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7. 23. 19:56ㆍ성인들 가르침/금강경
* 무한진인의 금강경 이야기(3)
먼저 1,2회에 걸쳐서 금강경의 제2분 선현기청분(善現起請分)에 있는 수보리가 부처에게 하는 첫번째 질문과 답변 내용에 대하여 나름대로 간단한 설명을 소개했읍니다.
그런데 처음에 1회에서 부처님의 답변 중 <아뇩다라삼보리심을 내려면 마땅히 이와같이 머물고, 이와같이 마음을 항복시켜야 한다>라는 내용에 대하여 <그 의문자체에 머무르라>는 말씀이라고 설명한 내용에 대하여, 몇 사람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일개 공부인이 금경경의 순수하고 숭고한 본뜻을 거슬리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함부로 하고 있다고 거친 항의를 본인에게 해와서, 원래 기획하고 있던 금강경의 새로운 해석을 시작도 하기 전에 저항을 받게 되었읍니다. 이러한 몇몇 사람들의 항의를 무시하고 그냥 제가 계획했던 그대로 밀고 가려다, 그래도 금경경에 대하여 굳굳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공부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실망하지 않도록 나름대로 보듬어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어서 다시 1회의 내용을 고쳐서 간단하게 핵심만 단축하고, 2회에는 금강경의 말씀 자체를 여래(如來)로서 굳게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 임시로 대안(代案)적인 답변으로써, <이와같이 머물라>라는 말이 바로 "여래 자신과 같이 머물라"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읍니다.
한마디로 2회는 금강경 자체가 수행방편이 아니라, 깨달음 그 자체의 본모습이라고 믿고 있는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을 안심시켜 주기 위해서 임시 방편으로 딸랑이(?)를 흔들며 얼러주기 위한 말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제 1회의 <의문 자체에 머무르라>는 해설과 제 2회의 <여래 자신처럼 머무르라>는 해설은 내용이 다른가?
겉으로 보기에는 그 내용이 전혀 다르게 보일수도 있읍니다. 그러나 자세히 따져 보면 결국은 똑 같은 내용입니다.
제 1회는 방편적인 측면에서 말한 것이고, 제 2회는 본질적인 측면에서 이야기한 것으로, 제 2회의 <여래와 같이 머물라>라는 대답은 결국은 <여래의 상태는 어떤 것인가?> 라는 의문으로 되돌려 질수 밖에 없는 것이죠.
아무리 학식이 높다는 사람에게 물어 보십시오.
"여래의 상태처럼 머무르라는 것이 어떻게 머무르는 것입니까?"라고 물으면 이 세상에 아무도 대답할 사람이 없읍니다.
만일 어떤 대답이 나온다면 그것은 입을 떼자마자 벌써 여래의 상태와 멀어지는 것이죠.
제 1회는 구도자가 항상 지니고 있는 그 의문 자체를 그대로 지니라고 지적한 것이고, 제2회는 구도자가 여래에 대한 믿음을 지니고 한바퀴 돌아서 여래의 상태로 머무른다는 것이 과연 어떻게 머무르는 것인가?라는 의문으로 되돌아 올 수밖에 없읍니다.
결국은 제1회의 이야기 내용과 제2회의 이야기 내용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가는 내용이 아닙니다. 같은 방향으로 가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제1회에서 여래의 <이와같이 머무르고 이와같이 마음을 항복시키라>라는 대답에 대하여 <어떻게 마음을 머무르게 하며, 어떻게 마음을 항복시킵니까?>라는 수보리가 일으킨 <그 의문자체에 그대로 머물고, 의문자체로써 마음을 항복시키라>라는 내용으로 앞으로 금강경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겠읍니다.
그런데 수보리가 여래의 이 대답을 이해를 못했는지, 아니면 이해를 했지만, 다른 선남선녀의 구도자들을 위해서 다시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 달라고 말했는지는 몰라도
"참 그렇습니다. 세존님 즐거이 듣기를 원합니다.(唯然 世尊 願樂欲聞)"라고 세존에게 다시 설명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그래서 다음에 나올 제 3분에서는 "어떻게 마음을 항복 받을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답변이 나오고, 이어서 제 4분에서는 "어떻게 마음을 머물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해서 아주 직접적으로 예시를 들어가며 실천적인 답변을 해 줍니다.
이 3분,4분 내용만을 자세히 들여다 보아도 제 1분에서 여래가 대답한 <이와같이 머물고, 이와같이 마음을 항복시키라"는 내용이 그 수보리의 <전혀 알수없는 의문 그 자체 속에 머무르라>고 말씀하신 것을 누구나 쉽게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제3분으로 들어가기 전에 구도자가 누구나 지니고 있는 그 <의문> 자체가 어떤 작용을 하며, 그 의문상태를 유지하면 어떻게 자성의 깨달음으로 가는 문이 되는지를 좀 더 이야기해 보아야 겠읍니다.
금강경의 이 제2분의 수보리 첫 질문과 부처님의 대답하는 문장에서 아마도 선불교(禪佛敎)가 태동하지 않았나 하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어떤 책자나 선사의 글에서도 이 금강경의 첫 문답에서 조사선이 태동했다고 언급한 것은 보지 못했지만, 여하튼 금강경은 선불교의 시조격인 달마조사 이전부터 있었던 경전이고, 육조 혜능이래 선불교의 소의경전으로 채택된 이유가 바로 이 제2분 단 두마디 질문과 답변 내용에서 그 뿌리를 찾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저의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일반적으로 모르는 문제를 풀 때에, 즉 어떤 문제에 대하여 의문을 가질 때는, 기존의 알고 있었던 지식과 새롭게 대면하는 모름이 서로 부딪치면서 의문이라는 의식의 움직임이 생깁니다. 안다는 것은 기존에 익숙한 것이지만, 모르는 것은 낯선 것이고, 기존에 안다는 것은 일정한 어떤 익숙한 패턴과 방향으로 의식이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습관이 있는데, 새롭게 모르는 것은 의식의 방향이 거슬러서 반대로 흐르므로, 앎의 흐름과 모름의 흐름이 서로 부딪쳐서 의문이라는 의식의 특수한 소용돌이 현상이 생깁니다.
계속 의심을 하면 소용돌이가 돌아가지만 대부분은 내면에 있는 여러가지 생각과 견해와 잠재의식들이 밖으로 수시로 튀어나오면서 서로 조합하고 화합하면서 상상물과 창조물이라는 잠재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던 종자의식들이 서로 서로 조합하여 새로운 답을 수시로 만들어 냅니다.
이것이 인간사회에서 수많은 학문의 분화와 과학기술,예술로 발전되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읍니다.
한편 이 의심이 밖으로 현상화되는 어떤 답을 바라거나 구하지 않고, 오직 내면 속으로 모름 속에서 마음을 전체적인 의문 상태만 유지지키고 있으면 그것이 현상을 초월하는 신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며, 신비한 절대본성의 바탕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 이 금강경에서 가르치는 요지입니다.
이것은 또한 중국에서 생성된 선불교의 조사선의 원류라고 볼 수가 있으며, 그 후에 발달된 간화선의 모태가 된다고 볼 수가 있읍니다.
금강경이 선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소외경전이 된 것도 아마도 이런 이유가 숨어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읍니다.
구도자가 자기 본래적인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계속 강하게 유지하고 있으면, 어떤 의식의 작용 원리로 의식 내면 속으로 깊게 들어가는지에 대하여는 기존에 부로그에 작성한 <간화선에서 "화두의심"의 구조적 작용원리>라는 글에서 이야기한 바 있으므로 참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실예를 들면 <절대진아를 깨치기 위해서는 어떻게 마음을 머물것인가?>라는 의문 그 자체는 두 가지 방향으로 마음이 작용합니다.
하나는 내면에서 어떤 방편적인 아이디어 또는 관념적인 답변이 떠오를 수 있으며, 계속 마음 속에서 상상과 추론이 돌아갑니다.
이 경우는 이원화적이고 관념적인 답변을 인출해 냅니다.
또 하나는 의문 자체를 전혀 알 수 없는 깊은 상태로 그대로 유지시킵니다.
이 경우는 마음의 주의가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내면으로 향해 있기 때문에 의문으로 마음은 계속 회전하며 움직이지만, 항상 의문의 중심에만 머물러 있어서 다른 외부 대상에 마음을 뺏기지 않는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기존의 이미 알고 있는 것은 의심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존에 알고 있었던 지식과는 전혀 생소하고 다른 모르는 것은, "왜 그런가?"라는 의문이 일어납니다.
깨달음을 향한 근본적인 의문에서 그 구조를 살펴 보면 통상 자기가 살아서 깨어있다는 기본적인 존재앎이 바탕에 항상 있읍니다.
이러한 당연한 앎 상태에서 절대 본성이라는 낯선 것은 이 그 앎을 넘어서 있기 때문에 존재앎의 상태에서는 전혀 모르는 것이고, 존재앎 범위내에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며 , 앎이라는 의식의 흐름과 절대본성에 대한 모름이라는 의식의 흐름이 서로 반대방향으로 흐르는 의식의 흐름이므로, 앎과 모름이 서로 부딪치면 앎과 모름이 뒤섞인 의문의 역동적인 소용돌이 흐름이 생깁니다.
이것이 바로 의심의 상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의심이란 앎도 아니고, 모름도 아니며, 또한 앎이기도 하고 모름이기도 하는 묘한 앎과 모름이 뒤섞여서 움직이는 상태가 됩니다.
이 계속 회전하는 의문의 소용돌이 의식 중심은 전혀 움직이지 않는 침묵상태(絶對空)에 있읍니다.
말하자면 흐르는 개울물의 작은 소용돌이 중심,회오리 바람 중심부, 태풍의 눈, 불랙홀을 중심으로 회전운동을 하는 전 은하계 등, 과 같은 의식의 역동적인 회전 움직임의 중심 속에는 움직임 없는 바탕의 공(空)상태가 있읍니다.
그런데 구도자가 목적하는 것은 이 의문의 소용돌이 중심의 공(空) 바탕에 안정적으로 머무르는 것이며, 그 중심에 머무르면 "나"라는 느낌이 사라지고, 전체와 합일이 됩니다.
그래서 이 의식의 소용돌이 전체상태는 "움직이되 움직이지 않는 상태"라고 할 수 있으며, 그 유명한 "머뭄바 없이 머문다"는 말은 바로 이 의문의 소용돌이 중심에 안정적으로 머문상태를 표현한 말이라고 여겨집니다.
어떤 계기로 근본적인 의문 그 자체가 갑자기 일어나는 찰나엔 모든 다른 마음의 움직임이 순간적으로 딱 끊어지고(중심의空에 합일) 전체 바탕의식에 순간적으로 계합 되지만, 지극히 찰나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보통사람은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이고, 항상 바짝 깨어서 자각상태를 유지하는 사람만이 간혹 그 찰나의 공(空) 순간에 계합한다는 것이죠.
위에서 질문한 수보리에게 부처님이 의문 그 자체를 즉각 되돌려 지적해 준 순간에 수보리의 즉각적인 돈오 깨침이 와야 되는데, 수보리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질문한 것이므로 그 답변에 반응을 안한 것 같습니다.
라마나 마하리쉬의 "나는 누구인가?" 묻는 자아탐구법도 이러한 의문을 자기내면속으로 계속 깊히 깊히 몰고 가서 "나"라는 의식이 존재의식의 중심 핵점 속으로 합일되는 원리라고 볼 수가 있읍니다.
이런 원리가 금강경 첫번째 문답에도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다음 3분에서는 구도자가 개인이 아닌 전 우주적 자아입장에서 대승적으로 전체를 포용하는 마음으로 삼매로 들어가 제8 아뢰아 저장식에 있는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과 온갖 관념의 종자의식,씨앗의식들을 완전히 소멸시켜야 된다는 내용에 대하여 설명해 보겠읍니다.
-무한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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