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암스님] 선문답 21조
제1문 : 참선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어떠한 관계가 있습니까?
또한 참선을 하지 않아도 무방한 것입니까?
제1답 : 달마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 마음이 곧 부처요, 부처가 곧 도요, 도가 곧 선(禪)이다."
하시니, 선이란 곧 중생의 마음임을 알 수 있다.
대체로 중생심에는 두 가지의 구별이 있으니 하나는 청정한 마음이요, 둘째는 물든 마음이다.
물든 마음은 무명삼독(無明三毒)의 마음이요, 청정한 마음은 무루진여(無漏眞如)의 본성이다.
무루진여를 염(念)하고 불이(不二)를 수순(隨順)하는 것은 제불(諸佛)과 같아서 동요가 없는 해탈이요,
무명삼독을 좇아서 많은 악업을 짓는 것은 육취(六趣)에 빠져 영겁에 윤회하는 것이니, 청정한 마음은 사람의 바른 길이요 편안한 집이며, 물든 마음은 사람의 험한 길이요 불구덩이이다.
어찌하여 지혜로운 자가 바른 길을 버리고 편안한 집을 비워둔 채 험한 길로 나아가며 불구덩이에 빠져 만겁의 괴로움을 받으려고 하는가. 그대는 이 점을 깊히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참선이란 특별한 일이 아니다. 참(參)이란 합(合)함이니,
자성에 합하여 청정한 마음을 보양(保養)하고 바깥으로 치달려 구하지 않음이다.
오직 바라건대 일체 중생이 다 함께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여 무상대도를 깨달아서 다시는 삿된 그물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속히 불과(佛果)를 증득하기를 바라고 바라는 바이다.
제2문 : 이미 참선을 하고자 한다면, 어떠한 마음가짐을 가져야 합니까?
제2답 : 참선을 하는 사람이 일단대사(一段大事)의 인연을 밝히고자 한다면, 맨 처음 자신의 마음이 부처이며 자신의 마음이 법이어서 구경(究竟)에 다름이 없음을 믿어 철저하게 의심이 없어야 하나니, 만일 이와 같이 스스로 판단하지 못한다면 비록 만겁동안 수행을 한다 할지라도 마침내 진정한 대도(大道)에 들어 갈 수 없을 것이다.
이 때문에 보조(普照)선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일 마음 밖에 부처가 있고 자성(自性) 밖에 법이 있다고 말하여 이러한 마음을 굳건히 고집하면서 불도를 구하고자 한다면, 비록 진겁(塵劫,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소신연비(燒身燃譬)하며, 뼈를 부숴 골수를 내고, 피를 내어 경전능 베끼며, 장좌불와)(長坐不臥)하고, 일종식(一種食)으로 아침을 재게하며 그리고 일대장경(一代藏經)을 모두 독송하며, 갖가지 고행을 한다 할지라도 모래를 쪄서 밥을 짓는 격이기에 스스로 수고로움만 더할 뿐이다. "
라고 하니, 이는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닦아서 스스로 불도를 이루는 것이 제일의 요체(要諦)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만일 마음 밖에 부처가 있다고 한다면 부처는 곧 외불(外不)이니 나에게 어찌 부처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제불(諸佛)이 나의 도가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제3문 : 이미 초발심(初發心)의 마음을 지녔다면, 어떻게 공부를 하여야 진실한 참구가 됩니까?
제3답 : 상근기(上根氣)의 큰 지혜를 가진 이는 하나의 기연과 경계에서 이를 잡아 곧바로 사용하므로 굳이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지만, 만일 참구를 논한다면 마땅히 조주(趙州)의 '무자(無字)'와 '뜰 앞의 잣나무(庭前栢樹子)' 와 동산(洞山)의 '마삼근(麻三斤)' 과 운문(雲門)의 '마른 똥막대기(乾屎蹶)' 등 맛없는 말을 의심하고 또 의심하며, 이 화두를 끊임없이 들어 마치 모기가 무쇠소에 앉아 주둥이를 박지 못할 곳에 몸까지 몰입하 듯 하여야 한다. 만일 조그마한 차별의 생각과 털끝만한 계교와 헤아림이 그 사이에 동하면, 옛 사람이 말한 " 잡독이 마음에 침투하여 지혜를 손상한다" 함이니, 학인이 가장 먼저 깊이 경계해야 할 것이다.
나옹(懶翁) 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한 생각이 일어나고 한 생각이 멸(滅)하는 것을 생사(生死)라 하니, 생사의 즈음에 당하여 힘을 다해 화두(話頭)를 들면 생사가 곧바로 다할 것이니, 생사가 곧바로 다한 것을 적(寂)이라 한다. 적(寂) 가운데 화두가 없는 것을 무기(無記)라 하고, 적(寂) 가운데 화두가 어둡지 않은 것을 영(靈)이라 말하니, 공적영지(空寂靈智)가 부서짐이 없고 혼잡됨이 없으면 곧바로 이루어진다. " 고 하니 학인은 마땅히 이 말을 지침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제4문 : 이미 여실(如實)히 참구하였다면, 어떠한 것이 여실하게 힘을 얻은 것입니까?
제4답 : 옛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힘이 안드는 곳이 곧 힘을 얻는 곳이다."
하시니, 화두가 의심하지 않아도 스스로 의심이 되고, 화두를 들지 않아도 스스로 들어짐에 이르러서야 육근(六根)의 문이 자연히 툭 열리어 홀로 드높고 드높으며 평탄하고 평탄하게 되어, 마치 달빛이 격랑 속에 투사되어 부딪쳐도 흩어지지 아니하고 휩쓸려도 유실되지 않음과 같은 때에 이르러야 대오(大悟)에 가까울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서 털끝만큼이라도 지각의 마음을 내면 순일(純一)한 오묘함이 끊어져서 대오(大悟)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니, 간절히 이 점을 경계해야 한다.
제5문 :이미 여실하게 힘을 얻었다면 반드시 깨달음이 철저할 것이니 어떠한 것이 여실하게 깨달음이 철저한 경계입니까?
제5답 : 옛 스승이 말씀하시기를,
"분명하고 분명하게 법을 깨달음이 없을지언정 법을 깨달음이 있으면 곧 미혹한 사람이다."
하였고, 또 다시,
" 깨달음이 있으면 도리어 깨닫지 못했을 때와 같다" 고 하니,
만일 깨달음이 철저한 경계가 있다고 한다면 곧 이것은 깨달음이 철저한 경계가 아닌가, 그렇다면 영운(靈雲)선사가 복사꽃을 보고 깨친 것과, 향엄(香嚴)선사가 대나무에 돌을 던진 것과 현사(玄沙) 스님이 발가락을 접질린 것과 장경(長慶) 스님이 주렴을 걷어 올렸던 것 등의 많은 큰 스님들의 깨쳤던 일은 모두 거짓으로 전해온 것일까?
앙산(仰山)이 말하기를,
"깨달음이란 없지 않으나 제2의 경지가 됨을 어쩌리오."
라고 말하니, 절반쯤 이르름을 말한 것이다.
현사(玄沙) 스님이 말하기를,
"감히 노형을 보니 아직은 철저하지 못합니다."
라고 말하니, 실로 노파심이 간절한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 깨달음이 철저한 경계가 있다는 것이 옳은 것일까,
철저한 경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어떻게 하면 이를 알 수 있을까?
말 없이 한참 동안 있다가 게송을 읊었다.
해천(海天)에 밝은 달이 처음 솟아 난 곳
암벽의 원숭이 울음 그칠 때
제6문 : 이미 깨달음이 철저한 후에는 어떠한 것이 여실한 수양(修養)입니까?
제6답 : 옛 사람이 말하기를,
"이미 관문을 지난 자는 굳이 다시 나루터를 물을 것이 없다."
고 하니, 이미 깨달음이 철저하다면 어찌 수양을 논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렇지만 구름과 달은 한가지이나 시내와 산은 각기 다르니 또한 아래 문장의 주각을 들을지어다.
한 줌 버들가지 거두지 못하여
봄바람에 날리어 옥난간에 실려있다.
제7문 : 이미 수양한 후에는 어떠한 것이 여실한 증득입니까?
제7답 : 어떤 스님이 조주에게 물었다.
"잣나무도 또한 성불할 수 있습니까?"
조주스님이 말하였다.
"있다 !"
"어느 때 성불할 수 있습니까?"
" 허공이 땅에 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어느 때 허공이 땅에 떨어집니까?"
"잣나무가 성불할 때까지 기다려라."
이는 옛 사람이 무생(無生)의 도리를 철저하게 깨쳐서 거꾸로 사용하고 마음대로 들어 쓰는 시절이겠지만, 오늘날은 어떻게 해야 할까?
속히 일러라. 속히 일러. 허공이 땅에 떨어지는가. 잣나무가 성불하는가,
절대로 허공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생각과 잣나무가 성불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
손가락을 한 번 퉁기고 이르시기를,
" 하마터면 주각을 잘못 쓸 뻔했다."
제8문 : 이미 증득한 후에는 어떠한 것이 여실히 원만하게 끝을 잘 맺는 것입니까?
제8답 : 옛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눈앞에는 스님이 없고 여기에는 노승이 없으니, 이는 눈앞의 법이 아니오 이목(耳目)으로 이를 바 아니다." 하니,
제방의 선지식들이 이 말을 가지고서 어떠한 사람의 경계인가를 말하곤 한다.
나는 여기에 이르러 모두 다 잊어버렸노라.
제9문 : 처음 발심으로부터 끝을 잘 맺는 데 이르기까지 어떠한 마음이 제일 긴요하며 귀중한 경구(警句)가 되는 것입니까?
제9답 : 석두(石頭; 700~790년, 당나라 스님)화상의 참동계(參同戒) 맨 끝 구절에 '삼가 참선인에게 구하노니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고 하였는데, 후일 법안(法眼)스님이 이 말을 들어 말하기를,
"실다운 은혜를 참으로 갚기 어렵다." 고 하니,
나 또한 실다운 은혜를 참으로 갚기 어렵다.
하지만 어떻게 하여야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않는 소식인가.
한 차례 큰기침을 하고서 게송을 내렸다.
달큰한 복숭아와 감을 먹지 아니하고
산을 따라 올라가 시큼한 배를 따노라.
제10문 : 간화(看話)와 반조(返照)는 어떠한 차이가 있습니까? 매양 참 선인들이 서로 논쟁하니, 바라건대 자상히 논변하여 밝혀 주소서.
제10답 : 나는 웃으면서 말한다. 위에서 물은 바는 엇비슷이 곡조가 같아서 들을 만 하지만, 여기에서 물은 뜻은 또다시 바람이 별조(別調)로 부는구나. 하지만 나의 한 마디 말을 들어보아리.
큰 코끼리가 강을 건넘에 흐르는 물을 가로지르니
토끼와 말이 밑바닥에 닿지 못함을 관계치 말라.
알겠는가. 만일 알지 못한다면, 나는 오늘날 그대들과 더불어 자세히 말하리라.
옛날에 앙산스님이 위산스님에게 물었다.
"어떠한 것이 참 부처의 주처(注處)입니까?"
위산이 말하였다.
"생각으로써 생각없는데 이르게 하는 오묘함으로써 신령한 불꽃의 무궁함을 반조(返照)하여서 생각이 다하여 근원(根源)으로 돌아가면 성상(性相)이 상주하여 일과 이치가 둘이 아니요, 진불(眞佛)이 여여하다"
앙산이 그의 말에 곧바로 대오(大悟)하였다.
그후 심문분(心聞賁)선사가 이 화두를 들어서 말씀하였다.
" '생각으로써 생각 없는데 이르게 하는 오묘함으로써 신령한 불꽃의 무궁함을 반조하여서 생각이 다하여 근원(根源)으로 돌아간다'고 하니, 여기에서 벗어나면 다시 무슨 정결한 법이 있겠는가.
어떤 사람이 시끄러운 티끌 속에 들어가서 거스르고 순응한들 무엇이 물들게 하고 기뻐하게 하고 성나게 하리오. 그러한 이후에 밝음과 어둠 두 가지를 철저하게 타파하여 밝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은 곳을 향하여 '대비원에 재가 있다는 것을 본다(大悲院裏有齋)는 것이 화두(話頭)를 말함이 아니겠는가.
[註 : 대비원이유재(大悲院裏有齋) : 진주땅의 보화화상이 평소에 늘 시중(市中)에 둘러서 방울을 흔들면서 말하기를 "밝음이 오면 밝음으로 때리고, 어둠이 오면 어둠으로 때리고 사방팔방에서 오면 회오리바람으로 때리고, 허공에서 오면 도리깨로 대린다." 하였다. 하루는 임제선사가 한 스님을 시켜서 "다 그렇지 않게 울 때는 어떠합니까?"하고 묻게했더니, 보화화상이 이르기를 "내일 대비원에 재가 있으리라'하였다. 그 스님이 돌아와서 임제스님에게 말하니 임제선사가 이르되 "내가 종래로 그 사람을 의심했느니라"하였다. 이 일화에 대하여 임제, 대혜 등 많은 선사들이 다투어 송(頌)을 붙여 거양(擧揚)하므로서 화두가 되었다. ]
앙산은 '신령한 불꽃을 돌이켜 생각한다'는 말에 이미 대오하였거늘, 심문분(心聞賁)선사는 무엇 때문에 다시 화두를 관(觀)하도록 하였을까?
깨달음을 얻은 자가 모두 앙산과 같다면 다시 말할 것이 없으려니와, 만일 앙산의 깨달은 바에 미치지 못한다면 지견(知見)이 없어지지 않아서 생사의 마음을 타파하지 못할 것이다.
생사의 마음을 타차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대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는 심무분 선사가 반조하는 가운데 철저하지 못한 자를 위하여 특별히 말한 것이다.
또한 고봉(高峯)은
"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의 화두를 들다가 '죽은 시체를 끌고 다닌다'는 언구(言句)를 타파하여 대지가 잠기고 물아(物我)를 모두 잊어서 정(定)을 잡고 주인이 되었지만,
설암스님의 '잠잘 때에 꿈도 없고 생각이 없는 곳에서는 주인이 어느 곳에 있는가'라는 물음을 받았을 때 곧바로 대답할 말이 없고 말할 수 있는 이치가 없었다.
설암스님이 다시 나에게 '일각주인공(一覺主人公)이 어느 곳에서 안심입명(安心立命)을 하는가'를 관(觀)하도록 하였는데, 결국은 함께 잠자는 도반스님이 목침을 떨어뜨리는 소리를 듣고서 그물 속에서 뛰어 나온 듯이 툭 트이어 한 생각에 작위가 없어 천하가 태평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옛 사람이요, 옛날의 행리(行履)가 바뀌지 않았다." 고 말하였다.
여기에서 말한 '일귀하처(一歸何處)는 화두(話頭)를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일각주인공(一覺主人公)을 보라'는 것이 관조(觀照)를 말함이 아니겠는가.
고봉은 이미 '일귀하처'에서 굳건히 정(定)을 잡고 주인이 되었는데, 설암스님은 무엇 때문에 힐책하여 다시 '일각주인공(一覺主人公)을 보도록 하였을까?
이는 특별히 화두를 보는 가운데 철저하지 못한 자를 위하여 이와 같이 가르쳐 준 것이니, 과연 무엇이 우수하고 무엇이 열등하며, 무엇이 원만하고 무엇이 편벽하다는 차이가 있을 수 있겠는가.
이는 깨달음이 철저하고 철저하지 못함이 사람의 진실과 허위, 구경(究竟)을 얻었느냐와 못 얻었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지 방편의 우열(優劣)과 심천(深川)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삼가 불조(佛祖)의 정법(正法) 위에서 부질없이 이견(二見)을 내어 스스로 장애와 어려움을 지어서는 안 될것이다.
종고(宗皐)선사가 영시랑(榮侍郞)에게 보내는 답서에 이르기를,
"다만 일상생활의 인연이 있는 곳에서 무시로 살피되, 내가 타인과 더불어 명쾌히 시비곡직(是非曲直)을 끊어버림은 누구의 은혜를 입은 것이며, 필경 어느 곳에서 유출되었는가를 살피고 살핀다면 평소에 생처(生處)인 화두는 스스로 숙처(宿處)가 되리니, 생처(生處)가 이미 숙처(宿處)가 되면 숙처(宿處)는 도리어 생처(生處)가 될 것이다. 어느 곳이 숙처(宿處)인가. 5음(五陰), 6입(六入), 12처(十二處), 18계(十八界),24유(二十四有) 등 무명업식(無明業識)으로 사량계교(思量計較)하는 심식(心識)이 밤낯으로 아지랑이처럼 번뜩여서 잠시도 쉼이 없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 하나의 끄나풀이 사람들로 하여금 생사에 유랑케하며 모든 고통을 만들어 내기도 하지만, 이 하나의 끄나풀이 이미 화두가 되면 보리열반과 진여불성이 문득 현전(現前)하게 될 것이다.
현전(現前)한 때에 이르러서는 또한 현전했다는 사량도 없어야 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옛스님이 깨달음을 얻고서 말하기를, '눈에 응할 때에는 일천개의 태앙이 비춤과 같아서 만상이 그림자를 벗어날 수 없고, 귀에 응할 때에는 깊은 골짜기와 같아서 크고 작은 소리가 족히 응하지 않음이 없다'고 하니, 이와 같은 일들은 다른 데에서 구하지 않고 다른 힘을 빌리지도 않은 것이다. 자연히 인연에 응할 때에 활발하고 활발한 것이다. 이와 같음을 얻지 못한다면, 또한 세간의 속된 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량이 미치지 못한 곳을 돌이켜서 사량하여 보아라.
어느 곳이 사량이 미치지 못한 곳인가.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묻기를,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하니, 조주스님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이 하나의 글자에 어떠한 기량이 있는 것일까?
청컨대 안배하여 헤아려 보도록 하라. 계교와 안배를 놓아둘 곳이 없을 것이니, 다만 뱃속에서 번민하여 마음에서 번뇌할 때가 바로 좋은 시절이어서 제8식이 서로 차례로 행하지 않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깨달은 때에는 놓아버리지 말고 다만 '무자(無字)를 들어야 한다. 이를 이끌어 오고 이끌어가면 생처(生處,낯선 곳)는 스스로 숙처(宿處,익숙한 곳)가 되고 숙처(宿處)는 스스로 생처(生處)가 될 것이다."
고 하였으니, 대체로 일용 인연처에서 살피고 살피는 것이 반조가 아니겠는가.
사량진로(思量塵勞)의 마음을 가지고서 '누자(無字)'상으로 돌아가 이를 들어서 놓지 않는 것이 화두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종고선사 또한 사람들에게 반조하는 것으로써 대략(大略)만을 가르쳐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분명하고 분명하게 말씀하시기를,
"보리열반과 진묘여불성(眞妙如佛性)이 문득 현전(現前)하여 생처(生處)는 스스로 숙처(宿處)가 되고 숙처는 스스로 생처가 될 것이다." 라고 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살펴본다면, 화두를 드는 것과 반조하는 두 가지의 공부에서 그 효험을 얻음이 어찌 깊고 얕음이 있겠는가.
옛 사람이 이와 같이 가르쳐 준 기연을 하나하나 낱낱이 들어 말할 수는 없으나 모두 반조와 간화(看話)로서 차별상을 가지지 않았거늘, 오늘날의 학인들이 서로가 공격하여 엉터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느 곳에서 이처럼 배워왔는가.
혹자는 본분화두에 따라서 여법(如法)히 참구하다가 조금 쉬워진 곳이 있으면 곧 만족하다고 생각하여 다시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조금 이로(理路)를 섭렵해보았다 하면 곧 이를 쓸어버리고자 하듯 발자취를 없애니, 이는 불조(佛祖)의 가르침 가운데 무한한 방편이 모두 의리(義理)에서 나와 진흙에 들어가고 물에 들어가 사람들을 위하여 철저하게 큰 방편을 삼은 줄 알지 못함이니, 이러한 사람들은 냉담무위(冷淡無爲)의 깊은 구덩이 속에 빠져 꼼짝도 하지 않는 자이다. 혹자는 반조의 법문으로써 여실히 참구하다가 조금이라도 응집된 기미가 있으면 스스로 얻었다고 생각하여 다시금 자세히 살펴보지 아니하고 기이한 생각을 가져 사람을 만나면 곧바로 도리를 말하고 지견을 나타내니, 이는 납승가(衲僧伽)의 본분정령(本分正令)이 부처를 삶고 조사를 삶으며 뼈에 사무치고 골수에 사무쳐 거듭 거듭 모조리 명근(命根)을 끊어버리는 참 수단일 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 사람은 문호(門戶)의 빛과 그림자를 잘못 알아서 구경(究竟)의 연락처로 삼은 것이다.
만일 이와 같이 하고서 방치한다면, 우리 부처님의 바른 종지가 거의 땅에 떨어질 것이니 애통하고 애석한 일이 아니겠는가.
생각이 여기에 미침에 그대가 물은 바는 때에 맞게 힘써야 할일을 바로 알고서 물은 것이라 하겠다. 내 비록 얇은 지식으로 공부항 게 없으나 어떻게 한 마디 말로 분명한 것을 가려서 말류(末流)의 폐단과 고질병을 구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나도 모르게 이와 같이 갈등하노라.
그러나 옛 사람이 말하기를,
"학인은 다만 활구(活句)를 참구할지언정 사구(死句)를 참구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으니. 사구(死句)는 이로(理路)와 언로(言路)와 견문과 이해와 사상이 있기 때문이며, 활구(活句)는 이로(理路)와 언로(言路)와 재미와 모색이 없기 때문이다.
참선을 하는 도인이 반조와 간화를 막론하고 여실히 참구하면 마치 한 덩이의 불과 같아서 가까이 하면 얼굴을 태우게 됨과 같으리라.
도무지 불법의 지해(知解)를 붙일 곳이 없으리니 어느 겨를 에 화두니, 반조니, 같으니, 다르니 하는 허다한 것들을 논할 수 있겠는가. 다만 한 생각이 앞에 나타나 투철하게 관조하여 남음이 없으면 백천 법문과 무량한 묘의(妙意)를 구하지 않고서도 원만하게 얻어서 여실히 보고 여실히 행하여 여실히 써서 생사(生死)에 큰 자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니 오로지 모든 생각들이 여기에 있기를 바라는 바이다.
제11문 : 온 누리의 사람들이 색을 보고 색을 초월하지 못하고, 소리를 듣고 소리를 초월하지 못하니, 어떠한 것이 소리와 색을 초월하는 것입니까?
제 11답 : 성색(聲色)을 초월하여 무얼 하려는가?
제12문 : 이미 소리와 색을 초월하였다면 반드시 공부를 하여야 할 것이니,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른 공부입니까?
제12답 : 벌써 삿됨이로다.
제13문 : 이미 공부를 하였다면 반드시 공부가 무르익어야 할 것이니, 공부가 무르익을 때에는 어떠합니까?
제13답 : 밥이 익는 것은 그럴싸하지만 공부가 익는 것은 아니다.
제14문 : 이미 공부가 무르익었다면 다시 더욱 콧구멍을 잃어야 할 것이니, 콧구멍을 잃어버릴 때는 어떠합니까?
제14답 : 공부가 무르익기 전에도 또한 콧구멍이 있는가,없는가?
제15문 : 콧구멍을 잃어버리면 냉랭하고 담담하여 전혀 맛이 없고 힘이 없어 의식이 미치지 못하고 마음이 행하지 않는 이러한 때에도 또한 환신(幻身)이 사람에게 있는 줄을 알지 못한다 하니, 여기에 이르러서는 어떠한 시절입니까?
제15답 : 환화공신(幻化空身)이 곧 법신(法身)이요, 무명실성(無明實性)이 곧 불성(佛性)이다.
제16문 : 공부가 이미 동정(動靜)에 사이가 없고 자나깨나 항상 한결같아서 부딪쳐도 부서지지 아니하고 휩쓸려도 잃지 아니하여, 마치 개가 뜨거운 기름솥을 넘보는 것처럼 핥으려고 해도 핥을 수 없고 버리려 해도 버리지 못할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제16답 :절대 자만하지 마라.
제17문 : 갑자기 120근의 짐을 부려버리는 것처럼 졸지에 꺾이고 갑자기 끊어진 때에 이르러서는 어떠한 것이 자성(自性)입니까?
제17답 : 장한(張翰)이 강동으로 떠나가니, 바로 가을 바람이 불어 온 때이다.
제18문 : 이미 자성을 깨쳐다면 반드시 본용(本用)과 응용(應用)을 알아야 할 것이니,어떠한 것이 본용과 응용입니까?
제18답 : 몸을 감춘 곳에 자취가 없고, 자취가 없는 곳에 몸을 감추지 말라.
제19문 : 이미 본성의 작용을 알았다면 생사를 초월해야 하니, 눈빛이 땅에 떨어질 때 (죽음을 말함)에는 어떻게 초탈해야 합니까?
제19답 : 잠꼬대 하지 말라.
제20문 : 이미 생사를 초탈하였다면 갈 곳을 알아야 할 것이니, 사대(四大)가 각기 흩어짐에 어느 곳을 향하여 가야 합니까?
제20답 : 일면불(日面佛), 월면불(月面佛)이니라.
제21문 : 바로 이와 같은 사람이 온다면, 어떻게 제접하시겠습니까?
제21답 : 그에게 대도(大道)를 체득하도록 하여줄 것이다.
또 물었다.
"이미 이러한 사람인데, 어떻게 대도(大道)를 가르쳐 줄 수 있습니까?
답하였다.
"다만 이 하나의 봉합(縫合)을 오히려 어찌할 수 없다."
다시 물었다.
"위에서 말한 스물한 가지의 대답은 철저하고 철저하지만 이후의 한 방망이는 어떻게 상량(商量)히시렵니까?
답하였다.
양화병(養化柄)을 치면서 말하기를,
"무슨 견해를 일으키는가."
또 물었다.
"나를 잘못 치지 마소서."
답하였다.
"그만두어라. 그만두어 - - - - 말하지 말라. 나의 법은 오묘하여 생각하기 어렵다."
- 한암선사 법문집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