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0. 30. 20:58ㆍ성인들 가르침/노자도덕경
[한문원문]- 백서본, 곽점본
天下有道 却走馬以糞
천하유도 각주마이분
天下無道 戎馬生於郊
천하무도 융마생어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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罪莫厚乎甚欲
죄막후호심욕
咎莫憯乎欲得
구막참호욕득
禍莫大乎不知足
화막대호부지족
知足之爲足 此恒足矣
지족지위족 차항족의
[한글 해석]
천하에 도가 있으면, 천리마도 거름을 나르며 농사일을 하게 되고,
천하에 도가 없으면, 전투마조차도 들판에서 태어나게 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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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게 욕심을 일으키는 것보다 더 큰 죄악이 없으며
그 욕망을 채우는 것보다 더 비통한 허물이 없고,
만족 할 줄 모르는 것보다 더 큰 재앙은 없는 것이오.
(지금여기서) 넉넉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만족하게 사는 것이며,
이것이 항상 (도의) 충만감 속에서 사는 것이외다.
[해설]
이번 46장은 그 내용이 완전히 다른 두 부분으로 되어 있읍니다.
상반부 문단은 곽점본에는 없고,
백서본 시대 이후에 추가된 문장인 것 같으며,
왕필본 등 기타 여러 판본에는 이 문장이 대부분 다 들어 있읍니다.
하반부 문단은 곽점본에도 있고, 기타 백서본,왕필본등 모든 도덕경에 있지만,
각 판본마다 문장 순서와 몇가지 한문글자가 다르게 표현되어 있읍니다.
백서본에는 상단부 문장과 하단부 문장 사이에 점(.)으로 다른 장이라는 표시가 있읍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주석서나 해석서들은 상단부와 하단부 문장을 구분없이 한장으로 해석하고 있는 책들이 많읍니다.
여기서는 상,하단을 따로 분리된 내용으로 해석했으며,
상단부 문장은 백서본을 택했고, 하단부 문단은 곽점본의 주해문장을 선택했읍니다.
상단부 문장 내용은 세상에 도가 있으면 전쟁이 없는 평화시대가 되고,
세상이 도를 잃어버리면 전쟁이 끊임없이 이어진다고 말하고 있읍니다.
하단부 문장은 욕망을 일으키는 것이 도의 측면에서 가장 큰 죄악이고,
다음으로 그 욕망이 충족되는 것이 도의 측면에서 가장 큰 허물을 가진 것이며,
항상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 욕망에 끌려 다니는 것이 제일 큰 재앙 또는 불행이라고 말하고 있읍니다.
따라서 지금 여기서 만족함을 아는 것이 바로 항상 넉넉하고 풍족하게 사는 길이며, 이것이 항상 충만된 지복감을 가지고 사는 방법이라고 충고하고 있읍니다.
天下有道 却走馬以糞 ;
천하에 도가 있으면,
천리마같은 준마조차 똥거름을 나르며 농사 짓는 일을 하고,
却;물러나다,쉬다,멎다,도리어, 走; 달리다. 糞;똥,거름.
<走馬>란 잘 달리는 경주마를 말하며, 즉 천리마같은 전쟁 전용 고급 준마를 말합니다.
고대의 전쟁터에서 말은 현대로 비유하자면, 전투기나 탱크에 비유될 수 있는 중요한 공격용 운반 수단으로써, 명마인 천리마부대로 적진 깊숙히 순식간에 특공대를 질주시켜서 적을 혼란에 빠뜨리게 할 수 있는 중요한 공격무기겸 신속한 운반장비였다고 할 수 있읍니다.
그러나 세상에 도가 널리 펼쳐져서, 모든 사람들이 도를 지니고, 도로써 나라가 무위자연에 맞추어 운영한다면 그야말로 태평천국의 평화시대이므로, 전쟁터에서 막중한 임무수행을 하던 천리마같은 명마도 밭에 뿌릴 똥거름 수레나 끌고 다닌다는 말입니다.
즉, 무위자연적인 세상이 펼쳐지면 전쟁터에서 맹활약하던 명마도 농사짓는 일이나 도와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사람들이 모두가 道를 숭상하고 道를 닦는다면, 왜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道人은 전체 우주와 하나가 된 의식 그자체입니다.
모든 것이 나자신으로써 전체가 하나라고 여기는 의식은 "나니, 너니"하는 개체 분리의식이 없으므로, 또한 싸우고 갈등하는 상대성을 느끼지 않읍니다.
즉 전체적인 神의 사랑, 하나님의 자비가 그대로 드러나 넘쳐 흐르는 세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도를 중요시하는 세상에서는 사람 서로 간에 상대적인 갈등과 싸움이 일어날리가 없읍니다.
그러므로 전쟁에 사용되는 장비나 말등은 일상 농사짓는 일에나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天下無道 戎馬生於郊; 천하에 도가 사라지면, 전투용 말은 들판에서 태어난다.
戎 ;전투용,於; ~에서. 郊;야외,들판
<戎馬>란 전투용 말 또는 전투용 수레를 끄는 말을 말합니다.
세상사람들이 무위자연의 도를 잃어버리면, 전쟁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따라서 전쟁터에 끌려 온 말은 마구깐에서 새끼를 날틈이 없어서, 들판에서 태어난다는 말입니다
천하가 도를 잃어버리면, 인간 개개인이 전체성을 잃어버리고, 오직 이기적으로 되어, 개인적 욕망들만 추구하게 되므로, 개인들간에 갈등과 반목이 무성하게 되고, 그것이 집단적인 전쟁으로 확대되어 끊임없는 싸움이 일어난다는 것을 말한 것 같읍니다.
끊임없는 싸움 때문에 말조차도 전장터 들판에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위의 두 문장들은 가장 오래된 곽점본에는 없는 문장입니다.
아마도 백서본 이후에 추가된 문장이며, 황노학 전성기 때에 삽입된 문장일 것이라고 추측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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罪莫厚乎甚欲; 지나치게 바라는 욕심보다 더 큰 죄악은 없다.
莫;없다,말다, 厚;투텁다,짙다,크다.乎; ~보다. 甚; 심히,심하다,많다,몹시,대단하게,欲;바라다.
과도한 욕심이 가장 큰 죄라는 것입니다.
바라는 것이 많으면 많을 수록 그만큼 욕망이 커지고, 또한 불만도 커지는 것이고,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다른 사람과 투쟁과 갈등의 기회가 많아지므로, 알게 모르게 결국 남을 해칠 수 있는 기회도 더욱 많아지는 것이죠.
道의 입장에서 보자면 무엇인가 바라는 것, 욕망 그 자체가 가장 큰죄라는 것입니다. 바라는 것이 더 많아지고, 욕망이 강할 수록 에고가 더욱 강해진다는 것입니다. 욕심과 야망이 큰 사람은 그만큼 자기 에고가 강하고, 남과 다르다는 차별성이 강화된 사람입니다.
이런 에고가 강한 사람은 지극히 이기적이고 공격적인 동물과 같은, 남을 희생해서 자기자신의 존재나 자존감을 내세우려는 육식적(肉食的)인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道에서 떨어져 있는 에고의 욕망이 바로 가장 큰 원죄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구약성서의 창세기편에 나오는 내용으로,
아담과 이브가 처음에는 아주 무위자연의 삶으로 에덴동산에서 평화롭게 살다가,
이브가 간교한 뱀(욕망의 상징)의 꼬임에 넘어가서,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인 야혜신이 절대로 따먹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에덴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열매(이원적 분별앎을 상징)를 기여코 이브가 먼저 따먹고 남편인 아담에게도 주어서 둘다 신의 명령을 어겨서 영원한 신의 땅인 에덴동산에서 쫏겨나게 되고, 지상으로 내려와서 그 후대의 대대손손 인간들이 고통스러운 이원화 세계에서 고생고생하며 살게 되었다고 상징하는 신화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신화가 상징하는 것은 인간이 자신을 대상화 시켜서 알려고 하는 욕망 때문에 평온하고 자연스러운 절대일원화상태의 신의 세상(에덴동산)에서 주객 이원화로 나눠진 지상으로 쫏겨나서 육체를 가지고 고생고생하며 살게 되었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읍니다.
이것은 다른 표현으로 말해보자면,
태초에는 분별앎이 없는 단하나의 의식으로 전체(神)와 하나가 되었던 인간이,
자신을 육체라고 동일시하면서 상대적인 이원화 앎을 얻으므로써 전체와 따로 떨어진 개체적 마음이 되어, 원래 전체가 하나인 원천의식을 잃어 버리고 일개 작은 육체가 자기자신이라고 착각하는 개인으로써 항상 무엇인가 모자라서 불만족하여 찾아다니며, 욕망에 사로잡혀서 헤메게 되었다는 것을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읍니다.
말하자면 무엇인가를 알려고 바라는 욕망자체가 인류의 가장 큰 원초적 죄악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백서본에서는 <罪莫大於可欲>이라고 되어 있으며,
번역은<욕심이 일어나게 하는 것보다 더 큰 죄가 없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 경우는 자기 아닌 상대방에게 욕심을 일어나게 유인하는 것이 큰죄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은데,
여기서는 이런 상대적인 행위라기 보다는,
곽점본에서 표현한,<자기 스스로 욕심을 일으키는 마음이 큰죄>라는 말이 더 타당성이 있어 보입니다.
왕필본에는 이에 해당되는 문장은 아예 빠져 있읍니다.
咎莫憯乎欲得; 허물 중에는 욕망을 채우는 것보다 더 비통한 허물이 없으며,
咎;허물,죄,재앙,잘못. 憯;비통하다,슬퍼하다, 得;얻다.
도의 입장에서 보자면,
바라는 것을 얻은 것이야 말로 가장 슬퍼해야 할 허물이라고 말하고 있읍니다.
앞서 욕망을 일으키는 것 자체가 가장 큰 죄악이라고 했는데,
이번에는 그 욕망이 채워지는 것이 가장 슬퍼해야 할 큰 허물이라는 것이죠.
욕망이란 개체적 욕구이고, 물질적이며 감각적인 대상에 자기의 본래존재를 빼앗긴 것과 같으므로,
이러한 이원적인 대상을 추구하여, 그것을 성취하여 만족을 한다면, 그만큼 에고에 집착하는 것이고 에고의 습을 강화하는 것이므로, 결국 도의 절대바탕에서 점점 멀어져 타락하는 것입니다.
즉 원래 자기의 참본성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욕망이 충족되는 것에 대하여 가장 슬퍼해야 할 약점(허물)이라고 말하고 있읍니다.
욕망이 없을 때는 절대 일원화의 바탕에 평화롭게 있다가,
욕망이 생기기 시작하므로써 원죄의 씨앗이 생기게 되고,
이 욕망을 얻자마자 주객 이원화 의식으로 타락하여,
스스로를 주체와 대상으로 나누어서 고통의 삶을 자초한 것이므로
가장 비통하게 슬퍼해야 할 허물이며 원천적인 실수라는 것입니다.
인류에게 있어서 에덴동산의 분별앎의 과일을 따 먹은 시초가 바로 인류의 고통과 비애를 지니게 된 원인이 된 것입니다.
禍莫大乎不知足; 재앙 중에는 넉넉한 줄 모르는 것보다 더 큰 재앙이 없다.
禍;재앙,사고,화,죄악, 足; 만족하게 여기다, 충족하다.
위에서 욕망이 채워지는 것이 가장 크게 슬퍼해야 할 일인데,
이번에는 그렇게 바라는 것이 이루어졌는데도 만족할 줄 모른다면,
더욱 더 큰 재앙을 불러온다는 것입니다.
즉 욕망이 욕망을 낳으면 끝없는 욕망의 굴레에 얽혀서, 자기파멸의 끝이 명백하게 드러나기 전에는 결국은 소용돌이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죠.
일단 어느 시점에서 바라는 바대로 이루어졌으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더 이상 바라지 말아야 하는데, 욕망이라는 그 심리적 욕구작용자체가 바로 끝없는 욕망의 파동형태의 소용돌이로 뭉쳐진 것이기 때문에 일단 욕망에 매달리면 그 속에서 헤어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아예 처음부터 <욕망이라는 이름의 소용돌이 파도>를 타지 말라고 충고했고,
그 다음에 할수없이 바라는대로 이루어졌다 하드라도,
그것에 말려들어가지 말고, 비통해하여 물리쳐야 하며,
더 이상 충족의 쾌락에 파뭍히지 말고,
아무 바램이 없는 지금 현재에서 만족하라는 충고입니다.
<知足>이라는 것은 <항상 지금현재 여기>에서 만족한 채로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더 이상 미래도 바라지 않고,과거에 미련을 두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항상 지금 현재의 현존에 만족하는 것이 만족함을 아는 것입니다.
知足之爲足 此恒足矣 ;
넉넉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만족하는 것이며, 이것이 항상 넉넉하게 사는 것이다.
此;이것, 恒;항상, 矣; 어조사.
만족과 불만족이라는 것은 항상 상대적이며, 가변적인 마음의 움직임 상태인데,
지금 현재에서 넉넉함을 안다는 것은 그 앎자체가 바로 존재와 하나가 된 상태이며, 이것이 항상 충만된 삶을 사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읍니다.
그러나 항상 부족한 듯이 불만족을 한다면, 욕망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더욱 더 강렬하고 큰 욕망이 눈덩이처럼 굴러 갈수록 커지므로, 동시에 불만족도 점점 커져서 욕망의 노예로 전락하는 것이죠.
따라서 자기 현존(現存)에 편안하게 안정되지 못하고, 항상 외부 대상을 쫏아 다니면서 막연한 무엇인가를 찾아 다니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이 항상 허기진 사람처럼 지쳐있다가 종래는 인생이란 허무한 것이라고 혼자 중얼거리며 자기 생을 무의미하게 마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지금 현재 여기서> 넉넉함을 안다면, 더 이상 욕심이 발동을 하지 않는 것이고,
바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므로 평온한 마음을 유지 할 수가 있고,
그런 평온한 마음이 안정되면, 자기 원래의 존재가 무엇인지를 저절로 알게 되므로, 항상 전체적인 충만감을 지니며 자기 삶을 평안하게 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노자도덕경 중에서 이 46장은 주제나 내용면에서 특이하게 사람들에게 주의를 끌수있는 내용이 없고, 지극히 평범하고 누구나 아는 상식적인 쉬운 내용입니다. 그래서 번역주석을 하는 사람들도 대부분 이 46장은 간단하게 해석하고 그냥 슬며시 넘어 갑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개가 좀 이해하게 어려운 난해한 문장이야지 신비스럽게 여기고,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여겨서, 어려운 문장들은 알려고 관심을 쓰는데, 지극히 평범한 내용이나 누구나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일반상식적인 쉬운 말씀은 기존에 자기가 다 알고 있는 것이라고 여겨서 가볍게 흘려서 넘어갑니다.
그러나 위의 46장 하단부 주제인 <만족함을 안다는 것이 충만감 속에 사는 것이다>라는 문장은 도인의 가장 기본 자세입니다.
또한 도수행자들이 가장 핵심적으로 간직해야 할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지금 현존상태에 대하여 만족한다>는 것은 그 자세자체가 깨달음 상태입니다. 수행 중에서 가장 높은 수행법이지만, 수행이 아닌 수행법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러한 중요한 핵심 가르침에는 별 관심들이 없는 것 같읍니다.
그래서 이 구절이 중요한 내용이라고 한번 더 되짚어서 지적해 보았읍니다.
이것으로 마치겠읍니다. 감사합니다. -무한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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