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0. 13. 18:33ㆍ성인들 가르침/금강경
무한진인의 금강경 이야기(22)
제10分 莊嚴淨土(장엄정토)
佛告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昔在燃燈佛所 於法有所得不 不也世尊
불고수보리 어의운하 여래 석재연등불소 어법유소득불 불야세존
如來在燃燈佛所 於法實無所得
여래재연등불소 어법실무소득
須菩提 於意云何 菩薩 莊嚴佛土不 不也世尊
수보리 어의운하 보살 장엄불토불 불야세존
何以故 莊嚴佛土者 則非莊嚴 是名莊嚴
하이고 장엄불토자 즉비장엄 시명장엄
是故 須菩提 諸菩薩摩訶薩 應如是生 淸淨心 不應住色生心
시고 수보리 제보살마하살 응여시생 청정심 불응주색생심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無所住 而生其心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 응무소주 이생기심
須菩提譬如有人 身如須彌山王 於意云何 是身爲大不 須菩提言
수보리비여유인 신여수미산왕 어의운하 시신위대불 수보리언
甚大世尊 何以故 佛說大身 卽非大身 是名大身
심대세존 하이고 불설대신 즉비대신 시명대신
제10분 정토를 꾸미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옛적에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법을 얻을 바 있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연등부처님 처소에 계실 적에 어떤 법도 얻으신 바가 없습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보살이 불국토를 장엄했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곧 장엄이 아니라, 그 이름이 장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수보리야, 모든 보살 마하살은 마땅히 이와같이 청정한 마음을 낼지니, 마당히 형색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내어야 하고, 소리,냄새,맛,감촉,마음의 대상에도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내어야 한다.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 수보리야, 비유하건대 마치 어떤 사람의 몸이 수미산만 하다면 네 생각은 어떠한가? 그 몸을 크다고 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매우 큽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는 몸 아닌 것을 이름하여 큰 몸이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10分을 소명태자가 장엄정토(莊嚴淨土)라고 제목을 붙혔읍니다. 여기서 정토(淨土)는 불국토라는 뜻과 같습니다. 즉 장엄정토란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은 고요한 상태에서 전체가 그대로 일체로써 드러나는 것으로서, 마음이 청정한 공(空)에 안정되게 이르렀을 때를 장엄정토라고 말할 수 있읍니다.
그런데 진정한 장엄정토를 이룬다는 것은 정엄정토를 이룬다는 생각조차 없어야 진정한 장엄정토를 이루는 것이라고 부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제9분에서는 소승의 성문사과(聲聞四果)인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의 과위(果位)에 들어간 사람은 실제로는 아무 것도 얻은 바가 없음을 말하였고,
이번 제10분에서는 대승보살의 지위에서도 얻는 것이 본래 없음을 밝히기 위해서 부처님 자신의 태곳적 전생을 예를 들어 보여주고 있읍니다.
이것은 본래 얻을 것이 없음을 얻는 것이 진실로 얻는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옛적에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법을 얻을 바 있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연등부처님 처소에 계실 적에 어떤 법도 얻으신 바가 없습니다."]
여기서 우선 여러 경전에 공통으로 나오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에 관련된 설화 중에서 연등부처님과 관련된 이야기를 좀 소개해 보겠읍니다.
이들 경전들에 의하여 석가모니 부처님은 과거 91만겁전 인행(因行)을 닦고 있을 때에 연등부처님에게 수기(受記, 예언)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읍니다. 즉 연등부처님께서는 꽃을 공양하는 선혜비구에게 장차 사 아승지 십만겁 후에 석가모니 라는 부처가 될 것이라고 예언을 내리셨다고 합니다.
과거 91만겁 전에 선혜비구가 연등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는 장면을 잠시 보겠읍니다.
어느 때에 선혜라는 젊은 수행자가 있었읍니다. 생사의 진흙탕 속에서 방황하던 그는 어떤 계기로 자신과 세상을 구원하고자 크게 발심하여 마음을 깨칠 것을 결심하였읍니다. "내가 부처되어 이 세상에서 고통받고 있는 모든 중생들을 단 한생명까지 구원하리라."
젊은 선혜행자는 부지런히 일을 하고 받은 보수를 아껴서 은전 오백냥을 뫃았읍니다. 이때 연등부처님께서 이 나라에 오시어, 왕과 백성들이 꽃을 바쳐 공양하였읍니다. 선혜행자도 이 소식을 듣고 꽃을 사려고 하였으나 구할 수가 없었읍니다.
꽃을 찾아 거리를 헤메다가, 한 궁녀가 푸른 연꽃 일곱송이를 감추어 가지고 가는 것을 보고, 사정사정해서 은전 오백냥을 주고 다섯송이를 샀읍니다.
이때 연등부처님께서 거리를 걸어 오시니,선혜행자도 시민들과 함께 푸른 연꽃을 들어 받치었읍니다. 마침, 그때 연등부처님께서 걸어가시다가 진흙탕에 이르셨읍니다. 이 모습을 본 선혜는 입었던 사슴가죽 옷을 벗어 지흙탕의 바닥에 깔고 그것으로도 부족하자 자기 몸을 엎드려서 머리카락을 풀어서 길을 만들었읍니다.
이때에 연등부처님께서 선혜행자를 향하여 찬탄하였읍니다.
"아, 장하다, 선혜야 ! 그대의 보리심은 참으로 갸륵하구나, 이처럼 지극한 공덕으로 그대는 오는 세상에 결정코 부처가 되리니, 그 이름을 석가모니라 부르리라."
위와같은 내용이 바로 연등부처님이 선혜행자에게 석가모니 부처님이 되리라는 수기를 주시는 이야기입니다.
부처님이 물었읍니다. " 수보리야 여래가 옛적에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법을 얻은 바 있느냐?"고 물으니,
수보리가 대답하기를 " 여래는 어떤 법도 얻은 바 없읍니다." 라고 말했읍니다.
여기서 법(法)을 얻었느냐고 물어 본 것은 어떤 가르침이나 깨우침을 얻었느냐고 물어 본 것입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연등부처님이 선혜행자에게 수기를 주었을 당시에 선혜행자가 석가여래가 될 것이라는 예언의 말에 조금이라도 마음이 움직였겠느냐?고 물어 본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랬더니 수보리의 대답이, '어떤 법도 얻은 바가 없읍니다'라고 대답을 했는데,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어떤 법도 얻지 않았다고 수보리는 생각합니다."
이렇게 표현해야 되겠지요. 즉 수보리 생각에는 옛적에 연등부처님에게서 선혜행자에게 수기를 줄 당시에 선혜행자는 어떤 예언을 받았다는 생각도 전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부처님의 말씀하시려는 뜻을 미리 파악해서 그대로 부처님의 뜻에 맞추어 대답하는 것입니다.
즉 그 당시에 부처님은 아무 생각도 안했다는 것입니다.
만일 부처님(선혜행자)이 연등부처님에게서 장차 위대한 석가부처가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가슴이 벅차서 마음 속으로 기뻐했다면, 나중에 석가부처가 될수도 없었다는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당시에 그런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연등부처님에게 수기받은 사실이 그대로 실현됬다는 것입니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깨달은 여래의 비이원적 입장에서 보면 사실 옛적 이야기인 위의 연등부처님과 선혜행자, 그리고 부처님과 수보리, 이 모든 사람은 따로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모두가 일체인 것입니다. 과거와 지금이 하나입니다.
수기를 준 연등부처님이나 수기를 받은 선혜행자나,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석가부처나 수보리나, 또한 이 글을 타자치고 있는 무한진인이나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이나 다 같은 일체심이므로, 어떤 주고 받는 것도 없고, 얻을 것도 버릴 것도 없는 것이죠.
즉 법이란 스승에 의해서 보여지기는 하지만,그렇다고 그것을 서로 주고 받는 것도 아니며, 그것은 항상 누구에게나 바탕에 공통으로 항상 가지고 있는 것이므로, 자기가 항상 지니고 있다는 것임을 자각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 자성은 본래 청정하고 고요하되 항상 자기에게서 비추고 있음을 깨달으면 무엇인가 닦는다는 행위없이, 또한 얻는 바 없이, 있는 그대로가 성취되어 있는 것임을 스스로 확신하는 것입니다만, 그렇다고 무엇인가를 얻었다고 말할 수가 없읍니다.
마치 햇빛이 온 누리에 밝게 비쳐서 끝이 없으나 가히 햇빛을 자기가 가질 수는 없는 것과 같다고 육조 스님은 표현하고 있읍니다.
경허선사 오동송에 <사방을 둘러봐도 사람이 없으니, 이 법을 누구한테 전하랴>라는 구절이 있읍니다. 깨닫고 나니 사방을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다는 뜻입니다.
아무도 없어야 제대로 깨달은 소식이라고 말할 수 있읍니다.
부처님이 세상에 나와서 첫마디가, 한 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은 땅을 가리키시며, '천상천하에 오직 나 홀로 있도다 !'라고 한 상징적인 이야기가 바로 경허선사의 '사방을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으니, 이 법을 누구한테 전하랴'라는 오도송과 같은 뜻입니다.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는 데, 전해 줄 것이 무엇이 있으며, 전해 줄 사람이 어디에 있겠읍니까?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보살이 불국토를 장엄했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곧 장엄이 아니라, 그 이름이 장엄이기 때문입니다."
육조 혜능스님은 위의 문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읍니다.
" 불국토가 청정해서 모습도 없고 형상도 없으니 무슨 물건으로 장엄하겠는가.
오직 정(定)과 혜(慧)의 보배를 거짓으로 장엄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장엄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제1장엄은 세간불토(世間佛土)로서 절을 짓고, 경전을 편찬하고, 보시공양하는 것이 그것이고, 제2 장엄은 신불토(身佛土)이니 모든 사람을 볼 때 널리 공양하는 것이고, 제3 장엄은 심불토(心佛土)이니 마음이 청정하면 곧 불토가 청정해서 생각 생각에 얻는 마음을 행하는 것이 이것이니라"
보살이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말은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은 고요한 상태에서 전체가 그대로 일체로써 드러나는 것으로서, 마음이 청정한 공(空)에 안정되게 이르렀을 때를 장엄정토라고 말할 수 있읍니다.
이것이 불국정토(佛國淨土,청정한 마음국토)를 건설한다는 뜻이며,
보살이 불국토를 장엄했느냐고 물은 것은 '모든 중생들을 보살이 깨끗한 마음(淨心)이 되도록 구제했느냐?'고 물은 것입니다.
즉, 중생들을 제도하여 깨끗한 본마음의 정토(淨土)를 장엄했느냐고 묻고 있읍니다. 이에 수보리는 " 아닙니다. 왜냐하면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곧 장엄이 아니라, 그 이름이 장엄이기 때문입니다."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수많은 절을 건설하며 불사(佛事)를 짓든, 수많은 경전을 번역출간하여 많은 사람이 법을 알게끔 하든, 무지한 중생들을 제도하여 깨끗한 정심(淨心)을 드러내게 하든 간에, 여하튼 주,객의 이원적 시공현상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그런데 보살이 이렇게 불국정토 사업을 하면서 '내가 지금 불쌍한 중생을 구제하고 있다' 또는 '내가 청정한 부처님 나라를 건설하고 있다'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주,객 이원적인 중생마음으로 행하는 것이므로 보살의 진정한 불국정토를 장엄한다고 말할 수가 없읍니다.
보살이 의도적으로 무엇을 한다는 생각이 없이, 그 일과 일체가 되어 주객의 관념없이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아야 비로소 보살이 진정한 불국정토를 건설하고 있다고 볼 수가 있읍니다.
보살이 정토를 만든다는 것은 바로 속세의 중생들을 진여의 깨달음으로 향하도록 제도하면서도 자기가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전혀 없이 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겉으로 나타난 실적만을 보고 보살의 장엄정토가 진실한 장엄정토라고 생각하느냐? 라고 묻고 있습니다.
그러니깐 수보리는 그렇게 보살이 장엄정토한다는 것은 진짜로 장엄정토하는 것이 아니라, 이원적인 상대성의 이름일 뿐입니다, 라고 대답을 합니다.
즉 거울 면에 비추어진 반사 그림자라는 말입니다.
진짜로 장엄정토하는 것은 모양없고 알 수 없는 반야(모양없는 거울면)일진데, 이렇게 이원화로 반사되어 보이는 그림자같은 내용들이 장엄정토라고 말할 수 있겠읍니까,식으로 수보리가 대답하는 것이죠.
따라서 장엄정토라는 말이 나오기 이전의 상태(거울면)에 대하여 표시 안나게 손가락으로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즉, 중생과 보살이 따로 따로 분별되어져서, 보살이 중생을 제도해서 장엄정토를 건설한다는 그런 것은 없다 이겁니다.
중생이 따로 있고, 보살이 따로 있어서 제도하고 제도받는 그런 정토장엄은 따로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이미 한가지로 동일하게 정토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죠.
따라서 환상의 그림자처럼 겉으로만 보살이 정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말로만 그렇다는 것입니다.
원래부터 보살의 장엄정토는 이미 완전하게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또 무엇인가 더 해야 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수보리의 대답 속에 들어 있는 말없이 암시하는 가르침이 바로 원래부터 이 세계 모두가 장엄정토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보살이 불국정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바로 불국정토를 장엄하는 것이 아니므로, 불국정토를 장엄한다는 말로 표현한다고 말하고 있읍니다.
이 문장 속에 말 이전의 배면(背面)에서 말없이 비추고 있는 반야(앎)의 모양없는 거울면이 있읍니다. 스스로 찾아 보십시오.
-무한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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