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행위자인가? 아니면 행위자를 아는 자인가?

2008. 7. 9. 21:57성인들 가르침/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

1. 나는 지금 콤퓨터 앞에 앉아 있다.

2. 나는 지금 콤퓨터 앞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있다.

3. 나는 지금 콤퓨터 앞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내마음으로 보고) 있다.

 

4. 나는 (무엇인가를 행위하고) 있다. - 행위자

5. 나는 (무엇인가를 행위하고) 있음을 (알고)있다. - 행위자 + 아는자

6. 나는 (무엇인가를행위하고) 있음을 (의식하고)있다. -행위자 + 보는자

 

위의 1번 과 4번 문단은 내가 오직 행위자라고 만 말하는 상태이다.

사람들이 보통생활에서 평범하게 행하고 있는 생각과 말이다.

나는 걷는다. 나는 무엇인가 하고 있다. 나는 무엇을 본다. 느낀다.생각한다.즐겁다.슬프다.등 등---

 

그러나 사실은, 나는 무엇인가 행위하고,느끼고,생각하는, 단순한 행위만 하는 행위자가 아니라,

2.3-5.6. 번 문단의 표현처럼 내가 행위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고,마음속으로 보고(관찰)하고 있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행위자인 자신을 (알고 있다)또는 (의식하고 있다)는 무의식 중에 안다는 사실을 느끼고는 있지만, 의도적으로 표현은 안한다.

자신이 의식을 하던(알아차리던), 의식을 못하던 간에 당연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의 문장들에서 구분지어 보여준 것 처럼, 내가 살아 있다는 의식이 있는 한에는 우리들의 모든 내외면생활의 일상사 활동은, 아침 잠에서 깨어나서 부터, 이 행위자와 행위자를 아는자로서

진행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자신은 행위자와 행위자를 관찰하는 의식이 있음으로 살아 있다고 할 수가 있다.

그러면 행위자와 아는자는 똑 같은 의식인가? 물론 같은 의식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행위자는 보이는(알려지는) 대상이라고 할 수 있고, 아는 자는 주시자, 보는자, 관찰자라고 할 수가 있겠다.

행위자는 의식을 비추는 빛으로 비유한다면 빛의 마지막 말단이며, 빛에 의하여 보여지는 반사된 빛의 투영물인 모양,색갈,명암의 나타난 현시라고 표현 할 수 있으며, 주시자, 아는자는 빛으로 비유하면 어떤 물체에 닿아 반사되기 직전의 물체에 투사되는 빛이라고 비유 될 수가 있다.

 

다시 말해서, 행위자는 반사된(육체 감각 조건에 의해서 ) 의식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고,

그뒤의 행위를 아는자, 보는자는 내면 깊숙한 의식의 원천으로 부터 투사된 의식이라고 말 할 수가 있다.

 물론 위의 말단 행위자인 개인의식과 그주시자인 우주자아의식도 개체성에 의해 변조된 의식이지만, 개체의식 보다는 순수한 의식이어서 개인육체의식인 행위자를 주시하고 있다.

이 자아우주의식이 바로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인데, 존재의식의 순수한 바탕상태를 우리는 아침 깨어나자 마자, 잠이 덜깨서, 의식만 들고,아무런 주변환경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순간, 잠간동안의 순수존재의식상태를 경험 할 수가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상태를 알아차리지는 못한다.

 

이 내가 존재한다는 순수존재의식이 바로 우리들의 개인 정신활동의 바탕이며, 아는자, 주시자인 것이다.

개인의 모든 행동,말,사고,마음은 이 내가 있다는 순수존재의식을 바탕으로 해서 생겨나고, 유지하고, 사라지면서, 계속 소용돌이 치며 흐르는 것을 주시하는 존재의식때문에  우리는 모든 활동과 생각을 알고 있는 것이다.

물론 순수존재의식 또는 우주자아의식은 그 이전에 순수우주의식 및 절대의식(의식의 원천)에서 나오지만, 지금 개인의식 차원에서의 주시자는 존재의식이므로 이에 대하여 만 언급하고 있다.

궁극적인 견지에서는 순수우주의식과 절대의식도 다루어 보아야 겠지만 차후에 기회있는대로 언급하기로 하고 이글에서는 개인의식차원의 주시자만을 언급하고 있다.

개인의식 차원에서는 우선 개인의식의 아는자, 주시자를 잘 이해하여야 될 것 같다.

 

이 아는 자 또는 주시자가 개인의 입장에서는 "나"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위자를 "나"라고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가 행위자라고만 생각하면, 그것은 자신을 스스로 반쪽짜리로 격하시키는 일이다.

 

따라서 인간세상에서 자기자신이 행위자라는 잘못된 오해때문에,

개인의 자만감과 의도적인 행위에 의해서 개인 스스로가 불만족과 원인을 알수없는 불안감, 소외감과 고독감, 비애,증오,갈등,폭력등 비극속에서 고통스러운 인생살이를 하는 것이다.

 

자신이 행위의 발생자로서 의지를 가진 행위자라는 생각은 자기 자신을 육체와 동일시하는 관점에서 생겨난 잘못된 관념이다.

육체와의 동일시로 부터 자기자신이 이탈되었을 때, 자기자신이 육체와 마음이 아니라는 확신이 완전히 들때, 이 자기가 직접적인 행위를 만든다는 행위자의식이 자동으로 사라지게 된다.

그러면 남는 것은 우주적 자아의식, 또는 순수존재의식으로서 마음이 고요하게 되면서, 그고요를 계속 유지하고 있으면, 결국은 최종적 비이원화 상태인 절대의식 속에 안주할 수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행위자라는 의식은 어떻게 해서 생겨나서 우리 개인의식속에 자리잡고 있었을까?

이 우주삼라만상은 전체가 하나의 의식이다. 그 한덩리 의식안에 수많은 개체와 모양과 색갈과,이름,성질이 전부 다른 것들이 수억종류가 있겠지만 전부가 인간육체의 감각의식에 비쳐진 단순한 영상들에 지나지 않으며,그것들은 하나의 의식내에서 항상 생주이멸하므로 계속 유지될 수가 없기 대문에, 덧없는 것들이고, 인간의 개인육체도 이와 만찬가지로 전체에서 별도로 떨어진 개인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따라서 전체의 움직임 속에서 개인의 행위라는 것은 전체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개인의 의지적 행위는 그 개인의 육체와의 동일성에 의한 착각일 뿐인 것이다.

전체적인 움직임이라는 것은 자연적인 우주운행적인 것으로서,인간의 개인행위도 단순히 전체적 자연스러운 흐름에 일부지만, 개인은 그것을 스스로 능동적으로,의지를 가지고 하고 있다고 오해하고 있었을 뿐인 것이다, 개인의 그런 착각이나 오해라는 것은 전체가 일체라는, 일원적인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무한한 존재를 망각한데서 오는 무지때문일 것이다.

육체를 가지고 태어난 개인이 자기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나?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낳아준 부모님도 모르게, 자연적으로 탄생이 주어지고, 자연적으로 죽음이 돌아오게 된다.

자신이 태어나기 전과, 자신이 죽고나서, 무엇이 있을까?. 거기엔 오직 전체 무위자연만 있을 뿐이다.

여러성인들과 화두선의 조사들이 비슷하게 한말 중에는,

네가 태어나기 백년전에, 혹은 네가 죽은 후에, 너자신은 무엇인가? 혹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나?

있는것은 있을 뿐이다. 그리고 모든 것은 자연적으로,저절로 생겨나고, 진행되다가, 없었질 뿐이다.

개인이라는 것은 없고,있는 것은 생각과 개념일 뿐, 모든 일은 저절로 진행될 뿐이다.

거기에 의지를 부릴 수 있는 행위자는 아무도 없다. 사람들이 행위자 없이 저절로 진행되니깐, 억지로라도 그 행위자를 고안해 낸 것이 '신" 또는 "하나님"이라는 것이지만, 그것도 인간의 의식에 맞추어서, 이름과 개념만 있을 뿐, 지역환경과 인종에 따라서 "맞춤 신" "만든 신"일 뿐이 아닌가?

자- 그래서 마음 속에서 자신이 행위자라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자신은 행위하는 자를 아는 자인 것이다.

 

이 알고 있다, 의식하고 있다는 주시자를 세밀하게 이해하고,탐구하는 것이야 말로, 바로 진아탐구, 참나를 찾기 위한 정신 수행의 첫걸음을 올바른 방향으로 시작할 수 있는 필수 앎이 될 것이다.

 

그런 후에 주시자와 보여지는 대상을 분별하는 명지(지혜)능력을 단련해서, 주시 수행이나 나는 누구인가 묻는 자기탐구 수행, 존재자각명상, "내가 있음" 자연지 명상,불교수행 등을 시작해야 될 것이다.

 

자기육체가 자신이 아닌 것은 누구나 알고 있으면서도, 육체의식으로 부터 떠나기는 싫어한다.

알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곳에서 벗어날려고 하지않는다.

자신은 육체도 아니고,마음도 아니다. 왜? 자신은 육체를 주시하고,마음도 주시 할 수 있으니깐-

 

그런 말을 하고나서, 다시 육채의식으로 도로 돌아온다. 그러나 주시자쪽으로 ,즉 내면속으로 의식의 주의를 끈질기게 촛점을 맞추고 있으면,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의식은 항상 자연적으로 주시를 하고 있으니깐. 그 자연스러움에 자신은 물결타고 둥실 떠가는 돗단배처럼 아주 단순하고, 쉽게 의식을 타고만 있으면 된다.

다만 완전한 이해,전체적인 통각과 끈질긴 관심과 진리에 대한 믿음, 목적을 향한 열정이 필요한 것 같다.

누구나 자신은 행위자가 아니고, 그 행위를 지켜보는 주시자라는 사실을 잘 이해 해야 될 것이다.

 

이것이 참나를 찾기 위한, 절대의식으로 들어가기 위한 기초,기본필수 지혜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리고, 죽음을 넘어선, 영원한 행복으로 가기 위한 여로의 입구쪽을 가르쳐 주는 이정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