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13. 21:50ㆍ성인들 가르침/과거선사들 가르침
대해선사의 서장- 장제형(張提刑)에게 답함
노 거사님 하시는 일이 넌지시 도에 들어맞읍니다.
다만 아직 단번에 확 내려놓지를 못했을 뿐입니다.
만약 매일 매일 온갖 인연에 대응하면서도 본분사(本分事)를 잃지 않는다면,
단번에 확 내려 놓을 수는 없다 해도 임종시에는 염라대왕이 두손을 모으고 항복할 겁니다.
하물며 한 생각(一念)이 맞아 떨어진다면 말할 나위도 없읍니다.
내가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대가 행하는 일을 살펴 보건대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중용을 취해 지나침도 모자람도 없으니, 이것이 바로 도와 합치되는 곳입니다.
이 속에 이르러서는 번뇌라는 생각도 내지 않으며 부처님의 법이라는 생각도 내지 않읍니다.
부처님의 법과 번뇌라는 생각이 모두 본분사 바깥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한 본분사 바깥의 일이라는 생각도 내지 말고, 오로지 "이같은 생각을 일으키는 자는 어느 곳에서 나온 것인가? 행동할 때마다 무슨 형체를 지니고 있는가? 이미 행동을 개시하여 내 뜻대로 이루어지면서도 지나침이나 모자림이 없으니, 바로 이러한 때는 누구의 은혜를 받는가?"라고 안으로 돌이켜 볼 뿐입니다.
이렇게 공부를 오랫동안 지어 가다 보면 마치 활쏘기를 배우는 사람처럼 자연히 적중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일체의 모든 근(根-감각기관)은 자기 마음이 드러난 것이며, 모든 사물, 생명체 등은 자기 기억 속의 허망한 생각들의 모습이 현상화하여 나타난 것이다.
이런 것들은 마치 강물처럼, 씨앗처럼, 등불처럼, 바람처럼, 구름처럼 찰나찰나 바뀌면서 파괴되고 있는데,
그 조급한 움직임은 원숭이와 같고, 깨끗이 못한 것을 즐기는 것은 날파리와 같고, 만족함이 없는 것은 바람을 맞는 불과 같고, 무시(無始)이래 내려온 허망한 습기(習氣)의 인(因)은 두레박과 같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읍니까?
이 말씀의 이치를 알아채서 타파할 수 있다면 이것이 바로 '나와 남으로서 분별이 없는 지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마음이 전도(顚倒)된 중생은 자기를 잃고 대상 사물만 쫏아 다니면서 사소한 욕심으로 한량없는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매일 매일 아침 아직 눈도 뜨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아 깬듯 만듯 할 때부터 심식(心識)은 이미 분분히 일어나 망상이 흘러 넘칩니다.
선하고 악한 모습이 아직 밖으로 드러나지 않아지만, 잠자리에서 나오기 전에 이미 천당과 지옥이 마음 속에서 일시에 이루어져 있으니, 좋고 나쁜 모습이 드러나기를 기다릴 때에는 벌써 제8식(八識)에 떨어진 것입니다.
천당과 지옥이 다른 곳이 있지 않읍니다.
다만 본인이 깬듯 만듯 아직 잠자리에서 나오기 전의 마음 가운데 있을 뿐입니다.
조금도 밖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어렴풋이 깬듯 만듯 할 때에 간절히 그 마음 자리를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돌이켜 볼 때에도 이 마음과 다투지 말아야 합니다.
다툰다면 쓸데없는 힘을 빼는 것입니다.
승찬스님이 <신심명>에서 "움직임을 그쳐서 멈추려 하면, 멈추려는 마음이 요동을 친다."라고 말씀하지 않았읍니까?
날마다 있는 번뇌 속에서 점점 힘을 더는 것이 느껴질 때 바로 본인이 힘을 얻는 곳입니다.
본인이 부처님과 큰스님이 되는 곳이며, 지옥을 바꾸어 하늘 나라를 만드는 곳이며, 편안히 앉아 있을 곳이며,
삶과 죽음의 문제를 벗어나는 곳이며, 자기의 임금을 요와 순 임금보다 더 훌륭하게 모시는 곳이며,
지친 백성을 쪼들리는 생활 속에서 일으켜 주는 곳이며, 자손에게 보이지 않는 덕을 베푸는 곳입니다.
이 자리에 다달아서 부처님과 큰 스님을 말하며, 마음과 성품을 말하며, 현묘(玄妙)한 이(理)와 사(事)를 말하며,
아름다움과 추함을 말하더라도 이 또한 본분사 바깥쪽의 일입니다.
이와같은 일들도 오히려 바깥에 속하는데, 하물며 다시 번뇌 속에서 예전 성인이 꾸짖었던 일이야 더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좋은 일을 하는 것도 오히려 인정하지를 않는데, 어찌 좋지 않은 일을 하도록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을 믿는다면 영가(永哿)스님께서 "걸을 때도 선정(禪定)이요, 앉아있을 때에도 모두 선(禪定)이다, 어묵동정 그 바탕이 편안하다네"라고 말한 것이 모두 빈밀이 아닙니다.
부디 이말을 의지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그 마음이 변치 않았다면, 자기의 본지풍광(本地風光)과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아직 철저히 깨달아 분명히 보지 못했더라도, 낯설었던 공부는 낯이 익어지고 낯이 익었던 나쁜 버릇은 낯설어질 것입니다. 이 말을 간절히 기억하고 또 기억하셔야 합니다.
힘 더는 곳을 느낄 때가 바로 바로 힘을 얻는 곳입니다.
이 늙은이는 언제나 참선하는 사람들과 이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기에 이따금 이럭저럭 이야기를 나름대로 잘 알아듣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대개 이 공부를 소홀이 여겨서 기꺼이 자기 일로 삼지를 않습니다.
거사님은 제가 말한대로 공부하여 화두를 챙기셔야 합니다.
다만 열흘남짓이면 바로 힘이 드는가 안 드는가, 힘을 얻었는가 얻지 못했는가를 바로 보실 것입니다.
이는 마치 사람이 물을 마시고 그 물이 차고 더운가를 스스로 아는 것과 같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여 줄 수도 없고 드러내 보일 수도 없습니다.
청량(淸凉) 국사께서는 " 깨달음을 말하자면 다른 사람에게 보일 수 없고, 이치를 말하자면 증득한 이가 아니면 알 수 없다"라고 했습니다.
스스로 증득하고 믿으며 깨달을 곳은 오직 이미 증득하고 믿으며 깨달은 자라야 말없이 그 자리에 들어맞는 것입니다. 아직 증득하지도 믿지도 깨닫지도 못한 이들은 스스로를 믿지 못할 뿐만 아니라,
또한 다른 사람에게 이와 같은 경계가 있다는 사실을 믿지도 못합니다.
노 거사님의 타고난 자질은 도에 가깝습니다.
현재 정해서 하시는 일들을 다시 바꿀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공부와 견주어 보면 만분(萬分) 가운데 이미 구천구백구십구분을 얻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다만 단숨에 깨쳐 바로 아는 것만 남았을 뿐입니다.
사대부가 도를 배우되 대다수가 그 내용을 착실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입으로 말하고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을 빼면 우두커니 서서 어찌 할 바를 모릅니다.
어찌 할 바 없는 곳이 바로 좋은 곳인줄 믿지 못합니다.
오직 마음으로 생각하여 다가가려 하고 입으로만 설득하여 밝히려고 하니,
이것이 조금도 잘못된 일인줄 알지 못합니다.
부처님께서 "여래는 온갖 비유로 갖가지 일을 설하지만, 이 법을 설할 수 있는 비유는 없다. 무엇 때문인가?
마음으로 아는 길이 끊어져서 부사의(不思議)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셨으니,
진실로 사량분별을 하면 도를 가로막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읍니다.
만약 사량분별하는 앞 생각과 뒷생각이 모두 끊어진다면 마음으로 아는 길은 저절로 끊어집니다.
마음으로 아는 길이 끊어지고 난 다음에 온갖 일을 설해주는 것이 이 법입니다.
이 법이 밝아지면 밝아진 곳 그 자체가 바로 부사의대해탈경계(不思議大解脫境界; 사량분별로 헤아릴 수 없는 대해탈 상태)입니다.
다만 이 경계도 불가사의(不可思議)할 뿐입니다.
경계가 이미 불가사의라면 여기에서 말하는 모든 비유나 온갖 일들도 불가사의합니다.
이 불가사의한 것도 불가사의할 뿐입니다.
이 말 또한 입 댈 곳이 없읍니다. 이 입댈 곳이 없는 것도 불가사의할 따름입니다.
이처럼 끝까지 따져보면 사(事)든 법(法)이든, 비유이든 경계이든 모든 것이 둥근 고리처럼 시작이나 끝이 날 무슨 단서가 없으니, 모두 불가사의합니다. .
그래서 경전에서는 "보살이 부사의(不思議)에 머무르면 생각할 수 없다는 생각조차도 다 사라진다"고 하였읍니다. 이 불가사의한 곳에 들어가면 생각하는 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도 모두 적멸(寂滅)합니다.
그렇다 해도 적멸한 곳에 머물러 있지 말 것이니,
적멸한 곳에 머무른다면 법계(法界)의 경계에 제한을 받게 됩니다.
부처님 가르침에서는 이것을 법에 집착하는 '법진번뇌(法塵煩惱)'라고 합니다.
법계에 집착하는 생각을 없애고 뛰어난 온갖 경계를 한꺼번에 마음 속에서 떨쳐 버려야 비로소 뜰 앞의 잣나무(庭前栢樹子), 삼세근(麻三斤), 마른 똥막대기(乾屎厥), 개는 불성이 없다(狗子無佛性),한입에 서강물을 다 마셔버려라(一口吸盡西江水), 동산이 물위로 간다(東山水上行) 등의 화두를 잘 보는 것입니다.
한 마디 일러주는 자리에서 문득 깨달아야 비로소 '하염없이 공덕을 법계에 회향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여실(如實)히 보고, 여실히 행하고, 여실히 씀으로서, 바로 한 터럭 끝에서 부처님의 세계를 나타내고 번뇌 속에 앉아서 온 누리에 큰 법을 퍼트릴 수 있습니다.
온갖 법을 이루고 파괴하는 것이 모두 나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힘센 장사가 팔을 펼 때에 남의 힘을 빌리지 않고,
사자가 돌아 다닐 때에도 같이 다닐 짝을 구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뛰어나고 오묘한 온갖 경계가 눈앞에 나타나도 놀라지 않으며, 나쁜 업인 온갖 경계가 눈앞에 나타나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날마다 오고 가며 앉고 눞는 삶 속에서 인연따라 비워 버리고, 그 인연의 성품에 맡겨서 유유자적합니다. 이 경지에 다가가서야 천당이나 지옥이 없다는 일들을 말할 수 있읍니다.
그러므로 영가(永嘉) 스님께서 " 중생도 없고 부처도 없다. 모래처럼 많은 대천(大千)세계가 바다 속의 거품이요, 일체의 성현이 번갯불과 같다"고 하셨읍니다.
이 늙은이가 이런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면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읍니까?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는 이들이 참으로 많읍니다.
진실로 근원을 꿰뚫어 크게 깨닫지 못했다면 말을 따라서 알음알이 내는 것을 면치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바로 '모든 것이 모두 무(無)'라고 하여 인과를 무시하고,
모든 부처님과 조사들의 가르침을 모두 허위라고 하여 세상사람들을 속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병을 없애지 못한다면 거칠고 방종해져서 재앙을 불러드리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 허망하게 들 뜬 마음에는 온갖 교묘한 생각이 많다"고 하셨읍니다.
유(有)에 집착하지 않으면 무(無)에 집착하고, 양쪽에 모두 집착하지 않으면 유,무 사이에서 분별하고 비교합니다. 설사 이 병폐를 알아챘다 해도 이내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곳(非有非無處)에 집착하고 맙니다.
이런 까닭에 옛 성현은 사구(四句)를 벗어나고 백비(百非 : 사구에 대하여 긍정,부정(非), 긍정이면서 부정,부정이면서 부정을 부정하는 것을 적용하면 16개. 여기에 과거,현재,미래 삼세를 적용하면 48가지가 되며, 또 미기(未起)와 이기(已起)를 적용하면 96가지가 됨)를 끊어서, 곧바로 한칼에 두 동강이를 내 다시는 앞뒤 생각말고 그대로 모든 성인들의 정수리를 끊으라"고 한 것입니다.
사구(四句)란 유(有),무(無),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것(非有非無).유이면서 무인 것(亦有亦無)을 말합니다.
만약 이 사구(四句)를 투철히 요달한다면, 어떤 사람이 일체의 모든 법이 실제로 존재(實有)한다고 설하는 것을 보고서 나 역시 그 설에 따라서 실유(實有)라 설하더라도 그 실유에 걸리지 않읍니다.
어떤 사람이 '모든 법이 실무(實無)'라고 하는 것을 보고, 제가 또한 따라가서 이와 더불어 무(無)를 설해도 세간에서 말하는 텅 비어있는 허무(虛無)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모든 법이 '유이기도하고 무이기도 하다(亦有亦無)'라고 설하는 것을 보고, 제가 또한 따라가서 이와 더불어 역유역무(亦有亦無)를 설해도 이것은 희론(戱論)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모든 법이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다(非有非無)'라고 설하는 것을 보고, 제가 또한 따라가서 이와 더불어 비유비무(非有非無)를 설해도 이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유마거사가 "육사외도(六師外道: 석가모니 당시에 융성했던 불교 이외의 대표적 사상가들)가 떨어진 곳에 너도 또한 따라서 떨어진다"라고 말한 것이 이것입니다.
대부분 사대부들은 도를 배울 때 마음을 비워 선지식의 가르침에 귀기울이려 하지 않습니다.
선지식이 입을 열자마자 다 듣기도 전에 금방 알아 버리지만, 이해한 것을 토로해 보라고 하면 이내 다 어긋납니다. 듣기도 전에 알아버리는 것이 도리어 언어에 걸려 버리고 맙니다.
또 어떤 부류는 그저 영리함만으로 도리를 설하는 자가 세간의 갖가지 교양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없으나
다만 선 하나만도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자기가 근무하는 관청에 몇몇 터무니없는 말을 하는 장로를 불러와 한끼의 차와 밥 한 그릇을 대접하고는 그들에게 멋대로 이야기하도록 하고, 그들의 말을 사량분별하고 기억해 둡니다.
그리고 그 말로 다른 사람들을 상대하여 한 마디 주고 받는 것을 일러 선문답을 한다고 합니다.
선문답 끝에 자기의 말한마디가 많아서 상대방의 말이 막힐 때에 바로 자기가 이겼다고 합니다.
그러다 진실로 눈 밝은 이를 마주치기만 하면 또 조금도 그 내용을 제대로 알지를 못합니다.
설사 알더라도 굳센 믿음이 없기에 넙죽 땅에 엎드려 그 내용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스승의 아는 곳에서 여전히 자기의 알음알이로 인가를 요구하다,
역순경계에서 보여주는 스승의 본분(本分)가르침에서는 또 부끄럽고 두려워서 감히 가까이 가지를 못합니다.
이들은 정말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노거사님은 젊은 나이에 출세하여서 집안을 일으켰습니다.
사는 곳에서 시절 인연을 따라 좋은 일을 하셨읍니다.
글 짓는 솜씨도 모두 다른 사람보다 훨씬 뛰어났습니다.
그러나 이 일들을 스스로 자랑하지도 않습니다.
한 마음 한 뜻으로 한 걸음 물러나 다만 착실하게 이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만을 알려고 했읍니다.
그 지극한 정성을 보았기에 저도 모르게 이처럼 어지러운 말을 늘어놓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거사만 이런 병통을 알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또한 처음 공부하려는 마음을 낸 새내기 보살들에게도 권하여서 도에 들어가는 양식으로 삼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대혜선사의 書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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