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8. 10. 10:09ㆍ성인들 가르침/불교 교리 일반
[서광스님의 <현대심리학으로 풀어본 대승기신론> ]
3. 두 종류의 진여 수행
진여를 익하고 수행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기 내면에 있는 진여를 닦아서 익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외부 환경에서 오는 진여를 닦아서 익히는 것이다.
(1) 내면에서 작용하는 진여 수행
[본문]-한문원문은 생략하고 서광스님의 한글 번역문만 게재함
본래부터 번뇌망상에 물들지 않고 항상 맑고 깨끗해서 불가사의한 작용으로 스스로를 교화하고 이익되게 하는 진여 자체의 작용적 특징이다. 내면으로부터 항상 맑고 올바른 것을 익히려는 진여의 힘에 의해서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깨달음을 구하고자 한다. 그래서 자기 안에 이미 진여가 있음을 믿고 발심하여 수행하게 한다.
만일 모든 중생이 다 자기 마음속에 진여를 이미 가지고 있다면 중생마다 그 수준이나 깨닫는 정도가 다 똑같아야 할 텐데, 어째서 믿음이 있는 중생이 있고 믿음이 없는 중생이 있고, 먼저 깨닫고 나중에 깨닫는 등 중생의 수준에 무수한 차이가 있는가? 또 중생의 마음 속에는 이미 진여가 존재한다면 자기 마음 속에 진여가 있다는 사실을 굳이 특별히 노력이 없어도 알 수 있어야 하고 다같이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에 이르러야 되는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해서 모든 중생들이 진여를 똑같이 타고났기 때문에 본래 평등하다면 무엇 때문에 중생의 수준이 영리하고 둔하고 올바르고 삿되고 믿음,불신 등 제각기 다른가? 또 중생들이 똑같이 자기 안에 있는 진여를 익혀서 발심한 것이라면 당연히 다같이 똑같이 수행하고 똑같이 깨달아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왜 차이가 있는가?
진여는 본래부터 성인에게 있는 것이나 범부에게 있는 것이나 똑같이 동일하지만, 성인과 범부가 가지고 있는 어리석음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는 평등했던 성품에 차이가 생겨난 것이다.
즉 어리석음으로 인해서 일어난 탐진치,거만,의심,약견의 근본무명과 이로 인한 분노,원한,위장,고뇌, 질투,인색,아첨,들뜸,게으름, 불신 등 항하의 모래보다 많은 번뇌가 본래 똑같이 깨끗하고 순수한 진여에 물들이는 오염의 정도가 다르다는 말이다. 그로 인해서 일어나는 인지적,정서적 장애도 다르기 때문에 중생들 사이에 깨달음의 정도와 수준에도 무수한 차이가 있게 된 것이다. 오직 무명에 오염되지 않는 진여와 완전하게 하나가 된 여래만이 그 차이를 알 수 있다. 또 모든 부처님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모든 현상에는 내적인 직접 원인(因)과 외적인 간접적 조건(緣)이 있다.
이 두 인과 연이 갖추어져야 현상이 이루어질 수가 있다. 이를테면 나무에 있는 불이 붙는 성질은 내적인 원인이다. 그러나 만일 사람이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불을 붙이는 도구를 마련하지 않았다면 나무가 저 혼자서 자기를 태울 수는 없는 일이다.
중생도 내적인 원인(因)으로써 작용하는 진여를 익히는 힘이 있지만 만약 모든 부처,보살, 선지식 등을 인연으로 만나서 그들로 하여금 외적인 조건(緣)으로 삼지 못한다면 중생이 스스로 번뇌를 끊고 깨달음에 들어갈 수가 없다. 또 외적인 조건은 있지만 안으로 진여를 익힐 만한 힘을 아직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이라면 또한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깨달음을 즐겨 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만약 깨달음에 필요한 인연이 갖추어진 사람이라면 안으로는 스스로 익히는 힘이 있고 또 밖으로는 모든 부처, 보살등의 자비와 보호를 받기 때문에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킬 것이다. 그리고 자기 안에 이미 깨달음의 종자가 있음을 믿고 선근을 닦아 익히며 선근을 닦는 일이 성숙해지면 모든 부처님과 보살이 가르치는 진리를 이해하고 실천하여 이익을 얻고 기뻐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점차 깨달음의 길로 향할 수 있는 것이다.
[설명]
누구든지 깨달음의 종자, 즉 불성,진여, 진리, 완전한 지혜를 자기 내면에 이미 갖추고 있다. 그렇게 때문에 누구나 본능적으로 자기를 이익되게 하고 행복하고 성장하는 길로 나아간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오히려 자기를 파괴하고 망치는 길로 나아간다. 또 똑같이 노력하지만 더 지혜롭게 성장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모든 인간은 부처와 똑같은 불성과 지혜를 가지고 있고 본질적으로 절대평등하고 동등하며 중생이 바로 부처라는 가르침이 뭔가 모순되게 느껴지고 믿기 어려울 때가 있다.
위에서는 그런 의문에 대해서 답하기를 우리 모두는 완전히 동일한 지혜, 진여를 가지고 있지만 어리석음의 정도가 제작기 다르기 때문에 깨달음의 정도나 정신적 수준에 차이가 있다고 한다. 즉 지혜의 차이가 아니라 무지의 차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달음의 문제는 지혜를 얼마나 성취했느냐가 아니라 무지를 얼마나 제거했느냐에 초점을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서광스님 지음<현대 심리학으로 풀어 본 대승기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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