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기초교리 공부] 7 팔정도(6)
일상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개념적 판단에 얽매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을 '사띠(sati)라고 한다. ‘사띠’는 ‘바라봄’ ‘깨어있음’ ‘알아차림’ ‘마음챙김’ ‘바른 억념’ ‘각성’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된다.
필자는 이후 '사띠'를 통일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 '사띠'라는 단어에는 복합적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사띠에는 ‘바라봄’의 기능과 함께 단순 앎'과 '복합 앎'의 기능도 있다.
<대념처경>은 이 사띠를 "호흡의 들고 남을 주시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호흡이 들어가고 나올 때, 그 호흡이 긴지 짧은지 아는 ‘단순 개념에 대한 앎이 있는 알아차림’을 빠자나티(pajānāti)라 하고, 온몸의 구부러짐과 유기적이고 ‘복합적인 개념을 아는 알아차림’을 정념정지(sati sampajañña)라 한다. 삶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행위는 복합적인 앎과 함께하며, 좌선할 때의 앎은 단순 앎에 가깝다. 이 앎의 기능은 좋아하고 싫어함, 이로움과 해로움, 욕구함 등의 번뇌적 측면이 제거된 상태의 앎이다. 곧 심(心)이 심소(心所)를, 또는 ‘식(識)’이 ‘수(受),상(想),행(行)’을 ‘알아차림’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띠의 대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나'이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이다.
내가 누구인지,내가 무엇인지 알려면 나의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사띠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무엇을 알아차려야 하는가?
나는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그리고 그 대상을 알아 차려야 한다.
왜냐하면 작용 속에서만 '나의 존재'가 파악되기 때문이다.
몸(身)의 대상은 느낌(受)이고, 마음(心)의 대상은 개념과 생각(想), 욕구 작용(行) 등의 법(法)이다.
다시 말해서 나를 안다는 것은 신(身),수(受),심(心), 법(法)을 안다는 것이 되고,
신(身), 수(受),심(心),법(法)을 안다는 것은 오온(五蘊)으로 구성된 나를 알고 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띠의 대상은 신,수,심,법 또는 오온(나)이다.
무릇 수행이란 마음의 병인 업(業)을 다스리는 것이다.
오해로 인해 잘못된 견해가 생기고, 그 잘못된 견해가 잘못된 인생관을 형성하고, 잘못된 인생관 때문에 행해진 잘못된 행위들의 결정체가 바로 업(業)이다.
그러므로 잘못 형성된 견해와 인생관을 바르게 다스리고,악의 행위를 다스려서 선의 행위를 증장시키고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 이것을 수행이다.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에는 거울이 대상을 비추듯 있는 그대로 주시하는 여실지견(如實知見)이 필요하다. 앎이 거울 같아야 하는 이유는 주관적 해석과 시비가 앎에 붙어있으면 객관성을 상실해서 '있는 그대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신(身),구(口),의(意) 세 가지 행위를 놓치지 않고 관찰해서, 잠재의식 속에 있는 의도가 분명히 드러나도록 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의도가 업을 일으키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의도를 분명히 알아차려야만 의도의 구성요소인 생각과 견해를 바로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과 견해는 중생들의 마음의 병인 업의 시작점으로, 이것들을 다스리지 않고는 업을 정화하거나 치유할 수가 없다.
업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업(業)은 육문(六門)을 통해 드러난다.
여섯 가지 감각 기관이 작용하면 수(受), 상(想), 행(行)이 같이 작용하게 된다.
이는 대상을 보고 듣는 가운데 좋아하고 싫어하는 느낌(受), 옳고 그르다고 하는 판단(想), 당기고 밀치는 의지작용(行)들이 함께 생겨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의 수,상,행,은 각각 주관적이고, 개인의 업에 의해 각자의 견해들이 다르게 형성된다.
똑같은 사물을 바라보아도 사람마다 수,상,행,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업을 다스리는 데는 두 가지 단계가 필요하다.
첫째,육근(六根)에서 받은 정보를 수,상,행과 분리해서 업에 물들지 않은 청정한 의식으로 알고 보는 단계다. 이들을 분리하는 작업이 바로 ‘아무런 분별없이 바라봄’ ‘단지 바라보기만 할뿐’인 것이다.
둘째, 끌어당김(行)의 구성요소인 좋아하고 싫어하는 느낌(受)과 옳고 그르다고 하는 개념적 판단(想,相)의 본질을 해체하고 관찰하는 단계다.
이 두 단계를 통해 우리는 스스로의 업을 다스릴 수 있다.
그렇다면 사띠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는 잠재의식에 있는 감성의 번뇌들을 깨끗이 정화하기 위해서이고,
둘째는 나의 실체를 분명히 앎으로써 나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이다.
'나'는 몸과 그 대상인 느낌, 마음과 그 대상인 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것들은 항상 인연 따라 변화한다. 그 변화하는 것에 대해 고정된 집착을 가지면 고통이 생겨나고. 그것들에 자성(自性)이 없음을 알면 나와 법의 실체를 보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보면 더 이상 집착할 내가 없음을 알게 되어 유신견(有身見)을 버리고 ‘수다원’이 되거나 보살초지를 성취한다.
감성의 번뇌들을 깨끗이 정화하기 위해서는 습관적 행위를 의식화 하여야 한다.
악업을 짓는 것이 몸과 입이지만, 사실 그것은 도구일 뿐 근원은 마음의 의도이다.
그러므로 정신적인 요소인 마음의 의도가 어떻게 신체적인 업의 행위를 일으키는지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 모든 행위의 의도를 보아야 한다.
그렇게 해야 마음의 숨은 번뇌가 수면위로 낱낱이 드러난다.
번뇌의 근원이 사견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수행의 출발점은 신(身),수(受),심(心),법(法)을 부정(不淨), 고(苦), 무상(無常), 무아(無我)로 보는 정견이다.
부정, 고, 무상, 무아를 꿰뚫어 알면, 바른 인생의 목표가 생긴다.
인생의 바른 목표는 번뇌 속에 살고 있는 중생의 삶을 번뇌를 끊는 삶으로 바꾸게 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을 정사(正思)라고 하고, 그와 같은 생각을 실천하는 것이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정진(正精進)이다.
이러한 실천행위를 통해 잠재의식의 먼 과거로부터 쌓아올린 한(恨)과 집착, 탐착과 성냄이라고 하는 찌꺼기를 닦아 나가는 것을 선정행이라고 한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바로 정견(正見)이다.
"몸(身)은 부정(不淨)하고, 느낌은 괴롭고, 마음은 무상하고, 법은 무아다"라는 불조의 가르침을 거듭해서 듣고 이해하는 문혜(聞慧), 그 가르침을 거듭거듭 사유함으로써 마음속의 여러 욕망과 견해, 감정 등을 조화 일치시키는 사혜(思慧), 이 두 가지가 정견에 포함된다.
이것들을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사념처 수행의 수혜(修慧)가 바로 바른 사띠, 즉 정념(正念)이다.
사띠는 일반적으로 호흡을 알아차림으로부터 시작한다.
호흡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는 호흡이 마음을 현재에 머물게 하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생각(마음)은 늘 과거나 미래에서 노닐지만 호흡은 오직 현재에만 존재한다.
그렇다면 왜 마음을 현재에 머물게 해야 하는가?
과거나 미래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개념으로 이루어진 가상의 실재(virtual reality)이기 때문에, 현재에 마음이 머물지 않으면 나의 진실한 모습을 보지 못한다.
마음을 현재에 머무를 때 나의 실체를 경험하여 깨닫고, '나'라는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을 현재에 머물게 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모든 번뇌는 마음을 타고 흘러 들어오기 때문이다.
호흡과 몸에 대한 느낌은 오직 현재이기 때문에, 호흡의 알아차림을 통해 마음이 과거나 미래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막아낸다. 이렇게 해서 이미 일어난 근심이나 걱정, 앞으로 일어날 근심이나 걱정 등을 다스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호흡을 알아차리는 명상을 하면 마음속의 기억들이 스멀스멀 올라오게 된다.
그것들은 감각적 욕망, 성난 기억과 짝지어 일어나는 생각들이다.
이러한 생각들은 몸과 마음을 지치게 하여 무기력이나 혼침, 들뜸, 후회 등에 빠지게 한다.
이러한 상태가 지속적으로 반복되면 아예 수행에 대한 회의와 의심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를 오장(五障)이라고 한다. 이럴 때는 이들이 있으면 있는 줄 알고, 없으면 없는 줄 알아야 한다.
또한 이들이 없다가 발생하면 ‘일어남’을 알아야 하고,
있다가 사라지면 ‘사라짐’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이것이 사띠의 주요 기능이다.
몸과 마음이 기쁜 상태에서 이것들을 바라보면 감각적 욕망은 가라앉고, 나를 괴롭히거나 나에게 잘못했던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겨나며. 상대방의 처지와 인연을 이해하게 되면 번뇌는 자연스레 소멸해 버린다. 이것을 정념정지(正念正知)라고 한다.
- 등현스님 지음 <불교를 _ _ _ 꿰뚫다> -
(등현스님: 고운사 화엄승가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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