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2. 10. 21:50ㆍ성인들 가르침/기타 비이원론 가르침
육체의식의 종말
가짜가 진짜가 되었고, 진짜가 가짜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환상이 만들어낸 착각입니다.
많은 설명들이 진리를 이해시키기 위해서 제시되었지만,
그럴지라도 거짓(허구)의 영향력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거짓은 설명이 없는 까닭으로 마음 속에 확고하게 고정됩니다.
진리는 항상 현존하는 데도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베다,샤스트라, 그리고 푸라나는 모두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해 명확한 설명을 제공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의 참된 성품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진리는 가려진 채, 갑자기 거짓(허구)인 것 같았고,
존재하지도 않는 거짓이 참(진리)인 것 같았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것이 바로 환(幻)의 연극입니다.
구도자가 성인과의 친교 명상모임에 참여해서 그들과 함께 수행하고,
그들의 설명 내용에 대하여 깊히 명상함으로써 한 순간에 이것을 깨칠수 있습니다.
이전의 글에서 스스로 자신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한 바가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하면 수행자는 절대 진리를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성취하게 되면,
구도자의 마음은 의식의 생명기운((Chaitanya)과 하나로 합일되어,
있는 그대로의 실재(實在) 그 자체로서 자기의 진아성품을 깨치게 됩니다.
이 깨달음 속에서,육신은 운명의 손에 내맡겨지고,
모든 의심은 이해를 통해 해소됩니다.
육체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순간,
그것이 죽거나 살아있는 채로 남아 있거나 상관하지 않게 됩니다.
깨달은 진인(Jnani)의 몸은 형상도 없고 성질도 없으므로,
그 자신에게는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집니다.
그래서 현자의 몸이 죽은 곳이면 어디든지 신성한 성지(聖地)가 됩니다.
순례장소가 신성한 곳이 되고, 사람들의 염원이 성취되는 것은 현자의 존재 때문입니다.
만약 현자가 과거에 그곳에 가지 않았다면,
그 장소들은 순례자들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을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해방되기 위해서는 성스러운 강가 강뚝에서 육체가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현자는 항상 해방이 되어 있습니다.
태양이 남쪽방향으로 이동하는 기간 동안 죽으면 불운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일종의 망상(妄想)이며,
보통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의심입니다.
현자는 그런 망상이 전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보통 사람들은 낮 동안에도 집안에 등불을 켜놓고,
해가 북쪽방향으로 이동하는 음력 초14일 동안에 죽는 것이 상서로운 일이라고 하거나,
해방되기 위해서는 생의 맨 마지막에 신(神)을 기억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요기(수행자)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살아있는 동안에 해방되고, 덕(德)의 화신됩니다.
죄와 공덕은 모두 그에게는 포기되어져 적용되지가 않습니다.
무지한 사람은 육체의 마지막이 좋은 방향으로 일어났다던가,
그리고 어떠한 부정적인 사건없이 육체가 죽었다면,
그 사람은 축복을 받았다고 말들 합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야 신을 만나게 된다는 황당한 생각을 가지므로써,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낭비하는데 몰두합니다.
그들은 삶을 사는 동안 가치있게 보내지 않고, 그저 쓸데없이 시간만 낭비해 버립니다.
곡식 씨앗을 심지 않는다면, 어떻게 무엇인가가 자라날 수가 있겠습니까?
신에게 헌신적인 공경을 드리면 순수해집니다.
그것은 마치 자기 돈을 부지런히 저축해서 부자가 되는 실용주의적인 사람과 비슷합니다.
주지 않고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으며,
씨를 뿌리지 않고는 수확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충고는 모든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자신의 업무와 서비스를 제대로 완수하지 않고
고용주에게 보상을 요구하는 종업원은 임금을 제대로 받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헌신하지 않는사람은 결국은 자신의 최상의 공덕(功德)에는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만약 살아가는 동안에 신에 대한 헌신이 없다면 어떻게 죽음의 순간에 해방될 수 있겠습니까?
있는 그대로 있으십시오.
사람이 행하는 것(業)은 자기에게 되돌아 옵니다.(報)
생전에 신에 대한 헌신이 없다면, 죽는 순간에도 해방되지 못합니다.
복받은 죽음이거나 즐거운 죽음을 맞이한다 하더라도 살아있는 동안에 헌신하지 않으면 몰락을 당합니다.
깨달은 현자는 육체를 적절하게 활용하면서 삶의 목적을 달성합니다.
그들은 진실로 축복을 받습니다.
깨달은 진인(Jnani)은 해방된 존재이며,
육체가 숲속에 방치되거나 공동묘지에 뭍혀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현자의 시체가 방치된 채 썩거나 혹은 고양이와 개들이 먹어 치우면,
둔한 지성의 사람들은 나쁜 일이라고 간주합니다.
현자에게 육신의 마지막이 멋지게 오지 않으면 신자들은 슬퍼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진리를 알지 못하는 무지함 때문입니다.
전혀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죽을 수 있겠습니까?
분별력을 이용하여 생사를 삼켜버린 그는 생사윤회(生死輪廻)를 끝내 버렸습니다.
자기의 진아 성품을 깨달은 힘으로 전체 환상이 사라졌습니다
그의 깨달음의 무한한 능력은 브라흐마와 다른 신들조차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는 죽음 그 자체를 죽인 사람이기 때문에, 살아있는 동안에도 죽어 있습니다.
분별력에 의해서 그는 생(生)과 사(死)라는 개념조차도 붙잡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사람들 사이에서 보이는 것 같지만, 보이는 것에서 초월해 있습니다.
그는 평범한 사람들과 같이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전혀 다릅니다.
그는 오점없이 순수해서 눈에 보이는 대상으로서는 전혀 잡히지 않습니다.
깨달은 진인(Jnani)이 실재(實在)에 대한 찬양을 위해 에배하고 노래할 때,
함께 참여한 다른 사람들도 마음이 고양됩니다.
이것이 성자들과 함께 행하는, 헌신과 예배에 관련되어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사드구루의 지도를 받고 있는 열망자는 분별력을 지속적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분별과 건전한 추론을 통해서 설법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열망자에게 주어지는 공식적인 약속입니다.
비이원성에 대한 순수한 설명을 받으면 현자와 같은 성취감에 도달하게 됩니다.
성인에게 순복한 사람은 그 자신이 성인이 되어,
디른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도움으로 이끌어 줍니다.
성인들의 위대함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수행자는 성자들의 친견명상 모임에 함께 참여함으로써 지혜를 얻습니다.
성인과의 친교명상모임에 참여하여 친교를 지켜나가는 것 외에 더 뛰어난 영적인 수행실천방편은 없습니다.
사드구루에 대한 헌신을 바탕으로,
설법 내용에 대하여 끈질기게 성찰하고 명상을 실천하고
자기의 일상 활동 속에서 분명하게 증험함으로써,
반드시 브라흐만을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드구루에 대한 숭배 자체가 영성의 발상지(진아 깨달음에 대한 발원)입니다.
사드구루를 숭배할 때에, 해탈 열망자는 즉시 만족하게 됩니다.
개인의 몸이 비실재(非實在)라는 것을 이해하고,
헌신적인 숭배의 감정을 가지고 사드구루의 마음을 즐겁게 하므로서,
이번 생애에서 진아 깨달음을 성취되도록 해야 합니다.
사드구루는 순복한 제자의 걱정을 떠맡습니다.
그는 아이의 성장을 돌보고, 보호하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어머니와 같습니다.
사두구루를 흠모하는 사람은 참으로 복받은 사람입니다.
사드구루의 가르침으로 얻을 수 있는 것 보다 더 큰 만족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시점에서 말 장난을 이제 그만 두겠습니다.
나는 청자(聽者)들에게 사드구루의 숭배에 대해 분명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해탈을 줄 수 있는 영적인 실천 가운데 사드구루에게 헌신하는 것에 비할 만한 것은 없습니다.
만약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구루기타를 공부해야 합니다.
거기에서는, 시바경이 파르바티에게 진실한 헌신의 감정을 가지고 사드구루의 발치에서 어떻게 봉사해야 되는가를 아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 책에 담긴 내용을 깊히 성찰하고 분별력을 사용하는 영적 열망자는
'진아지(眞我知)'라는 확고한 신념에 도달할 것입니다.
마라티어로 쓰여졌기 때문에 비이원성을 말하는 이 책을 평범하고 쉽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 의미에 관해서는 여기에 포함된 내용이 심오한 진짜 아드바이타 베단타라는 것을 이해하십시오.
여기에 포함된 마라티어를 통해 베단타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으며,
고대 경전에 서술된 것과 동등한 내적인 만족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진아지(眞我知)를 얻는 방편이 여기에서 제시되어 있기 때문에 이 책을 평이하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어리석은 사람이 이 책 본문에 포함된 내용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자기 손에 코코넛을 들고 있으면서도 먹을 줄도 모르는 원숭이와 비슷합니다.
자, 이제 이 주제에 대하여는 그만 이야기하겠습니다.
각자 능력에 따라서 그 귀하고 심오한 보물을 가져 갈 수 있습니다.
진주가 조개껍질과 동일한 가치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우파니샤드가 "이것도 아니다. 이것도 아니다(네티,네티)"라고 말하는 곳에서는
언어의 교묘한 의미가 적용되지 않습니다.
시작과 끝에서 유일하게 존재하는 절대 실재(實在),
즉 파라브라만은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스승과 제자와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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