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7. 11. 11:02ㆍ성인들 가르침/시다르메쉬와르 마하리지
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의 유일한 스승인
스리 시다라메쉬와르 마하리지의 가르침(7-2)
진리(부라만)는 개념과 생각을 넘어서 있다.
수행자가 명상을 시작하면, 세가지 요소(보는 자, 보여진 대상, 보는 작용)가 형성된다.
모든 대상과 느낌들은 우리에게 이질적인 것들이지만,
우리자신이 바로 진리이기 때문에 자신이 스스로에 대하여 명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일 명상이 포기되면 큰 의심이 우리를 압도한다.
그러나 만일 수행자가,
영속적인 것과 일시적인 것이 무엇인지,
참자아란 것이 무엇이며, 참자아가 아닌 것(非自我)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깊히있게 숙고하고, 생각한다면
진리는 저절로 밝혀지게 되어있다.
우리자신은 이세상에 존재하고 있는그 "어떤 것"도 아니다.
우리는 또한 육체도 아니다.
베다,경전들, 달, 태양--- 이것들은 우리자신이 아니다.
우리는 진지하게 내면으로부터 우리자신이 누구인가를 발견해야 한다.
"그대가 그것이다"(You are That)
그러므로 그대는 "그대"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된다.
"나"라는 말은 내면으로 부터 나오는데,
그래서 그대는 오직 "내면"속에 "어떤 것"으로 있어야만 한다.
내면의 아무것도 없는 곳(無)을 일러 "원인체"(Causal Body)라고 부르는데,
이것을 또한 무지(無知)라고 부르기도 한다.
수행자는 거친 육체에서보다는 미세체(微細體)에서 더 행복감을 느낀다.
물론 원인체 속에도 지복감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만일 모든 것으로 부터 벗어난다면,
그때는 모든 것에서 "벗어난 자"만이 홀로 남아있게 된다.
홀로 "떨어져 있는 자"가 바로 주시자이다.
그런데 이것은 "知覺性(아는 작용)"만 남아 있다는 의미가 되는데,
곧, 지각력의 본질만이 남아 있는 것과도 같다.
이것이 "존재,앎,지복"(Sat,Chit,Ananda)라는 것이다.
깊은 잠속에서 보고 경험하는 자는 누구였는가?
잠 속에서는 아무것도 없었는가?
대답은 "나"다.
그러므로 그대는 (깊은 잠속에서) "아무것도 없음"을 경험을 한 것이다.
존재-앎-지복은 네번째 몸이다.
이것이 신(神)이다.
"아무것도 없음(無)"은 마음을 통하지 않고 알려지는 것이다.
"내가 있다"에 홀로 떨어져만 있을 수 있다면,
"나"라고 말하는 마음의 변상(變相)도 역시 평안 속에서 아무런 움직임도 없다.
그 마음의 변상이 어떻게 있는지는 찾을 필요조차 없다.
만일 수행자가 원인체를 잊어 버리게 되면,
그때는 오직 "그것"(부라만)만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을 잊어 버린다는 것은 불가능한데,
그래서 무념(無念)으로 수행하게 하는 것이다.
수행자는 어떤 개념도 개입되지 않은 깊은 명상을 해야 할 것이다.
마음이 개입해야 될 것이 아무것도 없고, 알려지는 것도 아무것도 없어야 한다.
왜냐하면 마음이 개입하면 두가지가 나타나는데,
하나는 '마음'이고, 또하나는 마음이 만든 '어떤 것'이다.
이렇게 해서 주,객 이원화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을 더 깊게 알고 싶어서,
좀 더 명확하게 비젼을 개선해 보고자 어떻한 다른 수단이나 개념을 추가로 덧붙여서 수행할 필요는 없다.
만일 (진아와 비진아에 대한)분별력 가지고 있지 않다면,
수행자가 알려고 억지 노력을 하기 때문에 이원화가 뒤따를 수밖에 없다.
존재의 느낌이란 "내가 하나로 남아있다"라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생각조차도 역시 떨어져 나가야 한다.
비진아와 같은 것이란 아무것도 없지만,
이것을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비진아라는 말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일 뿐이다.
만일 내가 죽어 없어지면, 하나님도 알려질 수가 없는 것이다.
절대(파라부라만)은 비이원적인 것이며,
우리들 자신이 바로 "그것 자체이다"-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그것"이 되어 보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어떤 다른 의미나 매개물이 필요하지 않는 이유다.
만일 우리가 어떤 다른 대상적인 것을 체험해야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대상으로써)볼수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 자체"이기 때문에,
그냥 있는 그대로의 "오직 그것"일 뿐이다.
만일 우리가 모든 남아있는 의식들을 벗어난다면,
우리는 우리자신으로써 있는 그대로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들 본성을 잊어버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을 기억해 낼 필요 조차도 없다.
다만 만일 잊어 버리는 것이라면, 그것을 상기해야만 할 것이다.
이렇게 우리들의 본성은 기억과 망각을 초월해 있는 것이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마치 밤에 잠자는 것과 같다.
어떤 것을 기억하고 난 후에 다시 그기억이 되 살아나는 때-
그것이 바로 죽음에 대한 견해이다.
이 베단타(우파니샤드), 열네개의 보석은 육체와 知慧('내가있다'앎)를 통해서
육체라는 멍에를 뒤집어 쓰고, 의식이라는 우유를 휘저어서 걸러낸 후에
추출해 낸 것인데,- 이것이 바로 (신의) 감로(甘露,넥타)라는 것이다.
파라부라만(절대진아)은 자연적인 상태이며, 저절로 있는 자산이고,
어떤 생각과 행위도 없이 태고적부터 기본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자연 그대로 있는 것이다.
이것을 "스스로 빛나는 것(自明)"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 자연적인 상태에서는 고통도 없고 행복감도 없다.
행복감이란 고통의 뒤에 따라 붙는 것이고, 두개가 서로 앞과 뒤를 따라 다닌다.
처음에 고통이 있으며, 그 고통 속에서 약간의 행복감도 포함되어 있다.
"한 생각이 나오자 마자 주객 이원화가 일어난다"
우리들 자신이 진리이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것을 생각하자 마자 둘로 나누어진다.
그대가 간난아이 시절에 딸랑이를 가지고 놀던 시절과 지금 그대가 지니고 있는 지식이 무엇이든간에, 현재 그대가 지니고 있는 지각성은 간난아기 시절의 그것과 동일한 것이다.
그대가 어떻게 해서 그것이 그렇게 있는지는 생각할 수가 없다.
"모든 잊어버린 것들"이란 기억된 것일 뿐이다.
또한 그대가 만일 "나는 부라만이다"라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은 정상적인 것이다.
이것을 '체험함이 없는 체험"이라는 것이다.
잠이 들어 있는 동안에 우리들은 우리자신을 체험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런 체험을 일부러 하려고 애쓴다면,
노력을 가지고는 그런 체험이 얻어 질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떨어지지 않을 것이고,
설령 떨어져 나가는 것 처럼 느낄지라도, 오직 그대는 그것일 뿐이다.
그런데 누가 누구에게서 떨어져 나간다는 말인가?
수행자가 보려고 한다면, 그것은 더 뒤로 물러나서, 더욱 멀리 떨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잠을 알기 위하여 잠을 자야한다.
이렇게 "어떤 노력도 없음"이 참나를 아는 길인 것이다.
먹고 마시며 이야기하는 식사같은 것 등,
모든 행위들은 참나를 알려고 하는 길에서는 장애물이 된다.
그것들(행위들)은 방편이 될 수가 없다.
만일 그대가 "나는 '내가 있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라고 말한다면,
곧 "내가 있다"라는 그 노력으로 마음에 변상을 만든다,라는 의미가 된다.
이것은 이치에 안맞는 일인 것이다.
만일 마음에 변상이 일어난다면, 참나는 스스로 사라지고 만다.
그대는 "내가 있다"를 알고 난 후에는 "나라는 것"으로 부터 떠나야 한다.
지금까지 그대는 "지각력(앎)의 자극"을 "나"라고 말해 와었다.
그러나 지금 그대는 그것을 벗어났다.
"나도 없고, 너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라는 방법으로 수행해온 사람은 참으로 행운을 받은 사람이다.
이것을 위해 해야 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성찰하고,청문하고,명상하면, 참나의 본성이 드러난다.
왜냐하면 이 참나의 본성은 항상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마야(환상)의 망상들이 저절로 일어나게 된다.
"내가 부라만이다"라는 것도 또한 하나의 생각일 뿐이다.
우리들은 이런 의미들을 생각하거나 상상하는 수행자가 되지 않아야 한다.
또한 상상되는 그대상도 되지 않아야 한다.
'아는 자'도 최종 절대 진아 속으로 합일하여 흡수되어야 한다.
이것이 부라만에 대한 앎(眞知)의 기본이다.
그대가 무대 자체가 되면,
(무대안의)연극장면 또는 무대셋트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대가 해야 할 일은 그대의 본성으로부터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대가 하는 수행, 그것이 성찰이든,숙고든 간에,
무엇이든지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
일단은 "그대 자신이 스스로의 목표자체"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 그대가 하고 싶은 것은 그대 마음대로 해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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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회를 마지막으로 싯다라메쉬와르 마하리지의 가르침 말씀을 마치겠읍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영문원본자료를 모두 번역해 보았읍니다.
좀 어색한 번역이 많은데, 영문으로 번역한 문장을 가능하면 손상하지 않고
글자 그대로 한글로 번역을 하려다 보니, 여러군데에서 어색한 번역이 된 것 같읍니다.
여러 가르침들을 자세히 음미해 보면 아주 핵심을 찌르는 가르침들이 많읍니다.
특히 이번 마지막회를 본 분들은 그동안에 라마나님이나 니사르가다타 대화록에서 애매하게 이해했던 몇가지 핵심 문제를 나름대로 파악하는데, 좋은 도움이 될 것이라 여겨집니다. 감사합니다.- 무한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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