포는 '나'라는 생각이 일어난 뒤에야 일어납니다. 그대는 누구의 죽음을 두려워 합니까? 누구에게 그 두려움이 있습니까? 자기와 육체의 동일시가 있습니다. 이 동일시가 있는 한 공포가 있겠지요.

방문자 : 그러나 저는 제 육신을 자각하지 못합니다.

마하리쉬 : 자각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누구입니까?

방문자 : 저는 모르겠습니다.

마하리쉬 : 그대가 하고 있는 명상법이 정확히 어떤 것입니까?

방문자 : '나는 부르만이다' (Aham Brahmasmi)입니다.

마하리쉬 : '나는 브라만이다'는 하나의 생각일 뿐입니다. 누가 그렇게 말합니까? 브라만 자체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그렇게 말할 필요가 어디있겠습니까? 참나도 그렇게 말할 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참나"는 항상 브라만으로 안주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의 생각일 뿐입니다. 그것은 누구의 생각입니까? 모든 생각은 실재하지 않는 '나', 즉 '나'라는 생각에서 비롯됩니다. 생각함이 없이 머무르십시오. 생각이 있는 한 공포도 있을 것입니다.

방문자 : 그것을 계속 생각해 가다 보면 망각현상이 있고, 두뇌는 열이 나며, 저는 두려워집니다.

마하리쉬 : 그렇습니다. 마음이 두뇌에 집중해 있기 때문에 거기서 열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생각이 있는 한 망각도 있기 마련입니다. '나는 부라만이다' 하는 생각이 있으면 망각이 뒤를 따릅니다. 그때 '나'라는 생각이 일어나고 동시에 죽음의 공포도 일어납니다. 망각과 생각은 '나'라는 생각에게만 있습니다. 그 '나'라는 생각을 붙드십시오. 그러면 그것은 허깨비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뒤에 남는 것이 진정한 '나'이며, 그것이 진아입니다. '나는 브라만이다'는 집중의 한 방편입니다. 그것은 다른 생각들을 물리쳐 줍니다.

그 한 생각만 지속되면 그것이 누구의 생각인지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그것이 '나'로부터 일어난다는 것을 알것입니다. 그 '나'라는 생각은 어디서 일어납니까? 그것을 찾아 들어가십시오. 그러면 '나'라는 생각이 사라지고, 지고의 진아가 스스로 빛을 발할 것입니다. 더 이상의 노력이 필요없습니다.

하나의 진정한 '나'만이 남게 되면 그것은 '나는 부라만이다'라고 말하지 않겠지요. '나는 사람이다'라고 계속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누가 시비하지 않는다면, 왜 자기가 사람이라고 선언해야 합니까? 누가 자기를 짐승으로 잘못 알기에 '아니오, 나는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오'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마찬가지로, 브라만 혹은 '나'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시비할 자는 아무도 없으며, 따라서 '나는 브라만이다'라고 반복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 델리의 우편전신청 재무 서기인 바르마씨는 폴 브런튼의 <비밀인도에서의 탐색>과 <비밀의 길>을 읽었다. 그는 12년간을 함께 행복하게 살았던 아내를 잃었다. 슬픔에 잠긴 그는 위안을 찾고 있지만, 책을 읽어서는 위안을 발견하지 못했기에 책들을 찢어 버리고 싶어 했다. 그는 질문도 할 생각이 없다. 그저 여기 앉아서 마하리쉬님의 친존에서 자신이 얻을 수 있는 위안을 얻고자 한다.

마하르쉬님은 마치 생각들이 연이어 지나가는 것처럼, 이따금씩 다음과 같은 취지의 말씀을 하셨다.

마하리쉬 : "아내는 절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내가 죽으면 매우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은 우리의 소견이 물질적인데 기인합니다. 만일 그 소견이 진아의 소견이면, 그런 고통은 사라집니다.

<브리하다라니야까 우파니샤드>에서는 "아내가 사랑스러운 것은 진아에 대한 사랑때문"이라고 합니다.

아내나 다른 사람들을 자기와 동일시하면, 고통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겠읍니까? 그런데도 그런 액운들은 철학자들의 마음마저 흔들어 놓습니다.

깊은 잠 속에서 우리는 행복합니다. 그때는 우리가 순수한 진아상태로 있습니다. 바로 지금도 우리는 똑같은 진아입니다. 그런 잠속에서는 아내도 없고 다른 사람들도 없고 '나'조차도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이 나타나서 쾌락이나 고통을 안겨줍니다.

깊은 잠 속에서 지복스러웠던 진아가 왜 바로 지금도 그 지복스러운 성품을 지속할 수 없습니까?

그런 지속을 막는 유일한 장애물은 몸과 자기의 그릇된 동일시입니다.

<바가바드 기타>에서는 말합니다. 

"비실재는 존재성이 없고, 실재는 존재하지 않은 적이 없다. 이 양자에 관한 진리를, 사물의 핵심을 꿰뚫어 본 각자들은 지각하고 있다." 

또 말하기를, " 그는 태어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 늘 존재해 왔으므로 사라지지도 않는다. 태어나지 않고 영원하며 태곳적 존재인 그는, 육신이 살해되어도 살해되지 않는다."고 했읍니다.

따라서 탄생도 없고 죽음도 없습니다. 생시가 탄생이고 잠이 죽음입니다.

그대가 사무실에 출근할 때나 깊은 잠이 들었을 때, 아내가 그대와 함께 있었습니까?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대는 아내가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만족했읍니다.

반면에 지금은 아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차이는 생각의 차이인데, 그것이 고통의 원인입니다. 그 고통은 아내가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은 마음의 장난입니다. 그 친구 (즉, 마음)는 즐거움이 있을 때에도 스스로 고통을 창조합니다. 그러나 즐거움과 고통은 마음의 창조물입니다.

또, 왜 죽은 사람에 대해 슬퍼합니까? 그들은 속박에서 벗어났읍니다. 슬퍼하는 마음이 그 자신을 죽은 사람에게 붙들어 매기 위해 만들어낸 사슬입니다.

"누가 죽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누가 망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너 자신이 죽고, 너 자신이 망해라(남의 죽음 등으로 인해 고통받고 슬퍼하느니, 차라리 자신의 에고를 죽이게 하라.) 그런 의미에서 그대가 죽고나면 아무 고통이 없습니다.

이런 종류의 죽음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비록 육신은 살아있다 해도 에고가 절멸되는 경우입니다. 에고가 지속되면 그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 합니다. 그 사람은 남의 죽음을 슬퍼합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에고의 꿈에서 깨어남으로서, 즉 에고의식을 죽임으로써) 그들보다 먼저 죽는다면, 슬퍼할 필요가 없습니다.

깊은 잠의 경험은, 육신이 없는 데서 행복이 온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현자들은 육신을 포기한 뒤의 해탈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 점을 확인해 줍니다. 그래서 현자는 몸을 벗어 버릴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품삯을 벌려고 머리 위에 짐을 이고 가는 인부는 그짐을 인 것이 전혀 즐겁지 않지만, 목적지까지 이고 가서 마침내 짐을 부리면 안도하고 기뻐합니다.

마찬가지로 현자는 이 몸을 지고 다니면서 그것을 버리기로 정해진 적당한 때를 기다립니다. 그대가 지금 그 짐의 절반인 아내를 벗어버렸다면, 그에 대해 감사하고 즐거워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그대의 신체적인 소견때문입니다.

아직 뭘 잘 모르면서 사후해탈(死後解脫,육신을 벗고 난 후의 해탈) 따위에 대한 가르침을 아는 사람들은 유신해탈(有身解脫, 육신을 가지고 있을 때의 해탈)을 칭송하면서, 그것을 두고 '육신을 영원히 살아있게 하는 신비한 힘'라고 부르지요.

그런 신체적 소견을 포기해 버리면, 그리고 그 사람이 진아로서 존재하게 되면, 아무런 고통이 없을 것입니다. 슬픔은 참된 사랑의 지표가 아닙니다. 그것은 대상에 대한 사랑, 그 대상의 형상에 대한 사랑만을 드러낼 뿐입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참된 사람은 그 사랑의 대상이 자기 안에 있다는,  그리고 그것이 결코 소멸될 수 없다는 확신으로써 드러납니다. 그렇기는 하나, 그런 경우의 슬픔은 현자들과의 친교에 의해서만 완화될 수 잇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라마나 마하리쉬 대담록에서 발췌- 

 

                                                              <2012. 5. 31. 예봉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