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시슈타 요가] 라바나 이야기(4)
라마가 물었다.
그렇다면 성스러운 분이시여 !
어떻게 더 큰 동요를 일으키지 않고 힘으로 마음의 쉬지 않는 움직임을 억제할 수 있습니까?
바시슈타가 말했다.
물론, 가만히 있는 마음은 없습니다. 가만히 있지 못함은 마음의 본성입니다.
오, 라마여! 무한한 의식에 바탕을 둔 마음의 이 쉬지 않는 작용이 이 세상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오, 라마여! 그것은 정말이지 마음의 힘입니다.
하지만 마음이 그것의 쉬지 못하는 본성을 잃으면, 그것을 죽은 마음이라 일컽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경전과 해방을 입증하는 고행(따빠스)입니다.
이렇게 하여 마음이 무한한 의식에 흡수되면 지고의 평화가 있습니다.
마음이 쉬지 못하는 것을 무지라 합니다.
그것이 경향성, 성질, 조건화가 위치하는 자리입니다.
탐구를 통해, 그리고 쾌락을 주는 감각대상에 대한 생각을 확고히 버림으로써 이것을 파괴하십시오. 오, 라마여! 마음은 실재와 겉모습, 의식과 둔감한 사이를 끊임없이 시계추처럼 오갑니다.
마음이 오랫동안 둔한 대상들을 묵상할 때, 그것은 그 둔한 성질들을 가집니다.
똑같은 마음이 탐구와 지혜에 쏟아진다면, 그것은 모든 조건화를 버리고 순수의식이라는 원래의 본성으로 돌아갑니다. 마음은 본성적이든 계발된 것이든 간에, 묵상하는 것의 바로 그 형태를 취합니다. 그러므로 단호하지만 지혜롭게 슬픔 너머에 있는 의심들로부터 자유로운 그 상태를 묵상하십시오. 마음은 자신을 자제할 수 없습니다. 사실 그 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지혜로운 이들은 잠재적 경향성, 즉 단지 마음일 뿐인 조건화가 일어나면, 그들의 마음에서 그 나타남을 없앱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무지가 제거됩니다.
먼저 욕망을 포기하는 방법으로 마음의 조건화를 파괴하십시오.
조건화로부터 완전히 놓여나십시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심리적 경향성 혹은 마음의 경향성 혹은 마음의 조건화는 실재하지 않지만, 그것은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따라서 이것은 복시증을 앓고 있는 사람이 두 개의 달을 보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단순한 환영으로 간주하고 이런 경향성을 버려야 합니다.
무지의 산물은 무지한 사람에게만 실재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에게 그것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의 아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단지 언어적인 표현에 불과합니다.
오, 라마여! 무지한 상태로 있지말고, 두 번째의 달이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자 하듯이 마음의 조건화를 거부함으로써 현명해지려고 노력하십시오.
오, 라마여! 그대는 이곳에서 행동의 행위자가 아닙니다. 그런데 왜 행위자가 되려합니까?
그것 하나만이 존재하는데,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한다는 말입니까?
활동하지 않아도 역시 안됩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무엇을 얻는단 말입니까?
이뤄져야 할 것은 이뤄져야 합니다.
따라서 참나 속에서 휴식하십시오.
그대가 자연스런 행위를 할 때도 그 행위에 집착하지 않으면, 그대는 행위를 하지 않는 자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무위행에 집착하고 있다면,
그래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을지라도 그대는 행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세상이 마술사의 속임과 같다면,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추구한단 말입니까?
이 세상 나타남의 씨앗은 무지입니다.
'이것이 그것이다'로서 보이지 않는다면, 이 무지는 진리릐 자질을 가집니다!
심리적인 경향성 혹은 정신적 조건화는 세상의 모습을 만들고,
물레가 도공에 의해 계속 돌아가듯이 그것은 세상을 계속 돌릴 수 있는 힘이 됩니다.
그것은 대나무처럼 속이 비어 있고 실체가 없습니다.
강의 물결처럼, 그것은 설사 산산히 흩어진다 해도 죽지 않습니다.
그것은 움켜질 수 없습니다.
그것은 미묘하고 부드러우나 칼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록 그것이 그것 자신의 투영 안에 그것의 결과로서 지각되지만,
그것은 진리에 대한 탐구에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 조건화 때문에 창조물의 대상들 안에 차이가 보입니다.
특정 장소에 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어디에나 보입니다.
이 정신적 조건화는 지성이 나타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지성에 기초하여 지성의 모습을 띱니다.
계속해서 변하지만, 그것은 자신 안에 영원이라는 환영을 만듭니다.
무한한 의식과 유사하기 때문에, 그것은 움직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무한한 의식이 깨우쳐지면, 그것 즉 조건화는 끝이 납니다.
대상에의 집착에 의해 부양되지 않을 때, 이 마음의 조건화는 죽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집착이 없어도 그것은 잠재적으로 계속 살아 있습니다.
-스와미 벤까떼사난다 영역, 김병채 옮김 <바시슈타 요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