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시슈타 요가] 릴라의 이야기(1)
라마가 물었다.
성스러운 분이시여! '나'와 '세상'이라는 미혹된 개념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어떻게 일어났습니까?
바시슈타가 대답했다.
모든 것에 지성이 똑같이 깃들어 있듯이, 모든 것은 늘 그리고 모든 면에서 창조되지 않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참나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란 표현을 사용하는데, 그것은 말의 형태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오로지 무한한 의식 즉 브라만만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팔찌와 금, 파도들과 물 사이에 아무런 구분이 없듯이,
우주와 무한한 의식 사이에도 아무런 분리가 없습니다.
무한한 의식만이 우주입니다.
팔찌가 금으로 만들어졌지만, 금이 팔찌로 만들어진 것은 아닌 것과 같이,
우주로서의 우주는 무한한 의식이 아닙니다.
사람과 그의 수족을 하나이며 같다고 여기듯이,
우리가 모든 존재들로서의 무한한 의식을 말할 때,
그 말은 무한한 존재 안에 어떤 구분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무한한 의식 안에는 자신의 무한한 본성에 대한 비인식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무한한 의식은 '나'와 '세상'으로 나타나는 듯이 보입니다.
조각되지는 않았지만 대리석 석판 속에 어떤 이미지가 있듯이,
'나'와 '세상'이라는 개념은 무한한 의식 안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고요한 바다에 파도들이 잠재적인 상태로 있듯이,
세상은 무한한 의식 안에 잠재적인 상태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이 세상의 창조로 알려져 있습니다.
'창조'라는 단어가 이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떠한 창조도 지고의 존재 혹은 무한한 의식 안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무한한 의식은 창조에 관여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서로 분리된 관계에 있지 않습니다.
바람이 그 자신의 움직임과 다르지 않듯이,
이 무한한 의식은 지성과 다르지 않지만,
이 무한한 의식은 그 자신의 가슴 안에서 그 자신을 지성이라 여깁니다.
실재하지 않는 구분이 생기는 바로 그 순간, 그 의식 안에 공간이라는 개념이 일어납니다.
의식의 힘 때문에 의식은 공간 혹은 에테르라고 알려져 있는 원소로서 나타납니다.
나중에 그것은 스스로 자신을 공기라고 믿으며, 다음에는 불이라고 믿습니다.
이러한 개념으로부터 불과 빛의 모습이 생깁니다.
그것은 나아가 맛이라는 내재적 기능을 가진 물의 개념을 가져옵니다.
그리고 그것은 냄새라는 내재적 기능과 고형의 특성을 기진 흙이 자신이라고 믿습니다.
이렇게 해서 물과 흙 원소들은 그것들 스스로가 드러난 것처럼 보입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하였다.
동시에, 같은 무한한 의식은 눈을 백만 번 깜박이는 것에 해당하는 한 단위의 시간 개념(진동)을 자신 안에 가졌습니다. 이것으로부터 네 시기가 한 주기로 구성되는 시대들이라는 시간의 척도로 발전됩니다. 그것이 한 우주적 창조의 수명입니다.
무한한 의식 그 자체는 이것들 안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무한한 의식에는 모든 시간 척도의 본질이 일어났다가 꺼지는 것이 없으며, 시작, 중간,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무한한 의식만이 늘 깨어 있고 깨달아 있는 실재입니다.
창조물과 함께 해도 그것은 변하지 않은 채로 있습니다.
그 무한한 의식만이 이 창조물의 깨닫지 못한 나타남입니다.
이 창조물 이후에도 무한한 의식은 항상 같은 채로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참나에 의해 참나 안에서 의식이 절대적 브라만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그때 그는 마치 하나의 에너지가 자신의 모든 수족에 있는 것처럼,
참나를 모든 것으로 경험합니다.
이 세상의 모습이 의식의 나타남인 한 그리고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한,
이 세상은 실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마음과 감각기관들로 이해될 때, 그것은 실재가 아닙니다.
바람이 움직일 때, 바람은 실재라고 지각됩니다.
움직임이 없을 때,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모습은 실재와 비실재 둘 다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삼계의 이 신기루 같은 나타남은 절대적 브라만과 다르지 않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싹이 씨앗 안에, 흐름이 물 안에, 부드러움이 우유 안에, 매운 맛이 고추 안에 있듯이,
창조물은 브라만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무지 속에서는 창조물이 브라만과 다르고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절대적 브라만 안의 순수 투영으로서의 이 세상이 존재합니다.
이렇게 된 데는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창조물에 대한 개념이 있을 때, 창조는 존재하는 듯이 보입니다.
자기 노력을 통해 창조되지 않음에 대한 이해가 있을 때, 아무런 세상이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그 어떤 것도 창조된 적이 없습니다.
아무 것도 끝에 이르지 않습니다.
절대적 브라만이 모든 것이며, 지고의 평화이며, 태어나지 않음이며, 순수 의식이며,
영원입니다. 세상들 안의 세상들이 매 원자 안에 나타납니다.
무엇이 원인이 될 수 있으며, 이것들은 어떻게 일어납니까?
'나'와 '세상'이라는 개념들로부터 얼굴을 돌릴 때, 그 사람은 해방됩니다.
'나는 이것이다'라는 개념이 여기에 있는 유일한 굴레입니다.
무한한 의식을 우주의 이름없는, 형상없는 바탕으로 아는 이들은 반복되는 역사인 삼사라에 대해 승리를 거둡니다.
- 스와미 벤까떼사난다 지음, 김병채 옮김 <바시슈타 요가> 슈리 크리슈나다스 아쉬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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