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하나의 브라만이 만물에 편재한다
마음 속에 밤낮으로 무엇을 바라는 것이 있을 때 그것을 '욕망'이라고 합니다.
마음이 한 대상에서 다른 대상으로 부단히 달려갈 때 그것을 욕망이라고 합니다.
아무 욕망이 없는 사람은 말이 없습니다.
메카와 메디나(이스람 순례자들)는 멀리 있지만 (무슬림이라면) 평생에 한번은 가 보아야 합니다.
욕망의 대상을 추구하는 사람은 개아입니다.
아무 욕망이 없는 사람이 신(시바)입니다.
불은 불, 솜은 솜입니다. 지(知)는 불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행위를 소멸하기 때문입니다.
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여섯가지 성질, 곧 욕망, 분노,탐욕,유혹,자만, 슬픔은 개아의 성품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얻으면 욕망이 커지는 것을 느끼고, 얻지 못하면 슬픔을 느낍니다.
이런 성질들은 서로 한데 섞입니다. 따라서 무욕이 신성(神性)의 표지입니다.
욕망을 갖는 것은 개아의 표지입니다.
모든 세속적 쾌락은 개아와 관련됩니다. 그것은 진아의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모든 속성을 넘어서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감각대상을 즐기는데서 벗어납니다.
대상의 즐김은 진아가 (한 육신에) 한정되는 것을 조장합니다.
대상들을 생각하는 것은 라자스 구나인 반면, 진아를 생각하는 것은 사뜨와 구나입니다.
브라만이 삶의 유일하게 참된 쾌락임을 깨달을 때, 그 사람은 브라만이 됩니다.
그럴 때 그는 대상에서 오는 감각 쾌락을 싫어합니다.
앞서 저는 여러분에게 여덟가지 싯디를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말한 그런 헌신을 닦는 사람들은 그런 능력을 자연히 얻게 됩니다.
저(참나)는 만물에 편재합니다. 저(참나)는 하늘을 넘어선 허공입니다.
저(참나)는 모두의 안에 있는 '들음'이고, 모두의 마음들의 마음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을 투청력이라고 합니다.
저는 모두의 눈들의 눈입니다.
이것을 깨달을 때 그 사람은 투시력을 얻습니다.
자신이 그 모든 마음들의 내적 충동이라는 것과,
자신이 마음 자체임을 아는 자는 자신의 확신으로써 마음을 통제하는 힘을 얻습니다.
'내가 브라만이다'라는 깨달음 자체가 마음의 정복입니다.
몸이 행위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에고입니다.
'나는 몸이다, 나는 하나의 몸으로서 행위한다'는 개념이 에고입니다.
'나는 몸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브라만의 상태입니다.
자신의 모든 형상의 본질이고 모든 형상의 파괴자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참으로 모든 형상의 점유자이며, 저의(신의) 힘을 얻습니다.
저와 별개로 있으면서 '나는 신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저의 헌신자이지만,
자신이 저와 하나임을 아는 사람들은 라마, 크리슈나와 같은 신이 됩니다.
바쉬슈타와 그 밖의 진인들은 자신을 헌신자로 생각하고 헌신자로 남았습니다.
라마, 크리슈나 등은 자신을 신으로 생각했고, 그들의 확고한 결심에 의해 신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지고아 빠라마트만의 상태를 성취했습니다.
브라만을 알게 되는 사람들은 부라만으로 머무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5대 원소로 이루어진 세계의 모든 원자, 소립자들과 하나임을 느낄 수 밖에 없지만,
어떤 특정한 개체와도 연관되지 않습니다.
깨달은 자는 자신의 존재와 별개라고 느끼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고 싶은 욕망을 갖거나 그런 능력을 갖는 것은 마치 자신의 진아에서 멀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이 모든 존재들 안에 있는데, 다른 사람의 마음 속 생각을 알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타자'가 없을 때는 하나의 니뉘지 않은 진아만이 있고, 브라만이 도처에 퍼져 있습니다.
그러니 알아야 할 무슨 '타자'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안에 상상된 사람이 있고, 여러분(진아)이 있습니다.
자신의 상상이 투사한 그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나'가 브라만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나'가 죽어야 합니다.
실은 '나' 자체가 하나의 환(幻)인 상상적 개체입니다.
'나'가 소위 죄의 본질입니다.
그것은 더욱 더 많은 감각적 즐김을 요구하는데,
그런 즐김은 더욱 더 많은 관능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불을 댕길 뿐입니다.
그것은 아주 욕심이 많습니다.
이 '나'를 포기하십시오.
그것을 어떤 무기로 죽일 수는 없고, 여러분이 그것을 아주 세밀하게 이해하는 순간 그것은 즉시 죽습니다. 이런 이해는 쉽게 얻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과제는 이미 브라만인 것을 브라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 즉 '나'를 브라만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미묘한 차이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능력을 요하지 않습니다.
브라만은 도처에 편재하고, 나뉨이 없고, 별개의 부분 없이 퍼져 있는데, 누가 누구를 찾으며 어디서 찾습니까? 누가 누구를 알아야 합니까?
칮아야 할 '타자성'의 느낌이 어디 있습니까?
일자와 별개의 '두 번째'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있을 수 있으며,
어떻게 그것이 다른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도처에 어떤 움직임도 없는 브라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타자', 두 번째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 미묘한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는 더 이상 앎과 모름이 없습니다.
저 하나인 브라만이 만물에 편재합니다.
달리 알아야 하거나 몰라야 할 어떤 타자도 없습니다.
주 크리슈나는 말합니다.
" 나(참나)에 대한 확고한 집중으로, 사람은 나와 같은 힘을 얻는다. 그는 어떤 형상이든 집중하면 그 형상을 취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요기가 바람이나 기(氣)의 형상을 취하여 어디든지 어떤 몸으로든 갈 수 있을 때, '다른 몸에의 의식 투입'능력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참나)의 형상, 저(참나)의 참된 성품에 대해 매우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도처에서 저(참나)만을 봅니다.
사람이 이것을 깨달으면 모두의 안에 있게 되는데,
달리 어디로 가거나 남의 몸 안에 들어 갈 수 있겠습니까?
자기 자신의 진아 외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이 확인되는데,
누구의 마음을 읽을 필요가 있습니까?
- 그대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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