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2. 11. 20:52ㆍ성인들 가르침/라메쉬 발세카
-- 행동은 자연 발생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
질문자: 즈나니는 사실상 얽매이지 않고 즈나니 자신이 얽매이지 않는 참의식이지만, 기능적인 관계는 계속되는 것처럼 보이네요?
라메쉬: 그럼요. 그 때문에 얽매임이 없어요. 목격할 것이 있는 한 목격할 뿐입니다. 목격할 것이 없으면 비목격 상태로 들어가지요.
질문자: 그런 상태에서는 무엇이 깨달은 사람이 무엇을 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나요? 깨달은 사람들도 환경에 반응하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라메쉬: "깨달은 사람"이라고 말은 하지만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아요. 깨달은 "사람" 따위는 있지도 않아요. 그래서 동기라는 것은 상관없어요. 그런 몸-마음 구조체를 통해서 일어나는 모든 행동은 자연 발생적으로 일어납니다. 행동이 일어나기 전에 마음이 끼어들지 않아요. 그래서 즈나니의 행동이 꼭 이치에 맞지 않을 수도 있고 일관성 있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겁니다.
질문자: 무슨 일을 하려고 인식이 일어날 때 행동이 자연 발생적으로 일어나지 않고 어떤 행동을 해야할지 혼동하기도 하나요? 혼동하는 일이 있나요?
라메쉬: 없어요. 이런 자연 발생적이라는 것의 고유한 특성이 혼동이 없다는 겁니다. 혼동은 마음에서 옵니다. 자연 발생적인 것에는 마음은 완전히 배제됩니다.
질문자: 그럼 행동은 그냥 일어나는군요. 잘못 판단할 수도 있나요?
라메쉬: 아니죠. 자연 발생적인 행동에는 혼동도 없고 판단이나 잘못된 판단도 없어요. 혼동과 판단은 정말 같습니다. 이것을 할지 저것을 할지 판단하는 것이 혼동이지요.
질문자: 즈나니가 인간의 필요에 응답하는 방식이 사랑과 자비라고 말씀하셨지만, 어떤 때는 그런 필요에 응답하는 듯하다가도 어떤 다른 상황에서는 그런 필요를 무시해버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즈나니에게 일관된 것을 하나 꼽으라면 저는 사랑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네요.
라메쉬: 자비의 상태는 사랑과 증오, 동정과 동정의 결여와 같은 이원성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적인 상태 그 이전에 있습니다. 자비의 상태는 늘 저변에 깔려있어요. 이원성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행동은 즈나니의 행동이 아닙니다. 한 행동이 누군가를 도와주게 되어 있다면, 겉으로 보기에 자비로운 일이 일어나겠지요. 하지만 다른 사람의 경우에 이 사람이 도움을 못 받게 되어 있다면 행동하지 않는 것이 겉으로 보기에 필요를 무시하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어느 경우가 되더라도 깨달은 사람은 개인으로서 관여하지 않아요. 깨달은 사람과 관련된 행동에 오해가 있어요. 깨달음이 일어났든지 안 일어났든지에 상관 없이 몸-마음 구조체와 일어나는 행동은 서로 관련이 없어요. 유기체는 단지 도구일 뿐입니다.
-- 일어나는 일에 어떻게 반응할지는 알 수가 없다 --
질문자: 이해가 분명해지면 생각하는 마음이 피해를 줄 수 있는 영역이 좁아진다고 말씀하셨어요. 현상세계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을 두고 하신 말씀인가요? 즈나니는 피해 받는 영역이 좁은가요?
라메쉬: 즈나니에게는 생각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없어요. 생각하는 마음이 바로 그 "나"입니다. 생각하는 마음이 바로 그 에고입니다.
질문자: 즈나니도 공포를 경험하나요?
라메쉬: 즈나니가 공포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죠. 공포는 일어날 수 있어요. 공포가 참의식 안에서 일어나기도 해요.
질문자: 그 즈나니의 타고난 특징 때문인가요?
라메쉬: 맞아요. 유기체는 반응하지요. 깨달음이 호전적 성격의 유형인 신체 긴장형의 유기체에서 일어난다면 공포를 느끼는 식으로 반응하지 않고 저항하는 행동으로 반응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좀 더 부드러운 유형인 내장 긴장형의 유기체라면 공포를 느끼면서 다른 식으로 반응할지도 몰라요. 제 말은, 가상적인 상황에서 깨달음이 일어난 유기체가 어떻게 반응할지는 알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즈나니의 입장에서는 어떤 반응을 보이든지 그 반응에 신경쓰는 '이'가 없어요. 생각하는 마음이 "어떻게 반응하지?"라고 생각하고 "그런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해야할까?"라고 추측해보지요. 알겠어요? 가상적인 상황은 순전히 생각하는 마음의 산물이고 즈나니에게는 이런 생각은 일어나지 않아요. 마하라지를 찾아오는 보기 드문 방문자들 중에 힌두교인이 한 사람 있었는데, 힌두교의 소극적인 자세들이 자신을 약하게 만든다고 생각하고 호전적인 시크교로 종교를 바꿨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한번은 "마하라지, 선생님도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야 한다'며 똑 같은 말씀을 하시는군요. 저는 못 받아들이겠습니다. 만일 내일 제가 다른 싸움꾼 한 무리를 데리고 와서 여기 있는 사람들을 두들겨 패기 시작한다면 선생님은 어쩌시겠습니까?"라고 마하라지께 물었어요. 마하라지께서 "모르겠네."라고 답하셨죠. 모두들 웃었어요. 한바탕 농담이었지요. 하지만 그 사람을 노려보고 있는 저를 보시고서 제게 물으셨어요. "뭐가 문제인가? 자네는 이것이 훌륭한 농담으로 들리지 않나?" 제가 말했습니다. "그것이 농담이었든지 아니었든지는 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스승님께서도 그
보다 더 정확히 표현할 말을 못 찾으셨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실 수 밖에 없으셨습니다." 마하라지께서 저를 바라보셨어요. 제 말 뜻을 아셨지요. 한 다른 방문자가 제게 물었어요. "당신과 마하라지 사이에 무슨 말씀을 나누시고 계셨습니까?" 물론 저희가 마라티어로 말하고 있어서 다른 사람은 못 알아들었죠. 그래서 제가 마하라지를 바라 봤습니다. 마하라지의 허락 없이는 어떤 말이나 행동도 할 수 없었어요. 마하라지는 아주 엄격한 분이셨죠! 마하라지의 명령 가운데 하나가 "내가 없는 곳에서 누구도 내 가르침을 논하지 말라."였어요. 마하라지께서는 사람들이 모여서 정치 따위의 얘기나 하는 마하라지 모임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마하라지의 허락이 있은 후에 제가 마하라지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방문자들에게 말해주었어요. 그 질문은 한 개인이 다른 한 개인에게 물은 질문이지만 여기에 개인이란 없다는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은 "나는 모른다."입니다. 개인은 말하죠. 이런 저런 상황에서 나는 이렇게 저렇게 행동하겠다고. 하지만 여기, 개인이란 존재하지 않아요. 내일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마하라지께서는 가만히 계시고 다른 청중들이 저항할 수도 있을 겁니다. 똑 같은 상황에서 하루는 완전히 정반대로 마하라지께서 지팡이를 집어 들고 저항하실 수도 있을 겁니다. 비록 생각하는 마음이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할지를 안다고 생각해도 예측한대로 행동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예를 들어, 삼대에 걸쳐서 군인 집안 출신의 한 군인이 "쉬운 일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이렇게 하거나 저렇게 하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했어도, 막상 그 순간이 닥쳤을 때 이 군인은 그냥 도망 칠 수도 있는 일입니다. 반대로 평소에 늘 겁이 많던 어떤 사람이 영웅적인 행동을 환상적으로 해낼 수도 있겠지요. 제가 알기로는 저번 세계대전 당시 훈장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은 비교적 작은 체구의 사람인데, 심지어 장교도 아니고 그냥 병사였는데, 순간적인 충동으로 용감한 행동들을 해서 훈장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 되었지요. 가상적인 상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생각하는 것은 시간 낭비예요. 그렇다고 일하는 마음이 자기 일을 하는데 예상해보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예요. 일하는 마음도 생각하는 마음만큼이나 기억을 사용해요. 사실 일하는 마음이 더 효율적으로 일하려면 기억을 사용해야만 하지요. 하지만 여기서는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아요.
-- 깨달은 이에게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묻다 --
질문자: 깨달음이 일어나면 더는 자신을 개인의 몸과 동일시하지 않고 그 자신의 몸은 참전체성이 된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라메쉬: 아니, 아니, 아니죠. 몸이 아니예요.
질문자: 아니, 제 말은, 참의식이 더는 개인의 몸과 동일시 하지 않을 때...
라메쉬: '행위자'라고 여기지 않지요. 하지만 몸과 동일시하는 정체성은 계속 남아있어야만 해요. 안 그러면 어떻게 몸이 기능하겠어요? 이 때문에 제가 "예수나 부처나 어떤 스승이나, 누가 부르면 대답한다."라고 말하는 겁니다. 몸과 동일시하는 정체성은 반드시 계속 남아있어야만 해요. 그리고 여기에 더해서 자신이 행위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한다고 해도 여전히 "나"와 "내 것"이라는 말을 써야해요. 만일 제가 '내가'라는 말대신 계속 "라메쉬"가 어떻다고 말한다면 정말 바보같아 보일 겁니다. 이 몸을 일컬으면서 "나" 또는 "내 것"이라는 말을 못쓸 이유가 없지요. 일단 라메쉬가 행위자가 아닌 것을 안 이상 그런 말을 못쓸 이유가 뭡니까?
질문자: 아마 제가 잘못 말한 것 같은데... 제가 선생님께나 신을 깨달은 누군가에게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묻는다면 즉각적으로 "나는 공간의 참전체성이다."라고 대답할 것같은데, 맞나요?
라메쉬: 저 같으면 차라리 "나는 당신이 나라고 생각하는 이 몸-마음 도구가 아니다."라고 말하겠습니다.
질문자: 저는 그 말씀을 참의식이 더는 에고-마음-몸과 동일시하는데 국한되지 않으면 참전체성이 된다는 말로 이해하겠습니다.
라메쉬: 그래요.
질문자: 그냥 한번 상상해 보면, 그런 상황에서 제 몸이 공간의 참전체성이 된다고 생각해보면 세상 모든 육체들이 내 몸 안에 있는 것이 됩니다.
라메쉬: 아니예요. 몸은 전혀 상관없어요. 일단 당신이 자신의 몸을 행위자로 여기지 않으면 자신을 다른 어떤 것과도 동일시할 필요가 없어요. 이것이 요점입니다.
질문자: 그렇지만 가장 비슷한 것은 공간인데요. 모든 것을 포함하는 변하지 않는 공간 말입니다.
라메쉬: 그렇지만 당신은 자신이 참전체성이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누가 자신을 참전체성이라고 생각합니까? 참전체성과는 동일시할 필요가 없어요.
질문자: 하지만 참의식이 자신을 의식하면 분명 모든 현상세계가 그 참의식 안에 포함됩니다. 마치 수족관의 비유와 같은데, 수족관 안에 있는 것은 수족관의 일부지요. 그냥 한 번 상상해볼께요. 참의식이 자신을 공간의 참전체성과 동일시하면 모든 몸이 참전체성 안에 포함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몸과 자신의 몸간에 차이를 못 느낄 겁니다.
라메쉬: 그래요. 그렇겠지만 차이점들이 보이지 않는 게 아니예요. 차잇점, 즉 다양성을 눈으로 확인할 뿐만아니라 이렇게 엄청난 다양성이 존재하고 이런 다양성 속에서도 편재하는 하나의 독자성이 있다는 사실을 경이로운 마음으로 깊이 이해하고 감사해해요. "나는 참전체성이다."라는 생각은 전혀 일어나지 않아요. 이런 생각은 필요없어요. 일단 몸-마음 유기체를 개별 행위자로서 여기지 않으면 더는 아무것도 필요없어요. 웅대하게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이 다 이해됩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질문에 관한 우스운 일화를 하나 들려주지요.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제 친구가 제가 언제 오는지 계속 확인하고 있다가 레이에게 전화를 걸어서 제가 언제 도착했는지 물었어요. 레이가 "아직 안 오셨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누구신가요?"라고 묻자, 제 친구 아드리앙은 이렇게 대답했죠. "친구, 그거 정말 심오한 질문이군."
질문자: 하지만 즈나니는 그것을 심오한 질문으로 여기지 않겠지요. 제가 이해하기로는 즈나니가 주는 유일한 답은...
라메쉬: 이렇게 말하겠죠. "예, 라메쉬입니다."
-- 덕(德)을 쫓지 않기에 덕이 생긴다 --
질문자: 즈나니는 도덕적인가요?
라메쉬: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 현자의 삶을 일컬어 덕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세상에서 일어나는 현실적인 문제를 자연스럽게 처리하는 도량이 있어요. 노자는 남을 눈을 의식하지 않는 삶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해요. "높은 덕은 의도적인 덕이 아니기에 덕이 있다. 낮은 덕은 덕을 놓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덕이 없다. 높은 덕은 강제하지 않으나 안 되는 일이 없다. 낮은 덕은 강제하지만 되는 일이 없다." 보통 사람은 도덕적이고 싶어하고 덕망있는 사람으로 알려지기를 바랍니다. 노자는 이것은 덕이 아니라고 말해요. 덕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사람은 자기 일을 꾸준히 해나갈 뿐인데도 하는 일들은 자연히 도덕적이 되는데, 이 까닭은 하는 일에 개인적인 의도가 없기 때문이예요. 다른 사람에게서 개인적으로 원하는 것이 전혀 없어요. 당당하고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것은 고유의 느낌에 바탕을 둡니다. 일련의 행동 규칙을 지켜야만하는 인위적인 덕과는 거리가 멀어요. 인위적으로 규칙을 지키는 일은 주어진 상황을 오해하면서 두려움과 죄책감을 동반할 수 밖에 없어요. 현자의 덕과 가식 없는 자연스러움은 잘 눈에 띄지 않는데, 이런 까닭은 평범하게 살아가기 때문이예요. 아마도 이런 덕은 의도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생겨난 새나 동물들의 색깔처럼 작용하는 영적인 익명성 따위와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노자의 말을 한 번 더 인용해 보지요. "위대한 완성은 불완전해 보이나 써도 닳지가 않는다. 위대한 충만함은 비어 보이나 아무리 써도 고갈되지 않는다. 위대한 곧음은 휘어보인다. 위대한 재주는 서툴러 보인다. 위대한 웅변은 더듬는 것처럼 들린다." 현자는 덕과 가식없는 자연스러움으로 일부러 자신을 삼가하지 않고 피 학대 음란증 환자처럼 자신을 벌하지도 않아요. 우리들 보다 더 위대한 존재가 있는 듯 겸손한 채하지 않아요. 사무실에서 일할 때 보면 자신의 상관 앞에서는 더 없이 겸손하다가도 부하 직원들 앞에서 얼마나 오만해지는지를 보면 참으로 놀랍습니다. 겸손을 마치 외투처럼 어떤 때는 입었다가 어떤 때는 벗어 버려요. 단순하고 자연 발생적으로 삶을 살아갈 때는 겸손은 생활의 일부가 됩니다. 참으로 덕이 있는 사람은 자신이 겸손해 보이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신경쓰지 않아요. 겸손한지 안 한지를 따지는 것은 고양이가 정말 실용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따지는 문제와 비슷하지요. 현자, 즉 현명한 사람은 사람사는 세상의 인위적인 것들에 대해 잘 알고 있어요.
질문자: 어떻게 그런 자연스러움이 일어납니까? 얻을 수 있는 것인가요?
라메쉬: 그런 질문은 장인에게서 어떤 기술을 단계적으로 또는 글을 통해서 배우고 싶어하는 것과 다를 바 없어요. 춤추는 것을 보고 따라하지 않고서 가르쳐 달라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수영처럼 아주 자연스러운 것을 가르치는 형식적인 설명이 왜 필요합니까? 인간이 성교하는 것을 배울려고 왜 책을 읽어야 할까요? 여러 문화의 신화를 보면 인간이 은총을 잃었다거나 자연에서 떨어져 나왔고, 과학기술로써 극복해야한다는 내용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노자가 말하기를, "위대한 도를 잃었을 때 인간성과 정의라는 개념이 나타난다. 지식과 영리함이 생기면서 큰 거짓이 일어난다. 가족 관계가 조화롭지 못할 때 좋은 부모와 충실한 자녀라는 개념이 나타난다. 나라가 어지럽고 혼란스러워질 때 충실한 신하라는 개념이 나타난다." (15cho)
- 리쿼만 편집, 김영진 번역<라메쉬 발세카와의 대담, 참의식이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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