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 가르침/란짓트 마하리지

속박과 해탈은 생각일 뿐이지, 존재하지 않는다

무한진인 2024. 11. 20. 22:19

 

이해가 올 때는 좋은 것도 없고 나쁜 것도 없습니다.

무지로 인해 여러분은 "나는 태어났고,죽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몸은 죽지만 여러분은 죽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격정합니까?

모두가 죽음을 두려워하고, 누구도 죽기를 원치 않습니다.

에고는 죽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늘 스승과 함께 있습니다. 결코 그와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일체가 참되다" 고 말한다면.

"나 자신을 포함해서 아무 것도 참되지 않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닦아야 합니다.

집은 "나는 집이다"라고 말하지 않고, 화분은 " 나는 화분이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그 이름들을 부여하고, 그래서 여러분이 그 악마(라바나)입니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너무나 많은 악마를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어떻게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까?

라바나(에고)가 라마에 의해 죽임을 당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내가 있다"고 말할 때그 악마가 남아 있습니다.

그 악마는 여러분의 생각에 의해 존재합니다.

여러분이 존재하지 않으면 아무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는 도처에 있고 모든 사람이다."

그것이 여러분의 이해가 되어야 합니다.

 

수행하는 것조차 필요치 않습니다.

믿음도 필요치 않습니다.

바로 이순간 여러분이 입니다.

왜 더 말을 합니까?

스승이 이런 말을 하는 까닭은 여러분이 자기 자신을 잊어 버렸고, 모르기 때문입니다.

스승이 주소를 주면 여러분은 그것을 따라가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장소에 도달합니다.

그 사람은 결코 죽지 않고 결코 태어나지 않고, 결코 오고 가지 않습니다.

속박과 해탈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생각일 뿐입니다.

 

앵무새를 잡는 사람은 빈 대롱에 줄을 넣은 것을 가져가서 삼각형 모양이 되게 나무에 걸어 둡니다. 앵무새가 와서 그 위에 앉습니다. (대롱에 앉은) 앵무새는 머리가 무거워 거꾸로 떨어집니다.

그래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그것을 더 꽉 붙듭니다.

다음 날 앵무새잡는 사람이 옵니다.

그가 삼각형을 집어들면 앵무새는 여전히 그것을 붙들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새를 새장에 집어넣습니다.

그러고 나면 앵무새는 새장에 갇혀 있으면서도 이제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나는 지지대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법을 아는데도 불구하고 앵무새는 속박을 받아들입니다.

 

서양에서는 음식이 수프, 샐러드, 메일코스 식으로 단계별로 나옵니다.

인도에서는 우리가 모든 것을 동시에 내옵니다. 그것은 관습의 문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바꿀 필요는 없습니다.

그대가 좋아하는 것은 관습이나 유행을 문제일 경우가 많습니다.

인도에서는 아내가 죽으면 남편이 콧수염을 잘라야 하는 풍습이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의 아내가 죽었다는 것을 압니다.

 

그대가 일 때는 (누가 죽어도) 결코 애도하지 않습니다.

애도할 것이 아무 것도 없으니 어떻게 합니까?

과학자들은 물질이 결코 죽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저는 너무나 많은 말을 해왔는데 그 말들이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어디로 갔습니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그들은 어디로 갔습니까?

모르지요? 그들이 거기 있습니까?

 

그대는 죽기 전에 "저를 남편 곁에 묻어주세요"라고 말합니다.

그런 온갖 터무니 없는 생각들이 있습니다.

어디서 무엇을, 또는 누구를 찾습니까?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대가 시장가서 "저 자신을 팔고 싶어요"라고 하면,

누가 그대를 사가겠습니까?

 

석녀의 아들은 아무 존재성이 없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에게 무슨 이름을 붙혀줄 수 있습니까?

몸은 석녀의 아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대가 백살이 된다 해도 결코 늙지 않습니다.

그대는 늘 싱그럽습니다.

 

이런 식으로, 그대가 결코 어떤 것과도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대가 일 때는 그대가 도처에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분리의 문제도 나오지 않습니다.

분리는 몸의 분리일 뿐입니다.

그대가 자기 자신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제가 그대를 위해 이런 말을 거듭거듭 해야 합니다.

 

(유럽에서 온 한 남자가 늦게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영적인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마하리지는 그의 본명이 무엇이냐고 물는다.)

 

마하리지 : 그대의 이름 둘 다 그릇된 것입니다. 왜 성자들이 이름을 더 지어주어야 합니까?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이름 하나로 족합니다. 이름은 이름일 뿐입니다. 그 두 이름 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름이 둘이면 그대가 더 혼란스럽습니다. 그대는 최종적 실재입니다. 이름들을 왜 지어주어야 합니까?

그대는 이름이 없고 생각이 없습니다. 그대는 저에게 인도를 보여 줄 수 있습니까?

이름은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그대가 태어 날 때는 무엇이 그대의 이름이었습니까?

그대는 아무 존재성이 없는 것에 이름을 부여 합니다.

 

                                                                                     -란지트 마하리지 법문집 <幻과 實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