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과 움직임을 초월한 곳에 계속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움직임(動)에 대한 설명
3개의 구나(속성,파동요소)는 움직임 없는 무형(無形相,푸루샤,원초적 남성원리, 파동의 +극)과 활동성의 8개 발생요소(프라크리티, 원초적 여성원리, 파동의 -극)가 상호 작용하는 요소입니다.
이 두 개의 극(極, 靜點과 動點) 사이의 교번 움직임의 작용인 파동 움직임으로 인해서 원초적인 남성(+극) 또는 여성(-극)도 아닌, 영원히 완전무결했던 실재(實在)가 가려져서 잊여집니다.
증조할아버지(푸르샤)는 할아버지(비슈누)에 의해서 가려지고, 아버지 (브라흐마)는 아들(시바)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이 모든 것에서 그들 네 명은 왕(파라브라만)의 행방을 놓쳐습니다.
[편집자 주(註) : 여기서 사마르타 람다스는 상징적 표현과 단어 사용을 매우 시적으로 사용했습니다.
이 상적적인 의미는 이 문장을 다른 형식으로 사고해 봄으로써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증조할아버지는 푸루샤 또는 물라마야( 세 가지 구나가 나타나기 이전의 마야)라고 할 수 있고,
할아버지는 비슈누 또는 순수의식(사뜨바 구나), 아버지는 브라흐마 또는 창조주(라자스 구나),
아들은 무지 또는 그것의 기원을 잊어버린 객관적 세계(타마스 구나)를 비유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역자 주(註) : 증조할아버지는 원초적 환상이며, 그 원초적 환상으로부터 비슈누(사뜨바 구나), 브라흐마(라자스 구나), 시바(타마스 구나)가 나옵니다.
다시 말하면 아무 움직임도 없는 파라브라만 상태에서 한 움직임이 발생하면 처음에는 사뜨바 속성(순수의식)가 생기고 이어서 파동성의 상승력(라자스 속성)이 일어나며, 이어서 파동성의 하강력(타마스 속성)이 생겨서, 한주기의 파동력(순수존재의식)이 생성됩니다.
이어서 이 기본 파동력(순수존재의식파동)이 8개의 변환요소(地×水×火×風×空× 사뜨바(조화력) × 라자스(상승력) × 타마스 (하강력)) 로 인해서 파동주파수 스팩트럼이 Y(기본파동주파수)의 8승배로 확산 분포되는 것이 육체의 감각두뇌정신작용을 통해서 이 물리적인 현상세계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3가지 속성(구나)는 원초적 환상에서 나온 단순한 움직임이 만들어낸 파동력의 3 요소인 조화력(사뜨바), 상승력(라자스), 하강력(타마스)이라고 이해해도 원래의 의미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습니다..
이 삼요소가 없으면 파동성도 없습니다.다만 위 본문에서는 처음에 원초적 환상인 물라마야가 생기고 그 다음에 순수의식인 사뜨바 구나, 그 후에 라자스 구나, 그 다음에 타마스 구나 순으로 발생하면서, 앞의 미세한 것은 뒤에 생긴 거친 것에 가려져 잊어진다는 내용을 묘사한 것 같습니다.]
신은 신전 안에 보이지 않게 홀로 계십니다.
우리가 신전에서 예배를 올리면, 그 예배는 신에게 까지 전달됩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피조물이 행하는 예배는 신에게 도달하게 됩니다.
하나의 절대 진아에게 두 개의 이름(푸르샤와 프라크리티)이 주어졌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상상해 보았지만, 만약 우리가 분별의 힘을 활용하면,
이것들은 단지 '하나'에 대한 이름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실재(實在)는 남성적이지도 여성적이지도 않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에 의해서만 상상되어 왔을 뿐입니다.
제대로 조사해 보면 이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라티어에서 강(江)이라는 단어는 여성적이고, 개울이라는 단어는 남성적입니다.
이 단어는 모든 사람들에 의해 이렇게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것에 대하여 좀 세밀하게 생각해 보면 물은 하나 뿐이고, 물과 관련하여 남성적이거나 여성적인 몸과 연관된 것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진아를 모르고 그것을 보려고 해도 알 수는 없습니다.
만약 다른 것의 도움을 받아서 보려고 한다면,
광대한 삼라만상 안에 뚜렷한 통일성이 전혀 없기 때문에 진아를 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의 진아가 많은 형태를 취해 왔고, 홀로 모든 형태에 퍼져 있지만,
그러나 그것들 자체의 소란을 책임지지는 못합니다.
진아는, 많은 것처럼 나타나 보이는 존재입니다.
진아는 많은 형태로 나타날지라도 그것은 하나이며 홀로입니다.
이 이상한 현상은 모든 생명체에서 분명합니다.
덩굴식물의 형태를 보면 그 속에 물기가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모든 종류의 덩굴식물에는 물이 남아 있습니다.
물이 없으면 덩굴식물은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나무와 식물군에는 모두가 공유하는 약간의 물이 포함되어 있지만,
각 나무는 개별적으로 자라납니다.
또한 공기 중의 수분을 흡수하여 공중에서 자라는 많은 종류의 식물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땅과 떨어져 자라지만 마르지는 않습니다.
사실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강하게 자라납니다.
나무는 그들 안에 내재한 신 때문에 살아갑니다.
만약 신의 생명성이 없다면, 그것들은 마른 나무가 될 것입니다.
이런 것은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공중의 높은 곳에 있는 나무에서 자라는 식물이 있습니다.
그들의 뿌리는 언제든지 땅에 침투하지 않습니다.
식물과 나무가 썪으면, 다른 나무를 위한 녹색 거름을 형성하여 매일 성장과 부패의 순환을 돕습니다.
어떤 연사들은, 깊은 사색과 분석에 영감을 주는 풍성한 잎파리들이 달린 나무가지처럼,
자신의 말을 퍼뜨리는 나무와 같습니다.
세상에서 일어난 일은 이미 일어난 것이고,
사람들은 상상력을 이용해서 그것들을 설명하려고 하지만.
지식이 풍부하고 현명한 사람은 말 너머의 것을 이해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해했지만 확신이나 깨달음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확신은 있지만 지식이 없습니다.
실제 경험이 없으면 모든 것이 상상과 추측에 기초합니다.
만물의 으뜸인 것을 스스로 보고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을 깨달으면 우주에서 오직 자기의 진아만을 발견하게 됩니다.
내면의 이해와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높은 경지에 있는 반면,
겉으로 드러내려는 사람은 후진적인 상태에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가 현명한 사람이 이해하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남의 마음을 기쁘게 하면 낯선사람일지라도 그를 칭찬할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사람들의 마음이 기쁘지 않으면 멋진 식사일지라도
그들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할 것입니다.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개념을 초월해 있는 것애 계속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깨어 있는 사람이 다른 깨어 있는 사람을 만나면 두 사람 모두 만족감을 느낍니다.
만약 두 마음이 합쳐지면 보이지 않는 것이 보여지고,
일시적인 세상이 순환하는 주기의 교차점이 나타나 있으며,
그것들 모두를 초월한 그 너머가 있음을 스스로 알게 됩니다.
일단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면 ,
그것은 자신 안에 아주 가까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것은 육신의 눈으로는 절대 볼 수 없습니다.
모든 신체에는 움직임과 지속적인 활동이 있습니다.
파라브라만, 절대 실재는 영원히 움직이지 않고 모든 곳에 스며 있습니다.
움직이는 것은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움직입니다.
그것이 한 장소에서 움직일 때 그것은 그 장소에서 존재하는 것을 그칩니다.
따라서 움직임은 언제 어느 곳에서나 현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움직임은 움직임의 전체를 알지 못하며, 그 범위를 알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움직이지 않는 무한한 실재(實在)를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불꽃놀이는 하늘을 가로질러 움직이지만,
볼꽃의 성질은 하늘 안에서 꺼지기 때문에 결코 하늘 넘어까지 도달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의 성질은 움직이는 쪽에서 작용하는 것인데,
어떻게 언제나 실재(實在)를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까?
속성없음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실재(實在)를 아는데 성공하지 못하면서도 모든 것이 브라흐만이라고 말은 합니다.
(그런 사람이) 본질과 비본질에 대한 탐색을 하다보면 무지의 어둠만이 있을 뿐입니다.
무지한 아이와 마찬가지로, 진리는 인식되지 않고, 거짓은 진짜로 받아들입니다.
오대 원소는 우주의 대원인체(물라마야)에서 발생합니다.
그러나 '위대한 말씀(Mahavakyas)의 해석은 이와는 다릅니다.
(그들은 "오직 브라흐만만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신(神)이 의식의 위대한 원리인 가장 큰 요소임을 이해하십시오
이것은 모든 영적인 수행과 예배가 거기서 모두 끝나기 때문에 염원의 정점입니다.
행위(Karmar), 예배(Upasana), 지혜(Jnana)는 베다에서 발견되는 세가지 부분 혹은 정해진 경로로 구성됩니다.
그러나 파라브라만을 깨달음으로써, 지혜(Jnana)가 지고의 지혜(Vijnana)속으로 융해됩니다.
<스승과 제자 간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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