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도덕경 62장, 道로 나아가려면 내면의 뿌리가 되시오.

2011. 9. 2. 20:15성인들 가르침/노자도덕경

 

 

[무한진인의 노자도덕경 해설 62회]

 

[한문원문]-백서본

 

道者 萬物之注也 

도자 만물지주야 

善人之葆也

선인지보야

不善人之所葆也

불선인지소보야

 

美言可以市

미언가이

尊行可以加人

존행가이가인

 

人之不善也 何棄之有

인지불선야 하기지유 

故立天子 置三卿

고립천자 치삼경

 

雖有共之璧以先四馬

수유공지벽 이선사마

不若坐而進此

불약좌이진차

 

古之所以貴此者何也?

고지소이 귀차자하야

不謂求以得

불위구이득

 

有罪以免與?

유죄이면여

故爲天下貴

고위천하귀

 

 

[ 한글 해석] 

 

道라는 것은 만물에 비가 내리는 것과 같소이다,  

깨달은 이는 뿌리(내면)가 되었는데,

깨닫지 못한 이는 도달해야 될 곳이 뿌리(내면)인 것이오.

 

(겉 모습의)

아름다운 말이야 시장바닥의 사람들도 얼마든지 잘 할 수가 있고, 

품위있고 존엄해 보이는 행동이야 그 사람이 습관만 제대로 붙히기만 하면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그러나 내면적으로)

사람들이 도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이미 지니고 있는 것(뿌리)도 돌보지 않고 버리기 때문이오.

그래서 천자를 세우고 삼경을 설치한 것이외다.

 

(그러나) 

비록 두손으로 정중히 받들어서 공경해야 할 옥구슬(우상 또는 개념)이 있고

사두마차를 앞세워서 숭배한다 해도

고요히 앉아서 이 (내면의)도에 나아가는 것만은 못한 것이외다.

 

(이렇게)부터 이 도를 소중하게 여긴 까닭은 무엇이겠소? 

구하면 꼭 얻을 수가 있다고 말하는 가르침은 없소이다. 

 

죄가 있는데 면제해 줄수가 있겠소? (없소)

그 이유는 (꿈처럼)나타난 이 외면세계를 실재하는 것처럼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이외다. 

 

 

[해 설]

이번 62장은 왕필본에서 62장, 백서본 정리조에서는 25장에 해당됩니다.

문장 중에 한문글자 한두 글자 때문에 전체 내용이 바뀌어 질 수가 있는데,

이 62장도 그러한 문제점이 있는 글입니다.

이번 장의 해석은 대부분의 다른 번역서나 주석서들과는 좀 차별나게 해석이 되었읍니다.

심지어 맨 마지막 결론 부분은 다른 해석서들과는 정반대 의미로 된 것 같읍니다.

기존에 출판된  해석서들에서 번역상의 여러가지  의심나는 문제점들을 재검토하여 해석하다 보니,다른 해설서의 내용들과 좀 다른 내용으로 작성되어진 것 같읍니다.

  

간단하게 전체 내용을 요약해 보자면,

도라는 것은 만물에 (골고루)비가 내리는 것과 같은데, 즉 만물에 물을 대주는 것과 같은데,

깨달은 사람은 뿌리(내면)까지 깊히 도달되어 있어서 뿌리를 사용해서 저절로 도에서 주는 영원한 생명수의 물을 빨아들이는데,깨닫지 못한 사람은 외면으로  주의가 향해 있어서 내면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으므로, 내면으로 들어가서 뿌리가 되라고 말하고 있읍니다.

그 다음에는, 외면적으로 아름다운 말은 시장바닥에서도 아무나 잘 할 수가있고

품위있는 행동이야 남에게 존엄하게 보이도록 습관이 몸에 붙으면 누구나 가능하지만,

그러나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내면에서는 도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데,

왜냐하면 이미 지니고 있는 내면의 도를 돌보지 않고 내팽겨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사람들에게 道로 이끌기 위하여 천자를 세우고 삼경이라는 관청을 세워서,

옥구슬같은 도의 상징물을 받들어 모시고 사두마차에 태워서 화려한 의식으로 공경하면서 사람들에게 도를 따르게 했지만, 그런 외면적인 화려한 숭배의식이나 제례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겁니다.

그보다 실속있는 것은 홀로 고요하게 앉아서 도의 삼매 속으로 직접 들어가는 것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도를 공경하기 위해서, 천자를 세우고 삼경을 설치하고, 옥구슬을 道로 상징해서 화려한 숭배의식을 거행하며, 도를 귀하게 여긴 것은 무슨 까닭이냐 하면,

도는 아무리 구하려고 노력을 해도 그 노력한 만큼 얻을 수가 있다고 장담할 수 없기 때문에,

도에 대한 숭배를 화려한 제식으로 벌려서 사람들에게 도를 따르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도를 못 깨달은 사람들은 원천적인 죄를 짓고 있는데, 그 죄는 남들이 절대로 면죄해 줄수가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꿈같이 나타난 이 현상세계를 소중하게 여기며 실재한다고 스스로 착각하고 있는 그것이 바로 원죄를 저질르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원죄로부터 벗어나려면 스스로가 이 세상이 실재한다는 꿈에서 깨어나 내면의 도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금동서에 지금까지 나온 다른 모든 해석서나 주석서들은 위의 내용과는 전혀 다르게 해석들을 하고 있는 것 같읍니다. 

 

道者 萬物之注也(도자 만물지주야);도라는 것은 만물에 비가 내리는 것과 같다. 

<道者~>는 "도는 ~와 같다".즉 도는 '만물지주야'와 같다.라고 해석됩니다.

<注>자는 "물을 대다,물이 흐르다.물을 모으다,비가 내리다"라는 뜻이며, <也>는 어조사입니다.

만물에 골고루 비가 내리면 땅 속의 물은 어느 특정한 나무나 풀에게만 흐르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널리 퍼져서 흐르는 것이 마치 도가 전체적으로 펼쳐진 것으로 비유했읍니다.

온갖 초목과 생명체들은 각자가 알아서 뿌리의 능력에 따라 물을 자기 몫으로 모아서 생명을 유지합니다. 마찬가지로 도 역시 전체에 펼쳐져 있지만, 각자 의식의 뿌리까지 도달했느냐, 도달하지 못했느냐에 따라서 도를 깨쳐서 영생하느냐, 아니면 비극적인 개체로서 짧은 일생을 마치느냐 달라지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면 땅위의 온갖 식물들은 각자 자기의 뿌리를 통해서 물을 모으고,영양분을 섭취하여 줄기가 성장하고 잎이 무성하게 나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읍니다.

나무나 풀은 땅 밑에 뿌리를 단단히 뭍고 있고 줄기와 가지와 잎과 꽃과 열매는 땅밖으로 나와 있읍니다.

의식을 나무나 풀로 비유해 보자면, 밖으로 나타난 의식인 이 감각세계와 육체, 마음등은 마치 전체나무몸체에서 땅위로 나온 부분인 줄기,가지잎,꽃,열매등이라고 비유해 볼 수가 있고,

땅 속에 뭍혀서 보이지 않는 뿌리부분은 원인체 또는 초원인체라고 비유해 볼 수가 있겠죠.

 

이 문장에서 왕필본에서는 <萬物之奧>라고 다르게 되어 있읍니다.

<奧>자는 '깊숙하다,그윽하다,흐려지다,깊은 안쪽,아랫목'등의 뜻이 있는데, <萬物之奧>를 해석하면 "도는 만물의 깊은 내면과 같다"라는 뜻입니다.

즉 '만물의 내면 속에 깊숙히 감춰져 있는 것이 도'라고 말한 것인데,

그 말뜻 자체는 틀리지가 않지만, 백서본의 <注>자가 왕필본에서 <奧>자로 바뀐 것은 아마도 백서본의 물댈<注>자의 뜻이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아서, 왕필본의 필사자가 자신이 알고 있는 도의 특성으로 깊은 내면에 있다는 의미의<奧>자로 수정한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백서본의 <注>자는 " 비를 내려서 전체적으로 물이 흐르는 도의 작용"이라는 의미이지만,

왕필본의 <奧>자는 도가 위치하고 있는 자리가 은밀하게 감춰져 있음을 묘사한 글자로서 그 의미가 백서본의 <注>자의 원래 뜻과는 너무 달라져 있읍니다.

따라서 왕필본의 <奧>자는 다음문장과 의미적으로 적절하게 연결되지도 않으므로 여기서는 백서본의 원문을 채택했읍니다. 

왜냐하면 백서본이 왕필본보다 수백년 앞서 있는 것이기 때문에 백서본에 따르는 것이 더 정확하게 원본 노자도덕경의 본래 뜻을 파악할 수가 있읍니다. 

 

善人之葆也(선인지보야);  깨달은 이는 뿌리에 이르렀다.

<善人>은 일반사회적으로 "착한 사람"이라고 해석할 수 있지만,

이 노자도덕경에서만은 "도를 완전히 깨달은 사람" 또는 "道人" "眞人"이라는 뜻입니다.

<善>자는 일반적으로는 '착하다' '좋다'는 뜻이지만, 노자도덕경에서는 도를 깨쳐서 주객 이원화 마음을 초월한 도인의 깨달은 상태를 말합니다.

대부분의 해석서들이 "착한 사람 또는 선한 사람"으로 해석을 했읍니다만, 이렇게 일반사회에서 흔히 말하는 '착한 사람'으로 해석을 하면 이 62장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핵심주제가 명확하게 표현될 수가 없읍니다.

<善人之葆也>라는 말은 " 깨달은 사람은 뿌리가 되었다."라는 뜻입니다.

비가 내려서 땅 속의 물은 항상 흐르고 있지만, 뿌리가 잘 뻣은 나무는 물을 잘 빨아들여서 크게 성장하겠지만, 뿌리가 없으면 비가 내려 땅속에서 흐르는 물조차 빨아들일 수가 없겠죠.

즉 도를 깨달은 사람은 의식의 뿌리에 도달했으므로 도에서 저절로 흘러나오는 물을 뿌리에서 받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땅밑의 물기를 빨아들이려면 뿌리를 통해야 나무나 풀들이 물기를 흡수할 수가 있는 것처럼, 도가 흘려주는 지혜의 물도 의식의 뿌리를 통해서 흡수해야 되겠지요.

그 하늘에서 내려주는 비, 물이란 바로 도에서 나오는 지혜의 빛, 깨달음,영원한 생명수입니다. 

 

<之>는 "사용하다,쓰다, 이르다,되다,도달하다"의 뜻이며,

<葆>는 "밑둥, 뿌리", <也>는 어조사 이므로

<깨달은 이는 뿌리에 이르렀다, 또는 되었다>고 해석할 수가 있읍니다.

깨달은 사람은 의식의 뿌리에 도달했으므로, 그 뿌리를 통해서 도의 바탕에 이르른 것이죠.

여기서 의식의 뿌리란 '내가 있다'는 느낌이 나오는 존재의식의 핵점, 초원인체를  말합니다.

구도자가 의식의 뿌리(초원인체)에 안정되어 있으면 저절로 절대본체를 깨치게 되는데,

최종 절대본체를 깨달은 이후에도 역시 여전히 도인은 의식의 뿌리에 안정되게 머물러 있는 상태에 있게 됩니다.

그렇게 절대본체를 깨닫고 나서도, 육체가 살아있기 때문에 외부에서 볼 때는 마치 의식과 절대본체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본인 자신의 내면은 전체가 일체인 절대본체일 뿐이라는 확신으로 안정되어 있읍니다.

 

그런데 <善人之葆(寶)也>에서 백서본 정리조와 왕필본에서는 보배<寶>자로 되어 있는 것을 여기서는 풀더부룩할 <葆>로 한문글자를 일부러 바꾸어서 해석했는지 그 이유를 밝히겠읍니다.  

원래 백서본의 원문에서는 <풀초변+구슬옥변+지킬 呆>로 구성된 글자로써 지금은 쓰지 않는 글자입니다.

물론 왕필본 형성시기에도 이 글자가 쓰이지 않았기 때문에 보배<寶>로 왕필본에서도 글자를 바꾼 것 같읍니다.

문제는 백서본의 이 글자를 백서본 정리조 학자들이 왕필본과 같은 보배 <寶>자로 읽었읍니다.

그러다 보니 이 문장의 해석이 <선한 사람은 보배다>라고 그동안 대부분의 학자들이 해석들을 해왔읍니다.

이런 해석의 뜻으로는 앞 문장과 뒷 문장 간에 전혀 조화도 맞지도 않고,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불분명해서 직감적으로 문장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 챌 수가 있읍니다..

그래서 본 필자는 백서본의 이 원문글자를 '풀 더부룩 할 <葆>보자'로 읽고 그뜻은 "뿌리, 밑둥"의 의미로 해석을 했읍니다.

왜 이렇게 읽었는가를 자세하게 설명할려면 좀 길어지는데, 간단하게 말하자면 원래 백서본 원본 글자 모양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풀 뿌리가 옥에 붙어서 유지하고 있다는 글자'의 뜻이라고 판단되어, 그 글자와 가장 비숫한 모양의 현용글자를 찾다보니 <葆>자를 찾았고, 그 <葆>자의 여러 뜻 중의 하나에 "뿌리,밑둥"이라는 내면의 뜻이 포함되어 있어서 이 <葆>자를 선택해서 해석을 했읍니다.

 

不善人之所葆也(불선인지소보야);

不善人之所寶也; 깨닫지 못한 사람도 도달해야 될 곳이 뿌리(내면)인 것이오.

<不善人>은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을 말합니다.

<之所葆也>는 "도달해야 될 곳이 뿌리(내면)이다."이라고 해석됩니다.

<之所~>는 여기서는 <도달되어야 할 곳>로 해석할 수가 있읍니다.

즉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 또는 구도자는 "의식외면에 있는 대상들에 관심을 주지 말고, 의식내면의 뿌리에 들어가야 한다" 라는 뜻입니다. 

즉 의식의 뿌리까지 들어가서 뿌리를 통해서 도에서 나오는 깨달음(지혜)의 물을 흡수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구도자가 의식의 뿌리상태(초원인체,순수존재의식)에 완전히 안정되면, 자신이 무형상(無形狀)의 절대본체임을 저절로 깨치게 됩니다.

구도자가 지향 할 곳은 바로 이 이 의식의 뿌리까지 도달되는 것이 1차적인 목표입니다.

그 의식의 뿌리라는 것이 바로 '내가 있다'는 느낌이 나온 존재의식의 핵점을 말합니다.

그러나 아직 깨닫지 못한 구도자는 이 의식의 뿌리상태로 안정되게 진입하지 못하고,

항상 외부의 대상만을 좇아 다니기만 하므로, 현상적인 대상에 대한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읍니다.

따라서 구도자는 주의를 내면으로 되돌려서, 마음의 움직임을 고요하게 하여 의식의 뿌리 속에서 안정되어야 합니다.

 

美言可以市(미언가이시);  아름다운 말은 시장바닥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가 있고,

도에 대해서 이론적인 개념이나 그럴듯한 말은 세속에서도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말재간만 있으면 도에 깊히 안들어도 얼마든지 미사여구와 그럴듯한 이론을 남들에게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이죠.

완전히 깨닫지 못했어도 어떤 사람은 겉으로는 언설로써 도인처럼 완벽하게 흉내낼 수가 있읍니다. 따라서 외면적으로 번지르한 말솜씨와 이론은 깨달음하고는 전혀 관계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요즘엔 겉으로 논리정연한 이론을 갖추고 외국의 여러 유명대학에서 박사박위를 받았다고 스스로 자랑하면서 다재다능한 언변으로 막힘없이 말 잘하는 사람이 마치 자기가 도를 깨달은 척 하며 많은 사람들 앞에서 종교경전이나 철학 강연을 하고 연예인들처럼 매스콤을 통해서 대중적인 인기에 자기도취를 하고 있는 사람도 간혹 심심치 않게 목격할 수가 있읍니다.

 

尊行可以加人(존행가이가인);

품위있는 행동이야 그 사람의 습관만 제대로 덧붙히면 가능하지만,

도인같은 풍모를 흉내내며 품위있고 존귀한 태도를 지을려고 한다면,

그 사람이 조금만  습관을 들이면 얼마든지 품위있고 단정한 자세를 남들에게 보여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의 겉모습으로 나타나는 언행은 얼마든지 의도적으로 조작할 수가 있기 때문에

그런 외부적인 언행에만 관심을 가지면 깨달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멋진 말과 존엄한 품행같은 겉치레 모습만 관심들을 갖는다는 것이죠.

그래서 사람들이 내면의 진실한 도를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人之不善也 何棄之有(인지불선야 하기지유);

人之不善也;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는데,

何棄之有;  왜냐하면 지니고 있는 그것(내면)을 돌보지 않고 버리기 때문이오.

<人之不善也>는 사람들이 겉으로는 아름다운 말과 존엄한 태도를 취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내면적으로는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何棄之有>는 기존의 백서본이나 왕필본들이 모두 의문문으로 해석을 했읍니다.

의문문으로 해석하면 "어찌하여 이미 있는 그것을 버리는가? 또는 돌보지 않는가?"라고 해석할 수도 있읍니다.

또한 <何>를 "왜냐하면"으로 해석하여 그 이유를 서술하는 문장으로 바꾸어서 해석해도 됩니다. 

<棄>는 "버리다, 돌보지 않다"라는 뜻이고, <之有>는 "이미 지니고 있는 그것"으로 해석이 됩니다. 

<何棄之有>는 "왜냐하면 지니고 있는 그것(道)을 돌보지 않고 있기 때문이오"는 서술문과

"어찌하여 이미 지니고 있는 것도 돌보지 않고 있는가?"라는 의문문으로 두가지로 해석할 수가 있읍니다.

서술문으로 해석하나 의문문으로 해석하나 전달하는 메세지 강도는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는 의문문으로 해석하지 않고, "왜냐하면~ " 식으로 해석을 했읍니다.

이 문장에서 <之有>는 "이미 지니고 있는 그것"이란 바로 항상 있는 道의 본체를 말합니다.

사람이 자기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아는 앎 그자체가 바로 절대본체인 참나가 아는 것이죠.

그 주시자인 참나가 바로 의식의 뿌리 넘어에 이미 존재하는데, 그것은 항상 누구나 이미 지니고 있는(之有) 것입니다.

만물에 물을 주는 도(참나)는 항상 내면에 변함없이 있는 것이고,

침묵 속에서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지켜보고 있읍니다.

그래서 <之有> " 있는 그대로의 그것"이라고 묘사한 것입니다.   

 

故立天子 置三卿(고립천자 치삼경);그러므로 천자를 세우고 삼경을 설치한 것이다.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은 이미 지니고 있는 그것(道)을 잊어 버리므로,

그도가 있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가르쳐 주기 위하여 천자도 세우고 관청도 설치했다고 말하고 있읍니다.

고대시대에는 신이나 도를 관장하는 제사장겸 임금이 천자이고,

그 천자의 업무를 보좌하는 것이 삼경이라는 관청의 일이라고 할 수가 있겠읍니다.

신탁정치시대나 단군시대에는 신 또는 하늘의 제사장, 단군이 나라를 다스리는 시대가 있었죠.

아마도 그런 고대시대의 천자(하늘에 제사지내는 제사장 겸 왕)와 천자를 보좌하며 나라를 다스리는 삼경이라는 관청이 세워진 것이 초기에는 사람들에게 道 또는 하늘과 神을 숭상하고 제사의식으로 백성들을 선도하면서 동시에 나라를 다스리기 위하여 세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雖有共之璧以先四馬(수유공지벽 이선사마)

雖有共之璧 ; 비록 두손으로 받들어 올려야 할 옥구슬이 있고

以先四馬 ; 사두마차를 앞세워서 공경한다 해도

도를 백성들에게 보급하고 교육시키기 위하여 천자를 세우고 삼경이라는 관청까지 세워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도를 공경하는데, 도는 마음으로 알수도 없고 보여질 수도 없는 것인데, 도를 어떤 귀한 옥구슬 같은 상징물로 공경하던가, 혹은 개념적인 이념으로 만들어 최고의 신으로 대우하여 공경한다 해도 잘못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대 시대에는 아마도 도를 귀한 옥구슬로 상징화해서 공경하는 제사를 지낸다던가,

또는 노자도덕경 속의 글귀나 이론적 철학개념을 종교이념으로 믿는 의식이 있었겠죠.

물론 노자도덕경과 장자의 저서를 근거로 하여 여러종파의 도교라는 종교도 생겨났는데,

이러한 제례의식이나 종교등을 전부 총괄해서 일괄적으로 비유하여 표현한 것이<有共之璧>이라고 "옥구슬을 공경하는 것" 있음을 묘사한 것 같읍니다. 

이러한 도를 공경하는 제례의식이나 도교 같은 종교의식은 결국 이원적인 현상세계의 대상적인 일이므로 직접 도를 깨우치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고 쓸데없는 일이라고 아래 문장에서 말하고 있읍니다. 

<以先四馬>라는 문장은 고대에는 가장 공경하는 신 또는 싱징물이나 천자가 제례를 지내기 위해서 거리를 행진할 때에 호화롭게 장식한 사두마차에 상징물이나 천자를 맨 앞에 태워서 행진했던 것 같읍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게 공경해 준다는 것을 묘사한 것 같읍니다. 

 

不若坐而進此(불약좌이진차); 가만히 앉아서 이 도로 나아가는  것만은 못하다.

도를 공경한다고 천자와 삼경이 다 동원되어 사두마차에 태워서 거창하고 호화롭게 도에 대한 공경제례를 치룬다 하더라도,고요한 곳에서 홀로 앉아 명상의 삼매 속에 들어 앉아 도와 직접 하나가 되는 것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즉 도를 형식적인 의식제례로 공경해 보아야 쓸데없이 낭비적인 일이며, 실질적으로 홀로 도의 삼매에 들어가 전체와 하나가 되어 보는 것이 훨씬 더 낫다는 것입니다.

형식적인 제례나 의식에 관심을 주지 말고, 홀로 조용히 침묵의 삼매 속에 들어가 있어야 도를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외부 대상에 대한 요란스러운 이원화적인 숭배행위는  도의 일원화 상태인 고요한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만 못하다는 말씀입니다.

 

古之所以貴此者何也?(고지소이 귀차자하야);

그 옛날에 이 도를 귀하게 여긴 까닭은 무엇 때문인가? 

<古之> "그 옛날에는", <所以> "까닭은~"

도를 위해서 천자를 세우고, 삼경을 설치하며, 사두마차를 앞세워서 옥구슬을 두손으로 바쳐 올리며 귀하게 공경하던 까닭이 무엇인가?하고 따져 묻고 있읍니다. 

 

不謂求以得(불위구이득); (도는) 구하려고 애쓰면 얻을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不謂> "말하지 않는다", <求以得> "구하면 얻을 수 있다"

도를 열심히 추구하면 얻을 수가 있다고 하는 말은 이제까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도를 얻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을 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도를 얻으려면 억지로 노력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노력을 하지 않으면 도를 어떻게 얻을 수가 있을까요?

도는 우리들 내면 바탕에 항상 "있는 그대로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넘어서 뿌리로 들어가면 저절로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 넘어 뿌리로 들어가는 데는 어떤 특별한 방편이나 의도적인 수행을 억지로 할 필요는 없고,

다만 조용하게 앉아서 존재느낌을 자각하는 그 자각자체에 주의를 기울이기만 하면 저절로 내면으로 가라앉게 되고, 내면 뿌리에 오랫동안 안정되어 있으면 어느때 불시에 절대본체가 저절로 드러납니다. 

도를 얻어야 겠다는 욕심조차 전부 사라졌을 때에 바야흐로 도가 그 바탕을 드러내는 것이죠.

억지로 무슨 수행행위를 한다면 오히려 에고만 더욱 더 강화시킬 뿐입니다.

 

有罪以免與?(유죄이면여);죄가 있는데 면제해 줄 수 있겠는가? (면제해 줄 수가 없다)

이 문장은 얼뜬 보면 엉뚱하게 갑자기 툭 튀어나온 의문문 같읍니다만,

사실은 결론적인 답을 강조해서 알려주려고 미리 의문문 형식으로 폼을 한번 쓱~ 잡아보는 문장입니다.

도를 공경하기 위하여 천자와 삼경을 세우고, 옥구슬을 바치며 사두마차를 앞세우는 이러한 의식적 제례 행위와 도를 이 현시세상에서 구하려고 욕심을 가지는 그 자체가 바로 죄를 스스로 저지르고 있는 짓이라는 말입니다.

도를 추구하는 욕망자체가 죄이므로 그 욕망을 가지고 도를 얻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죄가 면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은 다른 말로 도를 얻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음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죄를 지었기 때문인데,

그 죄는 스스로 저지른 것이기 때문에 면죄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저지른 원천적인 죄가 무엇인지는 아래 문장에 나와 있읍니다. 

 

故爲天下貴(고위천하귀);(면죄 될 수가 없는) 그 까닭은 세상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그 사람 자신이 이 환상의 꿈같은 세상을 너무나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근본적인 원죄라는 것입니다.

나타난 세상이란 의식이 이원화로 나눠져서 꿈처럼 나타난 허황한 환상인데,

그 진리를 알지 못하고 이 현상세계가 실재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나"라는 개인이 행위의 주인공으로 실재한다고 여기면서 온갖 욕망과 집착 속에서 끄달리며 살고 있는 그 삶자세가 바로 무지로 인해서 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을 실재한다고 귀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죄를 저지른 것이며,

이 죄는 남이 면죄해 줄 수 없는 것이고, 스스로 무지에서 풀려나야만 저절로 죄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스스로 이 죄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주 간단합니다. 이 현상세계와 나라는 존재성이 꿈과 같은 허황한 거짓인지를 확실하게 알기만 하면 됩니다.

이 세상과 자신의 정체성이 모두 꿈과 같은 허황된 환상임을 확신하게 되면,

저절로 의식이 내면으로 들어가서 뿌리에 안정되면 참된 실재인 道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내면의 도와 하나가 되려면 일단 의식의 뿌리가 되어야 합니다.

의식의 뿌리에서 완전히 안정되면 도와 하나가 되는 것이죠.

그러면 바야흐로 자기의 원죄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번 62장에서의 핵심 가르침은

외부에 나타나 보이는 현상세계는 꿈처럼 허황된 환상이므로 실재하는 것이라고 믿지 말고,

내면으로 주의를 되돌려서 의식의 뿌리가 되어 실재의 도를 만나라고 충고하고 있읍니다. 

감사합니다. -무한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