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 20. 19:45ㆍ성인들 가르침/라마나 마하리쉬
[안나말라이 스와미를 찾아온 한 헌신자가 다리 한쪽에 너무 심한 통증이 있었다. 그는 바닥에 편안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이 사람이 고생을 하는 것을 지켜보고 나서 안나말라이 스와미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안나말라이 스와미 : 수행하는데 몸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자신을 그것과 동일시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몸을 잘 이용하고 잘 돌봐 주어야 하지만, 몸에 너무 많은 신경을 써서는 안됩니다.
마음 속에는 너무나 많은 생각이 있습니다. 한 생각 뒤에 또 한 생각, 그 뒤에 또 한 생각, 이래서 생각이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그러나 계속 이어지는 - 대개 무의식적이기는 하지만- 하나의 생각이 있는데, 그것이 '나는 육체다'하는 생각입니다. 이것은 그 위에 다른 모든 생각들이 꿰어져 있는 줄입니다. 우리가 이 생각을 하여 자신을 육체와 동일시하기만 하면 마야(maya, 환상)가 따라 옵니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육체와 동일시하기를 그치면, 마야가 더 이상 우리에게 영향을 주지 않을 거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마야는 근본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바가반(라마나 마하리쉬)은 마야가 문자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고 말씀하셨읍니다. 그것은 실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야가 산출하는 모든 것은 그릇된 관념이 증식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실제로는 참되지 않은 것을 참되다고 여기는 결과입니다.
실재하지 않는 것이 어떻게 실제하는 것을 산출할 수가 있읍니까?
만약 석녀(石女,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가 자기 아들에게 맞았다거나 토끼의 뿔에 다쳤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녀가 제 정신이 아니라고 말해도 틀리지 않겠지요.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은 고통의 원인이나 다른 어떤 것의 원인이 될 수가 없읍니다. 마야는 실재하는 것처럼, 어떤 실제적 존재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거짓된 겉보습입니다. 진실은, 그것은 실재하지 않으며 전혀 어떤 존재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나는 육체다'하는 느낌과 그것에 의해 생겨나는 마야를 어떻게 제거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평등보심(平等保心, 일체를 평등하게 보는 태도), 곧 우리로 하여금 행복과 불행, 쾌락과 고통같은 양 극단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게 해 주는 평정(平靜) 혹은 평등을 소견이 있을 때 사라집니다. 평등보심이 성취되면 '나는 육체다'하는 관념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마야는 초월됩니다.
질문 : 육체를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내가 아닌' 것으로 보아야 합니까? 이 육체와 그것이 저에게 제공하는 모든 감각정보들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까?
스와미 : 이 육체는 그 자체로는 지각력이 없고, 생명력이 없읍니다. 마음 없이는 몸이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러면 마음은 어떻게 움직입니까? 육체가 제공하는 다섯가지 감각기관을 통해 움직입니다.
마음과 몸은 입안의 혀와 이빨과 같습니다. 이빨은 혀와 싸워서 그것을 깨물지 않습니다. 마음과 몸도 마찬가지로 조화롭게 결합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육체를 넘어서고 마음을 넘어서고 싶으면, 감각기관이 제공하는 모든 정보는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고, 완전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막에서 환상적인 오아시스를 만들어내는 신기루와 같이, 감각기관들은 실재하는 하나의 세계가 우리 앞에 있어서 마음에 의해 지각되고 있다는 인상을 창조합니다. 세계의 외관상의 실재성은 하나의 환(幻)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착각에 불과합니다. 마음이 실제로는 하나의 밧줄인 것을 뱀으로 인식할 때, 그것은 분명히 감각기관들이 '실재하는 바탕' 위에 하나의 상상적인 이미지를 투사하는 경우입니다. 이것이 - 큰 규모에서는 - 세계의 실재하지 않는 겉 모습이, 마음과 감각기관에 의해 저변의 실재인 진아 위에 투사되는 원리입니다.
이런 투사가 일단 일어나면, 우리는 (실재위의) 덧씌움- 즉, 우리가 창조한 실재하지 않는 이름과 형상들 - 을 보면서 그 바탕, 곧 그것들의 저변에 있는 실재를 망각합니다. 우리의 스승들과 영적인 저작들에서는 많은 예를 들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대가 나무로 조각한 코끼리를 보고 있으면, 어느 시점에서는 그것이 나무 일 뿐이라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그 조각된 형상을 보고 그대의 마음은 그 형상에 '코끼리'라는 이름을 부여합니다. 그대의 마음이 이 이름과 형상을 간직하고 있는 동안은, 더 이상 그것을 한 덩어리의 나무로는 취급하지 않습니다.
금으로 만든 세공품을 볼 때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대는 하나의 형상을 보고 그것을 반지니 목걸이니 하고 부르는데, 그 형상을 열심히 들여다 보고 있을 때는 금이라고 하는 그것의 본체를 일시적으로 잊어버립니다.
자기 탐구는, 우리가 바탕 위에 습관적으로 덧씌우고 있는 이름과 형상들 대신에 그 바탕에 주의를 기울이는 과정입니다. 진아가 바로 모든 사물이 현현(現顯)해 나오는 바탕이며, 깨달은 이는 이 실재하는 바탕을 끊임없이 자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감각기관들이 지각하는 이름과 형상들이 어떤 실제적 존재성을 가지고 있다고 속아서 믿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우리가 이 방 안에서 보는 그 무엇이든, 예컨대 저기 있는 바가반의 사진도 실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꿈 속에서 우리가 지각하는 대상들이 실재하지 않는 만큼이나 실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실재하고 물질적으로 실체가 있는 세계 안에 우리가 살고 있으며, 우리의 몸과 마음들은 그 안에서 움직이는 실재하는 개체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아를 보고 진아를 알게 되면 이런 모든 관념들은 희미하게 시라지고, 우리에게는 '진아만이 존재한다'는 깨달음(知)만 남게 됩니다.
질문 : 제가 보거나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실재하지 않는 투사물(投射物,그림자)로 간주하면, 저의 도덕의식은 어디에 기초를 두어야 합니까? 저는 죄의식을 느끼지 않고 그들을 죽이거나 강탈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들이 단지 제 꿈 속의 인물들일 뿐이라는 것을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스와미 : 우리가 지각하는 모든 것은 마야, 곧 하나의 실재하지 않는 꿈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실재하지 않으니까, 나는 내 좋을 대로 행동해도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꿈 속에서 저지르는 나쁜 행위에 대해서는 꿈 속의 과보가 있고, 그대가 아직 그 꿈을 현실로 인식하는 한, 그대의 나쁜 행위로 인한 과보를 받게 될 것입니다. 어떤 악도 저지르지 말고 누구도 미워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에 대해 평정심을 지니십시오.
[ 안마말라이 스와미는 이때 그 의 앞에서 눈을 감은 채 꼼짝 않고 앉아 있던 한 헌신자를 돌아 보았다]
오랫동안 몸을 움직이지 않고 좌선을 하면 마음이 둔해져서 따마스적(沈滯性)으로 됩니다. 앉아 있을 때 발가락이라도 움직이는 것이 따마스(tamas)를 없애는 좋은 방법입니다. 미라바이라는 유명한 여류시인(크리슈나에 대한 열렬한 헌신과 사랑으로 유명한 시인)은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는데, 그것은 명상을 하는 좋은 방법입니다. (아루나찰라산을 도는) 산 오른돌이도 좋읍니다. 그것은 걷기 명상입니다.
- <마음은 없다>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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