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도덕경 55장, 덕이 두터운 도인은 어린아이와 비슷하오.

2011. 7. 1. 20:28성인들 가르침/노자도덕경

 

 

[무한진인의 노자도덕경 해설 55회]

 

[한문원문]

 

含德之厚者 比於赤子

함덕지후자  비어적자

 

蜂(萬虫)虺蛇不蜥 攫鳥猛獸不搏

봉채      훼사불석   확조맹수불박

 

骨弱筋柔而握固 未知牝牡之合然怒 精之至也

골약근유이악고   미지빈모지합연노   정지지야

 

終日號而不(口憂) 和之至也

종일호이불우      화지지야

 

和曰常 知和曰明 益生曰祥 心使氣曰强

화왈상 지화왈상 익생왈상 심사기왈강

 

物壯卽老 謂之不道 不道早已

물장즉노 위지불도 불도조이

 

[한글 해석]

 

덕이 두터운 사람은

마치 간난아기와 비슷하오. 

 

(간난아기는) 

벌이나 전갈같은 독충과 독사도 물지 않고

사나운 새와 맹수도 해치지를 않소. 

비록 뼈는 약하고 근육이 부드럽지만 잡는 힘이 단단하고

남녀교합에 대해서는 아직 모르지만, 고추가 그대로 뻣뻣이 서있는 것은

정기가 지극하기 때문이오.  

하루종일 울어도 목이 쉬지 않으니,

(道와) 조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이외다. 

 

(그러므로) 

(道와)조화롭게 되는 것이 영원하고 변함없는 바탕에 머무는 것이며,

(道와)조화롭게 되는 것을 아는 것이 밝은 지혜(깨달음)라고 하오.

 

자기 이익만 챙기는 이기적인 삶은 재앙이라고 말하며,

마음이 기분에 따라 사용되는 것은 (나라는 개체에고를) 더욱 강하게 굳힌다고 말하는 것이외다. 

 

모든 사물은 강성해지다가 곧 노쇄해져 버리나니

이렇게 변화하는 것들은 道가 아니라는 말이오.

道가 아닌 것은 일찌감치 끝이 난다는 것이외다 

 

[해 설]

이번 55장은 곽점본,백서본(18장), 왕필본(55장)등, 다른 여러 본에 공통으로 있는 문장이며,

내용도 글자 몇개가 바꾸어진 것 외에는 모두 비슷합니다.

또한 대부분의 다른 해석서들도 일부 한,두 문장을 제외하고는 대략 비슷한 내용으로  해석되어 있읍니다.

 

간단히 요약해 보자면,

도인은 간난아기와 같이 순수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간난아기의 의식은 자연스럽고 순수하기 때문에 독충과 독사,맹수들도 해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도와 하나로 합일되어 있어서 정기가 지극하게 넘쳐 난다고 말하고 있읍니다.

도인도 어린아이와 같이 자연과 하나이고, 순수한 정기를 지니고 있다는 암시를 하고 있읍니다. 

도와의 완전한 조화야 말로 영원하고 변함없는 절대 바탕에 머무는 것이며,

이것을 아는 것이 바로 깨달음의 지혜라고 말하고 있읍니다.

반면에 자기 이득만 챙기는 이기적인 삶은 불행을 야기하는 재앙이며,

마음을 그 기분의 움직임에 따라서 사용하면 개인적인 에고성만을 강화한다고 충고하고 있읍니다.

마지막 결어로 모든 움직이는 것은 도가 아니라고 말하며, 도가 아닌 것은 일찍이 사라진다고 말합니다.   

 

含德之厚者 比於赤子

함덕지후자   비어적자

含;머금다,품다.厚;두텁다. 比;견주다,같다. 赤子;어린애,간난아이

含德之厚者; 덕을 두텁게 품은 사람은

比於赤子; 간난아이와 같소.

덕을 두텁게 품고있는 사람은 바로 궁극의 절대바탕에 이르른 도인을 말합니다.

이렇게 궁극에 이른 도인은 간난아이와 같다고 말하고 있읍니다.

태어난지 얼마 안되는 간난아기는 자기자신조차 모르는 무지상태에 있지만,

"나"라는 에고적 의식이 발달되지 않아서 순수의식과 비슷합니다.

그 태어난 아기가 성장하여 어른이 되면, 어떤 왕같은 높은 신분이 될 수도 있고, 비천한 종이 될 수도 있겠지만, 아기의 그 바탕의식상태는 모든 사람의 공통된 순수한 의식상태입니다.

아기가 태어나서 자기자신의 존재는 모르지만, 모든 행위는 자동적인 의식의 반응작용에 의해서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배곺으면 울어서 엄마한테 젖을 달라고 신호를 보내고, 아랫도리가 축축하면 기저귀를 갈아달라고 울으면 엄마가 저절로 모든 것을 해결해 줍니다.

그러나 그런 행동은 아기가 의식적으로 한다기 보다는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상태에서 자연적으로 작용하는 의식의 반응행위일 뿐이지, 그 아기에게는 어떤 '나'라는 개체의식이 없읍니다.

따라서 궁극에 이르른 도인과 간난아기는 그 순수한 의식 과 무심의 무위행 측면에서 비슷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난아기 상태에서는 망상이 전혀 없고, 오로지 평안과 지복상태만 있으며, 배곺으면 울고, 젖을 먹다가 졸리우면 잠자고, 혼자서 지복 속에서 싱긋싱긋 웃기도하면서 세상과 자기자신의 존재조차 있는지 모르고, 전체와 일체가 되어 있는 무위상태에 있읍니다.

이 간난아기의 마음상태가 도인과 비슷하다는 말은 도덕경의 여러장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내용입니다.

예를 들면 10장에서 <專氣致柔 能嬰兒乎>-주의를 오롯이 하여 마음의 움직임을 그쳐서 젖먹이 아이처럼 될수가 있겠는가?-라는 문장이 있읍니다.

기타 여러군데에서 간난아이의 마음을 도에 비유한 내용이 나와 있읍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3년 내지는 4년이 경과해야 자아감이 형성되어 남과 자신을 구분하고 자기의 개체적 존재성을 알게 됩니다.

그 이후에 몸이 커가면서 점점 앎과 자아 정체성이 강화되고, 개인으로서 독특한 개성과 지성이 발달하게 되므로써 자기의 순수한 아기시절의 보편적인 바탕마음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기가 태어나서부터 약 2~3년까지는 자기자신의 개인성을 명확하게 못느끼고 주변사물도 자기와 다른 것이라고 구별하지도 않읍니다.

말하자면 개인으로 분화되지 않은 전체성으로 거의 순수한 의식에 가깝게 전체와 일체감을 느끼고 있읍니다.

물론 감각기관이나 행위기관이 작동은 하지만, 그대로 휠타없이 무위적인 반응을 하게 되고, 무지하긴 하지만 이원적으로 너와 나라는 분리된 마음은 아직 발달하지를 않았읍니다.

어른이 되어, 거대한 국가를 자기 손아귀에 웅켜잡은  정치지도자이든, 범세계종단의 대표자이든, 흉악한 살인강도이든,고명한 예술가이든, 도시거리의 남루한 노숙자이든 간에 모든 사람은 다 똑같은 간난아기시절의 순수하고 무지한 마음이 그대로 바탕에 공통으로 깔려 있읍니다.

이 간난아기의 순수한 바탕마음이 바로 궁극에 도달한 도인의 보편적인 마음과 비슷하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모든 종교인과 구도자들이 추구하는 것은 바로 간난아기시절의 순수한 하나님 마음을 깨닫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나 카도릭에서 아기예수를 찬양하는 것은 바로 모든 사람 마음 내면에 지니고 있는 공통된 하나님 마음, 즉 순수한 아기바탕마음을 회복하라고 상징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도 아기부처의 '天上天下有我獨存'이라는 말은 바로 아기부처의 순수하고 전체가 하나가 된 보편적인 마음을 그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이 깨달음에 대한 유일한 본보기 실례는 바로 "간난아이의 순수한 마음"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모든 구도자들이 애매모호하게 여기는 궁국의 절대 깨달음 목표를 바로 여기서 명확하게 이해할 수가 있을 겁니다.

우리 구도자들은 누구나가 지니고 있는 간난아기의 순수하고 전체성의 하나 마음을 자연스럽게 그리고 스스로 회복시키는 것이 바로 그 목표입니다.

 

蜂(萬虫)虺蛇不蜥 攫鳥猛獸不搏

봉채      훼사불석 확조맹수불박

蜂; 벌, 채(萬虫);전갈, 虺;살무사,蛇;뱀,蜥;(벌레가) 쏘다. 攫;움키다,가로채다, 鳥;새.猛;사나운,

獸; 야생짐승, 搏; 덮치다.

蜂(萬虫)虺蛇不蜥; 벌이나 전갈같은 독충과 독사가 쏘지 않고

攫鳥猛獸不搏; 사나운 새와 맹수도 해치지 않소.

간난아기는 '나'라는 에고의식이 없기 때문에 전체가 하나가 된 상태와 다르지 않읍니다.

간난아기의 마음은 무심상태이기 때문에 자기가 육체라는 생각도 전혀 없읍니다.

그래서 간난아기 입장에서는 전체 우주가 자기자신입니다. 그외에는 아무것도 없읍니다.

따라서 자연의 일부인 독충이나 야생짐승들도 전체의식을 가지고 있는 간난아기에게 어떤 해꼿이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간난아기는 어떤 개체적 동물이 아니라, 전체의식이기 때문에 해칠데가 없다는 것입니다.

역시 도인도 간난아기와 마찬가지로 독충이나 독사, 맹수들이 해치지 않고 친구처럼 같이 지낸다는 옛날 민담도 많이 있읍니다. 

 

骨弱筋柔而握固 未知牝牡之合(會)然(而脧)怒 精之至也

골약근유이악고    미지빈모지합(회)연(이최)노   정지지야

骨弱;뼈는 약하고, 筋柔; 힘줄은 부드럽지만, 握固; 잡는 힘은 단단하다.

未知; 아직 알지 못하다. 牝牡之合; 남녀교합(성교), 合然;저절로 (자지가) 뻣뻣이 선다.

精;정기,생명력, 至;이르다,지극하다. 

骨弱筋柔而握固; 뼈는 약하고 힘줄은 부드럽지만 잡는 힘은 단단하고

未知牝牡之合然怒(곽점본); 남녀교합에 대해서는 아직 모르지만, 고추는 그러하게 뻣뻣이 서있으니

精之至也; 정기가 지극하게 이르렀기 때문이오.

어린 아기는 뼈가 약하고 근육이 부드럽지만, 손아귀의 잡는 힘이 단단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수 있을 겁니다.

이런 현상은 아기가 의도적으로 손아귀의 힘을 쓰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자연적인 힘이 그렇게 세다는 것이죠.

또한 어린애가 남녀의 성교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데도 고추가 바짝 서는 것은 자연적인 정기가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에 그 힘이 저절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저절로 자연의 정기가 나타나는 것은 무심의 도와 일체가 되어 있기 때문에 그 힘이 저절로 나타난다는 것이죠.

도인도 간난아기와 마찬가지로 항상 자연적인 정기가 조화롭게 넘쳐 흐른다는 암시가 포함되어 있읍니다.

 

<未知牝牡之合然怒>는 곽점본의 문장이고,

백서본에서는 <未知牝牡之會而脧怒>라고 되어 있읍니다. 

곽점본의 <合>과 백서본의 <會>는 똑같이 '합친다,모인다'라는 뜻으로 같은 뜻의 글자이며,

곽점본의 <然>과 백서본의 <而脧>은 글자와 뜻이 다르지만, <而脧>은 직접적으로 '어린아이 자지'를 말한 것이고, <然>은 그것을 간접적인 지칭 대명사 비슷하게 표현한 말입니다.

왕필본은 좀 다른 글자가 섞여 있어서 여기서는 취급하지 않았읍니다. 

 

終日號而不(口憂) 和之至也

종일호이불우         화지지야

終日; 하루종일, 號; 부르짓다. 우(口憂);목이 메다.목이 쉬다. 和; 화하다,합치다,모이다,서로 응하다. 至; 이르다,지극하다.

終日號而不(口憂); 하루종일 울부짓어도 목이 메지 않으니,

和之至也; (도와) 조화가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오.

또 간난아기는 하루종일 울어도 목이 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는 것은 바로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의식의 순수작용이므로 목이 쉽게 쉰다거나 기관이 손상된다는 일은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자연적인 행위들은 순수한 생기작용과 일체가 되어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힘이 소모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궁극을 이룬 도인도 간난아이와 같이 전체 순수한 생기작용과 일체가 되어 조화롭게 있다고 암시하고 있읍니다.  

 

和曰常 知和曰明 益生曰祥 心使氣曰强

화왈상  지화왈상    익생왈상 심사기왈강

和曰常; (도와)조화롭게 되는 것이 영원하고 변함없는 바탕이 되는 것이며,

知和曰明; (도와) 조화롭게 되는 것을 아는 것이 밝은 지혜(깨달음)라고 말하는 것이오.

益生曰祥; 이익만 챙기는 이기적인 삶은 재앙만 일으킨다고 말하며

心使氣曰强; 마음이 기분에 따라 사용되는 것은 그 개인성이 더욱 강해지는 것이라고 말하오.

55장의 중심 주제가 바로 이 문장들입니다.

위에서 간난아이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무위자연적인 현상들이 모두 도와 일체로 조화된 상태이며, 그렇게 도와 하나가 된 상태가 바로 영원하고 변함없는 절대바탕에 안정되게 머물러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읍니다.

항상<常>자는 도덕경 전반에 나오는 한자이며, 道의 본체인 <절대 바탕>을 말합니다.

절대본체는 항상 변함없이 일정하고, 움직임이 없으며, 모든 것을 지지하는 바탕이므로 항상하다는 <常>자를 쓰고 있읍니다.

이 절대바탕과 조화롭게 화합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바로 밝음, 즉 깨달음의 지혜라고 말하고 있읍니다.

자기가 어째서 절대바탕이며, 절대바탕에 안정적으로 머물러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하는 문제가 바로 道에 대한 지혜(깨달음)를 얻기 위한 정신수행이라고 볼 수가 있읍니다.

절대본체, 도에 대한 앎(眞知)이 바로 깨달음이라고 하며, 지혜라고도 합니다.

 

반면에 이기적인 생활(益生)은 사람에게 항상 희노애락(喜怒哀樂), 생노병사(生老病死)이라는 고통의 수뢰바퀴 속에서 헤어나질 못하므로, 재앙이라고 말하고 있읍니다.

또한 마음이 그 움직임(氣紛)에 따라 쫏아다니면서 사용한다면 그 개체적인 자만감(에고성)이 더욱 강하게 굳어진다고 말하고 있읍니다.

마음은 개체적 에고에 딸린 의식의 움직임이므로,

만일 마음이 기분의 움직임에 이끌려다니거나, 외부 대상을 쫏아 다니며 욕망에 끌려서 움직인다면, 그 마음의 움직임에 이끌리는 자기 개인성의 에고도 더욱 좁아지므로 에고성이 뻣뻣하게 강화된다는 것입니다.

개인은 외부의 대상에 대한 집착과 욕망의 성취에만 눈이 팔려서 자기의 본래성품을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도인은 밖으로 나타난 대상에 주의를 주지 않고, 움직임없고 항상 일정한 내면에 주의를 고정하고 있으므로, 마음의 속절없는 움직임에는 주의를 두지 않는다는 암시적 뜻이 있읍니다. 

 

物壯卽老 謂之不道 不道早已

물장즉노 위지불도 불도조이

物; 만물, 壯; 강하다,굳세다. 

物壯卽老; 만물은 강성해지다가 곧 노쇄해져 약해 버리는데

謂之不道; 이러한 것들은 도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오.

不道早已 ; 도가 아닌 것은 일찍 끝나는 것이오.

<物>은 단순히 사물이나 물질이라는 뜻이라기 보다, 나타난 물질적 현상세계 전체를 말합니다.

즉 나타나 보이고 느끼고 아는 온갖 생명체와 만물을 통틀어 말하는 것입니다.

만물은 장성하면 강하고 튼튼해지다가, 곧 노쇠하여 약해집니다.

즉 모든 만물은 생주이멸(生住離滅)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태어나서 튼튼하게 자라다가 노쇠하고 죽는 것은 변화하기 때문에 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태어나서 변하는 것은 도와는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도는 항상 변함없이 일정한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도는 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라지지도 않고, 모양도 속성도 없다고 말하고 있읍니다.

도가 아닌 것은 일찍 끝난다는 것입니다.

도는 사라지지도 않고 따라서 새로 생겨나지도 않는 것이죠.

그러나 도는 전체에 편재해 있고,누구나 지금 여기서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수시로 변하는 것은 실재(實在)하지 않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만이 실재(實在)하는 것입니다.

오직 바탕에 있는 道만이 實在하고, 그 이외의 모든 변하는 것은 비실재(非實在)라고 합니다.

 

이번 55장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소박한 내용으로 도에 대하여 가르쳐 주고 있읍니다.

<변하는 것은 무조건 道가 아니다.> 하는 것이 그 기본 원리이며 ,

<간난아기같은 순수한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 바로 구도자들이 찾는 명확한 실천목표인 것 같읍니다.

 

그렇다고 자기가 간난아기 시절에 어떤 마음상태였나 하고 회상하거나 상상할 필요는 없읍니다.

간난아기의 바탕 마음은 누구도 말로 표현 할 수가 없고, 생각으로 상상할 수도 없읍니다.

왜냐하면 지금 그런 상상을 하고 있는 그 마음이 생기기 이전, 생각과 말이 나오기 이전 바탕상태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조용하게 안정되어 자기자신의 존재감조차 사라질 때에 저절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간난아기의 순수한 무심상태입니다.

감사합니다. -무한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