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을 놓는것만 봐도 마음가짐을 알수 있다

2021. 1. 8. 11:31성인들 가르침/일반좋은글

‘사소의중’

 

 

 

새삼스러울 수도, 새삼스럽지 않을 수도 있는 새해를 맞는다. 

2020년에서 2021년으로 숫자 하나 바뀌는 것이 뭐 대단한 일은 아닐 듯하다. 

그러나 진실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고자 마음 다짐을 새로이 한다면 늘 그곳이 새날이고 새해가 될 것이다. 

 

올해는 신축년이니 ‘호시우행’(虎視牛行)라는 사자성어를 떠올려 본다. 

범처럼 노려보고 소처럼 걷는다는 말이다. 

예리하고 세심한 통찰력, 성실하고 신중한 태도를 뜻할 것이다. 

통찰과 태도, 이 두 단어의 속내와 지향은 각자의 몫이겠다. 

 

어떤 이는 크고, 멀고, 넓고, 깊게 통찰하며 사회와 인류의 변화와 개혁을 위해 정진할 것이다. 

그럼 나는 올해 어떤 태세로 호시우행의 길을 걸을까? 

매우 작고 사소한 일들을 화두로 삼고자 한다. 

당장 나와 함께 주변의 것들을 세밀하고 정밀하게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세심하고 정성껏 실천할 것이다.

‘거시적으로 보고 미시적으로 행동하라’는 말이 있듯이 말이다. 


나만의 호시우행을 염두에 두고 보니 평소에 무심하게 스쳐갔던 작은 일들이 눈에 들어온다. 

오늘 아침 법석을 마치고 볼 일이 있어 종무소에 갔다. 

출입문 앞의 신발들이 자로 잰 듯 가지런하다. 

“이곳의 법우님들은 참 믿음직해요.” 거두절미하고 대뜸 살림위원장 법우님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즉시, “저희들이 신발을 말끔히 정돈하지요.”라고, 답한다. 

눈치가 백단이다. 신발 정리에 대한 사연은 이렇다.

 

작년 여름에 이곳 실상사에 왔다.

이후 지인들이 살기 좋으냐고 안부를 묻는다. 좋다고 즉시 답한다. 

왜 좋으냐고 물으면 또 즉시 답한다. 

첫째, 사람 때문에 마음 상하는 일이 거의 없다. 

둘째, 대중들이 과소비하지 않고 검박하니 마음이 편하다. 

셋째, 독서와 노동과 사유를 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어서 좋다고 말한다. 

정말 그렇다. 상식이 있고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과 살아가니 내게 이보다 복된 곳은 없다.

 

그런데 한 가지가 눈에 거슬렸다.

스님들의 영역과 확연하게 다른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건 그건 신발 상태다. 재가자 법우님들의 공간에 벗어놓은 신발들이 어느 곳은 어지럽다. 

그래서 그때그때 말을 할까 하다가 잔소리로 비춰질 것 같아 말하지 않았다. 

대신 방문 앞에 흐트러진 신발이 보이면 내가 바로 놓았다. 

수시로 그렇게 했다. 이쯤 하면 눈치를 채고 정돈을 하겠지, 했는데 영 약발이 없다. 

명색이 교육도량인 작은학교도 신발 정돈 상태가 보기에 민망했다. 

아니, 상상과 창의력이 자유분망해야지 신발이 자유방종하면 어찌 하나. 애고~ 관셈 보살.

 

 

실상사 작은학교에서 교사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법인 스님. 사진 조현 기자

 

보다 못해 선생님들과 차담 하면서 조목조목 지적했다.

교육이란 보고 배우는 것이며, 몸가짐이 곧 마음가짐이며,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고,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가고, 자유와 질서를 혼돈하지 않아야 하고, 밖에서 오신 분들이 어지러운 신발들을 보면 어찌 생각할 것이며, 이렇게 주절주절 지적했다. 

얼굴은 미소를 머금고, 목소리는 고요하고 낮게 말했다. 

그럼에도 분위기는 썰렁하고 철렁했다. 

 

하지만 서로가 감정 상하지 않으려고, 혹은 이런 사소한 일을 굳이 말해야 하나, 라는 생각에 머물러 말을 아끼면 이건 사랑이 아니다. 좋은 일만 칭찬하고 격려하는 것만이 사랑이 아니다. 

불편한 일도 거론하면서 탁마하고, 그러면서 서로에게 배움이 일어나고 성숙하는 과정과 결실이 바로 사랑이다.

교사들과 차담을 하고, 이후 내가 가르치고 있는 4학년(고교 1학년에 해당한다) 학생들과 매우 사소한 일들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여러분, 성철 스님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고 말씀하셨지요.

간달프는 이 문장을 이렇게 응용해 보고 싶어요. ‘큰 것만 큰 것이 아니요. 작은 것이 하찮은 것이 아니다’라고 말이예요.” 이렇게 그럴듯한 화두를 던지고 신발과 인사에 대해 설명했다. 

 

공부란 크고 작든 간에 무엇이든지 유심히 살피는 일에서 시작한다고, 

우리가 사소하다고 생각하는 작은 것들도 마음의 반영이라고, 세상 만물과 일들은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그 자체로 의미와 내용을 담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물었다. 

흐트러진 신발은 어떤 마음 상태의 반영이겠는가? 

학교에 오시는 분들 중에 내가 아는 사람에게만 아는 체 한다면 이게 도리에 맞겠는가?

 

그리고 전체 공동체 식구들이 모이는 월요일 아침 법석에 신발 문제를 거론했다.

지적하는 일은 언제나 조심스럽다. 

사용하는 언어와 표정에 세밀하게 신경을 써야 한다. 비록 옳은 말이고 좋은 취지로 말하지만, 지적 하고 난 이후 마음은 늘 조심스럽다. 

이후 각 영역에서 눈에 드러나게 신발 상태는 변화가 있었다. 

그 중에서 종무소가 으뜸이다. 

대개 사소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지적하고 고치자고 해도 흐지부지 되는 경우가 많다. 

작은 것에 대한 지적을 깊이 들어준 분들이 고마울 뿐이다.

 



지금 작은학교는 신발 상태가 대체적으로 우수한 것 같은데 중학교 학생들은 좀 허술한 편이다.

신발에 대한 탁마를 하고 난 몇 달 후, 4학년 대상으로 ‘고사성어’ 수업을 했는데, 매번 신발 상태가 깔끔하다. 

그래서 넌지시 말했다. “ 오! 신발들이 예쁘게 놓여있네” 그러자 학생들이 일제히 큰 소리로 합창한다. 

조.고.각.하! 조고각하(照顧脚下)가 무슨 말인가? 

비출 조(照), 돌아볼 고(顧), 다리 각(脚). 아해 하(下), 말하자면 자기 발아래를 살피라는 뜻이다. 

회광반조와 함께 선종에서 많이 쓰는 언구다. 

 

자기의 마음 상태를 늘 살피라는 뜻이다. 절에 가면 댓돌 아래 ‘조고각하’라는 표식이 있다. 

일차적인 의미는 신발을 가지런히 놓으라는 말이다. 나아가 신발 벗는 일과 마음 살피는 일이 둘이 아니라는 뜻이 담겨있다. 시시처처에 조심조심하라는 뜻이다. 그렇다. 몸가짐과 마음가짐이 결코 둘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작고 적은 것이 하찮은 일이 아니다. 의미를 담고 정성을 다하면 작은 것도 크게 빛나고 적은 것도 넉넉해진다.

 

절집에서는 작은 일에 주의하고, 조심하고, 경건한 삶을 사신 노스님의 일화가 전해온다.

그 중에 한 분이 해인사의 지월 스님(1911-1973)이다. 

성철 스님이 가야산 호랑이라면, 지월 스님은 가야산의 천진도인이다. 

지월 스님은 매사에 검박하고 소탈하고 천진무구했다고 한다. 

굳이 절집 족보를 따진다면 내게는 큰 아버지라고 할 수 있다. 

스님은 나의 스승의 사형이다. 지월 스님은 어떤 물건도 소홀하게 대하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절집에서는 예전부터 늘 “시주 것 무서운 줄 알아야한다”는 말이 있다. 

절집의 크고 작은 모든 재화들은 세간 사람들의 노동과 땀이라는 것이다. 

낭비가 심한 요즘 절집에서는 이 말도 이제는 자주 사용하지 않는다. 

지월 스님을 모시고 수행한 도법 스님의 말에 의하면 스님은 넘치는 것도 아껴 썼다고 한다. 

스님은 이런 말씀을 많이 하셨다고 한다. “흐르는 물을 아껴 쓰면 용왕님이 보호하고, 땔나무를 아껴 쓰면 산신이 보호 한 산신이 보호 한다” 흔하고 넘친다고 생각할 수 있는 물과 마른 나뭇가지도 함부로 대하지 않은 지월 스님의 살핌과 마음 씀에 고개가 숙여진다.

 

또 송광사의 취봉 스님은 어떠했던가?

취봉 스님(1898-1983)은 지금도 송광사 스님들의 귀감이고 사표이다. 

무소유, 즉 최소한의 소유로 자족하고 당당했던 스님을 꼽으라면 나는 취봉 스님을 말할 것이다. 

또한 상(相, 뽐내거나 자의식)이 없는 스님을 말하라면 이 또한 취봉 스님이다. 

복이 많게도 나는 사미승 시절 취봉 스님을 간간히 옆에서 시봉했다. 

스님에 대한 후학들의 감동과 감화는 거의가 일상의 매우 사소한 것들이다. 

스님은 특히 공과 사의 구분이 엄격했다고 한다. 

 

법정 스님의 글에 그런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어느 때 스님이 심한 감기에 걸렸다. 

제자 스님이 감기 치료에 좋은 약을 달이려는데 생강이 없었다. 

그래서 공양간에서 몇 개 얻어 사용했다. 나중에 이를 안 스님은 제자를 나무랐다. 

사중의 공물과 개인의 사물은 엄격하게 구분해야 한다고 하며, 시장에서 생강을 구입해서 공양간에 주라고 시켰다. 아무도 생강 몇 개 사용한 것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취봉 스님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해도 공사의 구분이 중요했던 것이다. 

스스로에게 엄격한 모습은 보는 이에게는 엄숙함을 느끼게 한다. 

스승님들의 삶이 이러했으니 후학인 나는 소박하고 자신에게 정직했던 옛 스님들을 거울삼아 매사에 고마운 마음, 미안한 마음을 잘 간직하고 표현해야겠다. 

무엇보다도 내 속 뜰을 정직하고 세심하게 살펴 감정과 의도를 잘 다스려야겠다.

 

호시우행이라는 옛 말을 이어 받아 나는 ‘사소의중’(事小義重)이라는 사자성어를 만들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그 의미는 무겁고 귀중하게 여기겠다는 다짐이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문득 옛적 기차 안에서 겪은 감동이 떠오른다.

 “스님, 이거 밖에 드릴게 없네요” 따뜻한 두유 한 병을 건네던 어느 보살님의 소박한 미소를 생각한다. 그때 정성스레 건네준 두유를 손에 쥐고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선 자리가 늘 조심스럽고 무겁구나.” 내게는 그런 작은 풍경들이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즉사이진(卽事而眞), 사물과 일상에 진실이 있다.

사사무애(事事無碍), 사사건건 진실하게 소통하면 만사가 평화롭다.

세상 이치가 이러하니, 작은 것들의 귀함이 어찌 사물에만 있을 것인가? 

사람의 귀함이 그렇다.

 

- 글 법인스님/ 실상사 한주& 실상사 작은학교 철학선생님 & 전 조계종 교육부장 & 전 참여연대 공동대표

 

 출처 :휴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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