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자는 없다
어느날 아침, 방문객 중에는 북부 인도에서 온 철학교수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마하리지를 몇번 친견한 사람이었는데, 이 날 아침에는 약간 이름 있는 예술가 친구와 함께 왔다. 그 예술가 친구는 마하리지가 이야기하는 것에 별반 관심이 없어 보였다.
교수가 마하리지에게 질문을 던졌다.
교수 : 일전에 왔을 때 선생님의 말씀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것을 생각 할 때마다 온 몸에 전율이 일었습니다. 이야기 말미에 선생님께서는 "되돌아가는 유일한 길은 내가 도달한 길이며 다른 길은 없다." 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제 가슴에 깊이 와 닿았고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서 그 문제, 특히 그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았지만 터무니 없는 수많은 생각과 개념에 뒤엉켜 속수무책인 제 자신을 보고 말았습니다. 저는 선생님으로부터 아주 귀한 금강석을 선물 받았으나 바로 그것을 잃어버린 기분입니다. 저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하리지 : 잘 좀 이해해 보세요. 어떠한 진리라도 그것이 표현되는 순간 진리로 남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개념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덧붙여 말하면, 나와 너, 우리, 그들 따위의 말들은 의사소통을 위하여 필연적으로 사용되는 말이긴 하지만, 그러한 첫 생각이 통일성을 깨뜨리고 이중성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사실 대화로써 의사소통이 가능한 것은 이중성 안에서 뿐입니다. 말이란 스스로의 이분법으로 확장되어 갑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이분법을 통헤서 듣는 사람은 상대의 의사를 직접 듣고 인식할 수 있지만 절대 주체나 본체에 적용될 때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 문제란 본체를 상대적으로 추론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한 말을 이해하겠어요?
그 철학 교수는 가만히 있었고, 별 관심이 없어 보이던 그의 예술가 친구가 마하리지의 말에 빨려들어 가는 듯 아주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마하리지가 다시 말을 시작했다.
마하리지 : 상대적인 추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주체가 그 의식 안에서 비교될 수 있는 반대의 특징이나 성질을 가진 객체를 만들어 내는 작업을 의미합니다. 이렇듯 주체-객체의 이원성에 기초하지 않고서는 이러한 과정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상대적인 추론은 객체를 비교에 의해 설명하는 데는 효과적이며 사실 필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식의 주체, 감지의 주체는 분명 그 자체를 객체(대상)로 감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눈은 모든 대상을 볼 수 있으나 그 자신은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당신"이 벗어나기 어렵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생각이나 개념의 수렁 속에 빠졌음을 알겠습니까? 당신이 당신을 볼 수 없는데 말입니다. 당신이 실제적인 상황을 직시할 수만 있다면 그러한 생각이 얼마나 터무니 없고 우수운 이야기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그 전모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실제의 문제로 들어가 봅시다.
온 길을 되돌아 가려는 그 자는 도데체 누군가요? 당신이 그림자를 쫏아 아무리 멀리 간다 하더라도 쫏아가는 한 그림자는 항상 당신 앞에 있게 됩니다. 그러면 진정한 의미의 되돌아 감은 무엇을 뜻하겠습니까? 그것은 의식 자체가 완전히 없는 자리로 되돌아감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 이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계속 부정하고 부정하는 (그림자를 뒤쫏는) 자가 있는 한 "당신"은 부정되지 않는 채로 남게 됩니다. 내가 하는 말을 머리로만 받아들이지 말고 전체적으로 즉각 받아들이도록 하세요. 이해하겠습니까?
마하리지는 이렇게 말하고는 빙긋이 웃었다. 왜냐하면 그 교수의 예술가 친구가 열심히 집중하여 마하리지의 말을 경청하고 있다가 마하리지의 질문에 아무 말없이 합장하여 머리를 끄덕여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마하리지는 교수의 정신적 장애에 대해서, 자신을 육체라고 동일시한 상상의 "나"에 의해 야기된 상상의 난관일 뿐이라고 말했고 예술가는 그것을 이해하는 것 같았다. 마하리지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마하리지 : 되풀이 하건대, 마지막까지 완전한 부정을 하여 부정하는 자마저 완전히 사라져야 합니다.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행위자로서의 "존재"라는 개념으로 당신이 무엇인지 파악하려 하지만 그것은 곤란합니다. 실제에 있어서 진정한 "나"는 존재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참"나"는 존재의 개념 자체를 넘어선 것이며, 실재 비실재의 양쪽 개념을 모두 넘어선 것입니다.
이것이 이해되지 않는 한 당신은 계속해서 점점 강한 당신 자신의 상상의 장애물을 만들어 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찾고자 하는 것은 이미 당신 자신입니다.
그러자 그 교수는 아무도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인도해 줄 수 없냐고 물었다.
마하리지는 정말 그렇노라고 확인해 주었다.
마하리지 : 당신은 이미 당신이 되돌아 가려는 그 자리에 있습니다.
한시도 그 자리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으며 항상 그곳에 있었습니다.
사실이지 당신이 새로이 갈 그 어떤 "곳"은 없습니다.
이 명백한 자리를 알아차리는 것이 가장 좋은 대답이 될 것입니다.
단지 전체를 즉각적으로 보는 것, 그 외에는 할 일이 없습니다.
다만 비극적인 아이러니라면 이러한 알아차림과 통각은 의지적인 행동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잠에서 깨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은 아침에 저절로 깨어납니까? 아니면 의지적 행동으로 자신을 깨웁니까?
만일 당신이 아주 조그만 노력을 기울이더라도,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자연히 일어났을지도 모를 깨달음을 막게 합니다.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나 하지 않는 것이나 둘 다 똑같은 의지적 노력일 뿐입니다. 행위자가 완전히 사라져야 합니다.
행위의 부정적 긍정적인 면 모두가 없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놓음"입니다.
모임이 끝나고 그 교수와 예술가가 떠나려고 할 때, 마하리지가 그 예술가에게 미소지으며 다시 오겠느냐고 물었다. 예술가는 아주 공손히 경배를 드리며 아마도 피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지식을 많이 갖추고 적극적이고 조리있는 그 교수가 도움을 받았는지, 아니면 아주 주의 깊은 통찰력을 지니고 수동적으로 마하리지 말을 수용하던 그 예술가가 진정한 도움을 받았는지는 그들 자신만이 알 일이다.
-라메쉬 발세카 지음,이명규 역 <담배가계의 성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