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도덕경 58장, 성인은 밖으로 빛을 드러내지 않소.

2011. 7. 24. 20:21성인들 가르침/노자도덕경

 

 

 

[무한진인의 노자도덕경 해설 58회]

 

[한문 원문]

其政悶悶 其民屯屯

기정민민  기민둔둔

其政察察 其邦夬夬

기정찰찰  기방쾌쾌

 

禍, 福之所倚  福, 禍之所伏

화, 복지소의    복, 화지소복

孰知其極

숙지기극

其无正也

기무정야

 

正復爲奇 善復爲妖

정복위기  선복위요

人之迷也 其日固久矣

인지미야  기일고구의

 

是以方而不割 廉而不刺 直而不肆  光而不燿

시이방이불할   염이불자  직이불사    광이불요

 

[한글 해석] 

나라의 다스림이 흐리멍덩하고 어리숙하면,

백성들은 무리 무리로 떼 지어서 모이게 되고,  

 

나라의 다스림이 지나치게 빈틈없이 세밀하면

그 나라는 갈갈이 나눠지게 되는 것이오. 

 

화는 복이 의지해 있는 곳이고,

복은 화가 바탕에 깔려 있는 곳인데, 

누가 이 움직임의 끝머리을 알겠소이까? 

 

이것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오. 

 

바른 것이 기괴하게 변해서 돌아오고,

선한 것이 요사스럽게 변해서 돌아오는데, 

사람들이 (이 변화하는 겉모습에만)  미혹되어 있는 것이

이미  오랫동안 굳어져 있는 것이오. 

 

이때문에 (성인은)

스스로는 단정하게 모가 나 있지만 (흐트러져 있지 않지만)

남을 자기 기준에 억지로 뜯어 맞추려고 하지 않으며,

 

스스로는 청렴하지만

남의 결점을  비판하지 않고,

 

스스로에게는 꼿꼿하면서도

남에게는 거만하게 행동하지 않으며,

 

지혜의 빛을 지니고 있지만

밖으로는 빛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오. 

 

 

[해 설]

본 58장은 제일 오래되었다는 곽점본에는 없고, 백서본(21장)과 왕필본(58장),기타본에는 있읍니다.

발굴당시 백서본에 기재되어 있는 원래 한문글자와 그 글자를 전문학자들이 재해석해서 정리한 백서본 정리조의 한문글자가 다소 차이가 나는데, 이 다른 글자의 뜻으로 해석한 결과자체가 오히려 오역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 같읍니다. 

또한 왕필본에서는 몇글자가 바꾸어져 있으므로,

여기서는 가능한 원래 백서본 원본글자를 일부 그대로 적용해서 해석해 보았읍니다.

 

전체내용은 모든 현상은 고정된 것이 없이 항상 변함으로,

그 변하는 현상자체에 집착하여 이끌려 다니지 말고,

그 변화하기  이전의 드러나지 않은 내면에 안정되게 머무르라는 가르침입니다. 

또한 겉으로는 상대적인 양변 중 한쪽에 고정되어 머물지 말고, 상황에 따라 자유자재하게 주변과 조화를 이루어 가며 적응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전체내용을 대략 소개해 보면,

나라를 다스리는데 너무 흐리멍덩하게 하면 백성들이 끼리 끼리 모여서 무리로 나눠질 수가 있고,

너무 과도하게 참견하거나 세세하게 제약을 한다면 나라가 갈갈이 찟어질 수가 있다고 말하고 있읍니다.

그래서 너무 흐리멍덩하게 하지도 말고, 그렇다고 과도하게 제약하거나 세세하게 참견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면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충고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현상이 그렇지만 대표적으로 복은 화의 바탕에 의지해 있고,

화는 복속에 숨어 있는 것처럼, 모든 일은 항상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으므로, 어느 한편에 기울어져서 집착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나라를 다스림은 어떤 기준원칙이 없이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자유자재하여 양변에 머물지 말고, 조화롭게 대처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어제는 옳다고 여겼던 행위가 오늘은 괴상하게 여겨지게 되고,

어제는 착하게 여겨지던 것이 오늘은 사악하게 여겨질 수가 있는데도,

사람들은 오랜세월동안 겉으로 나타나는 반쪽 현상에만 집착하는 잠재적 습에 젖어 있으므로,

그것이 잘못된 줄 아는 사람일지라도 그 당장 보이는 겉모습에 끌려다니는 상황에서 쉽게 벗어나질 못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양변에 머물지 말고 조화롭게 자유자재하라는 충고입니다.

이런 양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성인의 행동을 본받아야 한다고 암시하고 있읍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성인은 스스로는 안으로 도에 대해서 단정하고 모진 마음자세이지만, 밖으로는 다른 사람에게 자기기준에 맞추도록 강요하지 않으며,

안으로는 스스로 청렴한 자세를 가지고 있지만, 밖으로는 남의 결점을 비판하지 않고,

안으로는 스스로 도에 대해서 꼿꼿한 지조를 지키지만, 밖으로는 남에게는 자만심을 내세우지 않으며,

안으로는 순수하고 밝은 지혜의 빛을 지니고 있지만, 밖으로는 함부로 지혜를 드러내지 않으므로, 남에게 숭배받기를 피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문장 별로 해석에 들어가 보겠읍니다.

 

其政悶悶 其民屯屯(기정민민  기민둔둔) ;

나라의 다스림이 흐릿하면,백성들은 무리무리로 떼지어 모인다. 

政: 다스리다. 悶; 답답하다,혼미하다,어둡다. 屯;무리로 모인다,진치다,어렵다.

 

[其政悶悶]에서 <悶>자는 원래 오래된 백서본의 글자 모양은 <門>자 가운데에 <幺>자가 들어가 있는 한자인데, 백서정리조에서는 이것을 <閔閔>으로 해독했지만, 그 뜻이 잘 맞지가 않으므로, 어떤 백서본 해석서는 그 백서본 정리조의 뜻에 맞추어, 얽힐 문 <紊>자로 바꾸어서 해석한 책도 있읍니다. 

<其政紊紊>으로 해석하면 "나라의 다스림이 어지러우면"이라고 해석이 됩니다.

해석상으로는 <紊紊>의 "어지럽다"는 뜻도 적절하긴 합니다만,

그러나 여기서는 왕필본에서 쓴 <悶悶>으로 "다스림이 흐릿하다"는 뜻으로 해석을 했읍니다.

<其政紊紊>보다는 <其政悶悶>이 오히려 그 다음 문장인 <其政察察>과 상대적인 뜻으로 더 대비되기 때문에 <其政悶悶>으로 선택해서 해석을 했읍니다.

 

[其民屯屯]에서 <屯屯>은 대부분의 해석서들이 <어렵다>라는 뜻으로 "백성들이 어려워진다"라고 해석을 했읍니다만,

여기서는 "백성들이 무리 무리로 모인다"라고 해석했읍니다.

진칠<屯>자는 그 주요 뜻이 "사람들이 한군데 모여서 진을 치다"라는 뜻이 있으며, 동시에 "어렵다"는 뜻도 있읍니다.

이문장을  "백성들이 어렵다"고 해석을 하게되면 다음문장과 대조를 이루는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다음 문장과 반대되는 뜻의 "무리로 모인다" 라고 해석을 했읍니다. 그러나 다음 문장은 '나라가 갈갈이 갈라진다'로 해석되므로, 결국은 두문장이 비슷한 의미로 해석이 됩니다.

 

나라의 다스림이 너무 느슨해서 조정에서 방관하는 자세로 놓아 버린다면,

일반백성들이 왜 무리 무리 떼지어 모일까요?

일반백성들을 보살펴야하고 보호해야 할 조정에서 보살핌에 무관심하다면,

각 고을 또는 마을이나 씨족마다 자치적으로 힘을 뫃아서 스스로의 생존을 지키고 자기 무리들끼리만 힘을 합쳐야 되겠죠.

따라서 나라를 다스리는 데 너무 백성들에게 자유를 주어 방관하는 것도, 조정을 중심으로 백성들을 하나로 모으지 못하고 무리 무리 나눠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라의 다스림이 흐릿하고 어리숙하다는 것은 노자가 항상 말하는 무위(無爲)적인 다스림이 아니라, 무능(無能)한 다스림이라고 볼 수가 있읍니다. 

무위적인 다스림은 무능한 다스림과는 달리 전체와 조화롭게 맞추어 저절로 다스려지는 것을 말합니다.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도인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는 자연과의 조화상태를 말합니다.

 

其政察察 其邦夬夬(기정찰찰  기방쾌쾌) :

나라의 다스림이 빈틈없이 세밀하면 그 나라가  갈갈이 나눠진다.

察;살피다,헤아리다,감시하다. 邦;나라, 夬;나누다,가르다,터놓다,정하다.

[其政察察]은 "나라를 다스리는데 너무 세세하게 참견하는 것이 많으면"이라는 뜻입니다.

<察察>은 백성들을 과도하게 감시하고 세세한 것까지 법으로 얽어매서 구속하는 형태를 표현한 말입니다. 백성들을 적극적으로 휘어잡는 독재적인 다스림입니다.

[其邦夬夬]는 원래 백서본에 쓰여 있는 글자인데, 백서본 정리조 학자들이 쾌<夬>자를 이지러질<缺>자로 바꾸어 읽어서 해석을 했읍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백서본의 글자 그대로 <夬>자로 써서 해석을 했읍니다.

그래서 "나라가 갈갈이 나눠진다"라고 해석이 됩니다.

두 문장을 합치면, " 나라를 다스림에 너무 세세하게 빈틈이 없으면 나라가 갈갈이 나눠진다."

왜 그럴까요?

조정에서 너무 세세하게 참견하고, 놓아주지 않고 구속하려고 한다면,

그러한 구속과 참견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반역하는 무리들이 생길 수 밖에 없고, 나라가 갈라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부분에서 백서본 정리조를 해석한 것을 보면 [其政察察 其邦缺缺]로 해석하여"다스림이 세밀하면 나라가 이즈러진다"라고 해석이 되어 있읍니다.

나라가 '이즈러지는 것'이나 나라가 '갈갈이 나뉘지는 것'이 비슷한 의미이기는 하나, 원래 한문자를 다른 한문자로 바꾸어서 해석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읍니다.

또한 왕필본의 경우는 아예 주어를 "나라"에서 "백성"으로 바꿔치기해서 필사자가 이해하는 수준으로 문장을 변형을 시켰는데, [其政察察 其缺缺]에서 백서본의 나라 <邦>자를 백성<民>자로 바꾸었읍니다.

이렇게 해서 왕필본의 해석은 '나라의 다스림이 너무 세밀하면 백성들이 각박해진다"라고 해석이 되어 얼뜬 보면 비슷한 해석같지만, 원래 노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원래 노자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나라를 다스리는데 너무 느슨하게(무능하게) 다스려도 백성들이 무리무리지어 나눠지게 되고,

너무 과도하게 독재를 해도 불평불만이 만연할 수가 있으므로 나라가 갈라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라를 유위행으로 다스리면 이렇게 해도 문제요, 저렇게 해도 문제라는 말입니다. 즉 나라와 백성이 둘 다 불안정해진다는 말입니다.

어떤 적극적인 수단을 동원하든, 또는 아예 수동적인 방관자세로 백성들에게 무관심하든, 어떤 방법을 쓰던 역효과적인 문제가 항상 발생할 소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보이는 현상세계는 항상 역동적으로 변화할 수 밖에 없읍니다.

어떤 행위를 의도적으로 하면 항상 쌍대성의 반대급부가 붙어 다닌다는 것이죠.

즉 노자는 무위적인 다스림을 설명하기 위해서 지금 유위행의 다스림이 무엇이 잘못 되었는가를 지적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즉 양변에 치우치는 유위행은 항상 그 상대적인 역효과도 함께 따라 다닌다는 것입니다.

아래 문장들이 바로 그 이유를 설명한 것입니다.  

 

禍, 福之所倚  福, 禍之所伏(화, 복지소의    복, 화지소복)

; 화는 복이 의지해 있는 곳이고, 복은 화가 숨어 있는 곳에 있다. 

 禍; 재앙,불행,불의의 사고, 福; 복,좋은 운. 倚; 의지하다,기대다. 伏; 엎드려 있다, 숨어있다.

화는 복에 의지해 있고, 복은 화의 바탕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즉, 화와 복은 양변에 붙어 있어서 화가 나타나면 복은 뒤로 숨고, 반대로 복이 나타나면 화가 밑에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름과 모양과 속성이 있는 이 현상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항상 쌍대성(양변)을 가지고 나타납니다,

어둠과 밝음,행복과 불행, 좋음과 나쁜 등등이 하나가 나타나면 그 상대적인 것은 숨어있고, 다음에는 교대로 또 반대로 나타나고 숨는다는 것입니다.

양변이 항상 변화하므로 고정된 실제성이 없다는 것이죠. 

 

孰知其極(숙지기극) ; 누가 이 궁극을 알겠는가?

화와 복이 교대로 끝없이 돌아가는데, 그 끝을 누가 볼수가 있겠는가?하고 묻고 있읍니다. 

이 현상세계의 삼라만상은 그 양변의 교차적인 변화가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其无正也(기무정야) ; 그것은 정해진 것이 없다.

이 현상세계에서는 만사가 항상 움직이며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것이므로

"이것이 그것이다"라고 고정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것이 그것이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저만치 사라져 버리고 다른것이 눈앞에 나타나 있는 것이죠.

말하자면 근세의 20세기 초에 발견된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가 노자도덕경에서는 이미 이58장의 바로 이 문장에서 그 원리를 제시하고 있읍니다. 

 

正復爲奇 善復爲妖(정복위기  선복위요) ;

바른 것이 기괴하게 변해서 돌아오고, 선한 것이 요사스럽게 변해서 돌아오는데,

옳바르다고 여기던 개념이 시대가 지남에 따라 상식에 맞지 않는 괴상한 언설이 되고,

착하다고 여기던 성품이 위선적인 가식행위로 변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겉으로 나타난 현상은 고정됨이 없이 항상 변할 뿐인데,

사람들은 그 변하는 한 순간의 모양이나 속성을 마치 고정되어 있는 것처럼 믿고 집착한다는 것입니다. 

 

人之迷也 其日固久矣(인지미야  기일고구의); 사람들이 이렇게 (변화하는 겉모습에) 미혹된 지가  오랫동안 굳어져 있었는 것이오.

사람들이 이렇게 겉으로 변화하는 일시적인 현상에 미혹된 것이 마음 속에 습관적으로 굳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항상 변화하는 겉모습으로 나타난 현상을 참(眞)이라고 착각하고 그것을 붙들려고 하니, 마치 꿈 속에서 본 보물에 집착하는 것이니 다를 것이 없는 것이죠.

그런 현상은 진리(참)가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인데, 이 무지가 습으로써 인간마음에 굳어져 버린 것이죠.

이것이 바로  인간 의식의 깊은 곳에 쌓여있는 잠재의식의 인연습라고 하죠.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그런 잠재적인 잘못된 습이 있는지 조차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는 것이죠.

이렇게 잘못된지 모르고 있는 상태를 원천적인 무지(無知) 라고 합니다. 

도를 닦는다는 것은 이 잘못된 무지상태를 빨리 스스로 분별하여, 그 무지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자각행위입니다.

이제, 무지에서 벗어나서, 도를 완성한 성인은 이러한 현상세계의 변화 속에서 어떻게 행동을 취하나 보겠읍니다. 

 

是以方而不割 廉而不刺 直而不肆  光而不燿(시이방이불할   염이불자  직이불사    광이불요) ;

이때문에 (성인은) 스스로는 단정하게 모가 나 있지만,(빈틈이 없어도)

남을 자기기준으로 맞추려고 하지 않으며,

스스로는 청렴하지만, 남의 결점을  비판하지 않고,

스스로는 곧으면서도, 남에게는 거만하게 행동하지 않으며,

스스로는 지혜가 있지만, 남에게는 지혜를 드러내려고 하지 않소.

 方;모나다. 비교하다.割;자르다,베다, 廉; 청렴하다.날카롭다,예리하다. 刺;찌르다,비난하다.直 곧다, 꼿꼿하다.肆 :방자하다,거만하다.광;빛,지혜耀 :빛나다.

 

[方而不割]에서 자기자신은 도에서 단 한순간도 흩으러짐 없이 단정하게 머물러 있지만, 남에게는 자기의 기준에 맞추라고 억지로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廉而不刺]는 자기자신은 단 한순간도 도에서 오염되지 않고 청렴하지만, 

남의 잘못된 결점을 예리하게 비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直而不肆]는 자기자신에게는 항상 엄격하게 절제하고 있지만, 남에게는 항상 겸손하게 대한다는 것입니다.

[光而不燿]는 스스로는 내면에 지혜가 빛나고 있지만, 밖으로는 그 지혜를 드러내려고 하지 않아 남에게 숭배를 받을려고 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이와같이 도를 완성한 성인처럼,

내면 마음은 주변 환경의 변화에 조금도 흔들림없이, 

항상 도의 자리에 안정되게 머물러 있으면서도, 

외부적으로는 변화하는 현상에 적절하게 조화하고 적응해 가면서 세상을 살아 가라고 이 58장에서 가르쳐주고 있읍니다.  

감사합니다. -무한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