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7. 11. 11:00ㆍ성인들 가르침/시다르메쉬와르 마하리지
스리 시다라메쉬와르 마하리지의 가르침(7-1)
자유와 속박이라는 생각은 무지(無知)상태 안에 있는 동안에만 나타난다.
본성은 그자체가 스스로 빛을 발한다.
이것은 속박되어 있는 것도, 그렇다고 자유로운 것도 아니다.
속박과 자유라는 개념은,
무지(無知) 속에 휩싸인 한사람이 자기 자신을 육체로 동일시하면서,
자기자신이 "행위자" 로써 스스로 모든 행동을 하고 있다고 여기는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것이다.
깨달은이는 오직 아무런 행위없는 무행위(無行爲)만 남아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전에 자나카 왕은 깨닫고 난 이후 왕국을 통치할 때에
그가 모든 것을 잃어 버려겠는가?
대성인인 수카와 다른 사람들도 깨달음을 얻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은 방대한 량의 신화를 저술했겠는가?
우리들은 "해탈"이나 "자유로워짐"에 대한 의미를 마치 "무행위"가 된 것이라고 상상한다.
만일 부라만이 된 것이 죽은 통나무처럼 "무행위"만 남아있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렇다면 수카와 바메데바는 죽은 시체와 같아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수카는 파릭시타 왕에게 위대한 바가바드를 이야기해 줄수가 있어겠는가?
그것은 그가 이전의 여러 저작물들을 섭렵하고,
옛스승들이 가르쳐준 설법을 명확하게 전달해 줄 필요가 있어서 그랬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서, 만일 해탈한 이가 무행위로만 있었다고 한다면,
그런 태고적 스승들의 가르침들이 어떻게 오늘날까지 전승되어 내려 왔을 것인가?
스승이 가르침을 준다고 해서, 그가 깨닫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그가 최종 절대상태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어떻게 단정할 수가 있는가?
무행위(無行爲)가 된다는 것은 깨달은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최종 실재에 대한 깨달음은 스승의 가르침을 통해서야 얻어진다.
만일 깨달은 사람이 무행위로만 있게 된다면,
그러면 누가 그 깨달음에 대한 지식을 가르쳐 줄것인가?
깨달은 사람들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들을 해왔다.
통상 해탈이라는 것에는 3가지 이름의 구분이 있다.
(1)현생해탈(Jeevan Mukta)
(2)탈육신해탈(Vedeha Mukta)
(3)절대해탈(Nitya Mukta)
찌반묵타(현생해탈)에 이른 사람들은 자기가 있다는 존재 자체가 전체적 의식이 된 사람들이며,
깨닫고 나서도 평범한 일상활동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비데아 묵타(탈육신해탈)은 자기 존재가 전체의식이라는 것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육체 동일시에서 벗어나 부라만과 하나가 되어, 그 부라만으로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그들은 먹고 마시는 등의 일상활동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이들 두가지 해탈에서 완전히 별도로 떨어져 있는 것이 니트야 묵타(절대 해탈)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갑자기 진아체험을 얻었다면, 그사람은 아주 고요해진다.
무행위(無行爲) 또는 비의식(非意識)이 된다는 것은 육체와 관련되어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다.
이러한 것들이 부라만과 관련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경우에는 의식이 꿈틀거리면 무행위나 비의식상태에서 또 다시 육체의식으로 되돌아 온다.
구도자는 "이것이 진아다- 내가 부라만이다"라는 것을 이해하고는, 거기에 그대로 머무른다.
아트만은 속박과 자유를 초월해 있다.
만일 한구도자가 육체 의식안에서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면, 그사람은 아직 자유롭게 된 것이 아니다.
부라만신이나 다른 신이라 할지라도, 만일 그들이 육체의식이 남아 있다면, 자유를 얻은 것이 아닐 것이다.
"그는 잠깐동안은 자유롭게 되고, 다음순간에는 구속되어 있다"라고 한다면,
그는 아직도 부라만이라는 것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속박과 자유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들은 아직도 단순히 환상적 성질(프라크리티)에 대해서 말하고 있을 뿐이다.
진아의 본질 또는 진리는 그자체가 스스로 빛(自明)을 발한다.
이 경우에 속박과 자유라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자기가 속박되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이 현시세계라고 이르는 바다의 한마리 작은 물고기와 같고,
자기가 자유인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이 현시세계라는 바다의 한마리 악어와 같다.
자신이 자유롭다 라는 고정관념의 단단한 돌속에 자기를 묶어 논 사람은 의식수준에서 가장 낮은 레벨인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온갖 죄악을 저지르며 살아 왔는데, 그러나 이제 나는 자유롭게 되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이 윤회의 바다 맨 밑바닥으로 내려 앉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아주 위험에 처해 있는 상황이다.
실재를 아는 사람들-명상가는 그런 사람들을, 스스로 자신을 속이는 사람들이라고 여긴다.
죄악을 저지르고 있는 시간에도 그사람은 진아였으나 그자신은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만일 그가 자신이 진아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면, 엄청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그는 이원화 상태의 현존으로서,자기가 항상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 아직도 탐구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그사람이 자유롭다는 그것은 "나"와 "너"라는 상대적 개념에서 나온 자유인 것이다.
Ruhu와 Ketu라는 말에서 hu는 "나" 그리고 tu는 '너"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만일 이개념이 변하지 않고 남아있다면, 아직 그는 미혹속에 그대로 있는 것이다.
신의 감로를 절반만 마신 사람은 반쪽짜리 명상가 아니면 일부분의 쪼까리만 깨달은 것이다.
자기 본성을 안다는 것은 그자신이 육체를 초월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 이외의 나머지 사람들은 육체와 접촉을 유지한다.
속박 속에 있는 것은 육체다.
만일 자기가 육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속박이라는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진리"에 대한 가장 순수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속박과 자유"라는 말이 전적으로 "웃기는 �크"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환상(프라크리티)이 물러나거나, 명칭과 모양이 사라지면,
모든 말들은 침묵이 되어 버린다.
그런데 어떻게 "자유"따위의 어떤 것들이 있을 수가 있겠는가?
"자유롭다"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단순히 사람들이 말하는 한 방편일 뿐이다.
속박이란 그사람자신을 육체라고 여기는 것이다.
깨달은 명상가는 "나"라는 느낌으로 부터 자유롭다.
"속박과 자유"란 사람들을 기만하는 것일 뿐이다.
"속박"과 "자유"란 단순히 개념적인 표현일 뿐이다.
개념은 진리 일 수 없다.
환상(마야)을 이해한 사람은 모든 공포로부터 벗어났다.
"나는 부라만이 된 후에 요가를 닦을 것이다-그렇게 하면 나는 무엇인가를 얻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신기루 속에서 물을 찾고 있는 사람과 비슷하다.
그런 사람들은 다만 신기루 속에서 이리저리 헤메고 다니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진리를 신기루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신기루 속에 붙잡혀 있는 것이다.
깨어난 사람에게는 꿈이 사라진다.
이처럼 명상가 역시 환상이라는 형태의 신기루가 사라지는 것을 발견한다.
사람이 자기 본성에 관심을 주는 한에는, 육체는 비진리라고 여긴다.
무념(無念) 속에서 명상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부라만에 관심을 집중하는 한에는 무념이 가능하다.
그러나 사람은 어떤 것을 보거나 생각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만일 수행자가 진아에 대하여 볼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다면,
그사람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만일 수행자가 한가지에만 명상에 몰두 한다면,
그 한가지는 저절로 알려지게 되어있다.
자아의 본성까지도, 만일 그대가 마음으로 내 버리려고 한다면,
그것 또한 마음에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지각성(眞知)"이라는 본성도 내버리기가 불가능하다.
그것 또한 감각을 통해서는 이해할 수도 없다.
그런데 그대가 무엇을 행 할 수 있단 말인가?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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