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 가르침/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

라메쉬 발세카의 어느 날, 아주 특별한 경험

무한진인 2024. 2. 7. 22:45

 

강의 도중 마하리지가 정기적인 방문객 중에 한 사람을 지적하여 개인적 반응을 묻는 것은 드문 일이다. 그가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당신의 마음 속에 확고히 남아 잇는 내 가르침 중에서 무엇을 특별히 간직하고 있는지 말해 보겠어요?" 또는 "내가 하는 말을 듣고 당신의 진정한 주체에 대해 확실한 결론을 내게 되었나요?"

 

어떠한 말이 되었든 마하리지가 하는 말은 무심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그가 그러한 질문을 특정한 사람에게 하는 특별한 이유가 뭔지를 생각하려 한다는 것은 아무 쓸모없는 일이다.

아무튼 그러한 마하리지의 질문에 대해 즉각적으로 대답한다는 것은 퍽으나 당혹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말하는 것을 주의 깊게 듣고 난 후에나 확신할 수 있는 것이며, 즉각적으로 질문에 응답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것에 대하여 적절한 방법으로 스스로 참구해 보지 않았다는 고백이나 마찬가지다.

 

바로 이같은 일이 그날 일어났다.

마하리지는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한 사람에게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아주 박식한 사람이고, 꽤 오래동안 인내심을 가지고 집중하여 깊은 관심을 갖고 내말을 들어 왔습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전달하려고 하는 핵심이 뭔지 한번 말해 보세요."

 

그 사람은 대답을 하려고 눈에 띄게 애를 쓰고 있었지만 뭔가 딱부러지게 대답하지 못하고 있었다.

상당히 오랫동안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으로 보아 마하리지는 그 대답에 특별한 흥미를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방안은 아주 조용했는데 바로 그 순간 내(발세카) 마음 속에 하나의 대답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무언가를 찾는다는 생각이 계속되는 한 각성은 일어날 수 없다.'

 

강의가 끝나고 다른 방문객들은 다 돌아가 나와 나의 친구인 물라파탄 만이 마하리지와 남게 되었다. 나는, 아까 우리가 그 사람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아주 분명한 대답이 떠올랐으나 강의 도중 뭔가를 말하는게 적당치 않아서 가만히 있었노라고 말했다.

마하리지는 그게 뭐냐고 물었고, 나는 그 질문을 받자마자 내게 떠오른 대답을 말했다.

그러자 마하리지는 다시 한 번 말해보라고 했다.

나는 좀 더 천천히 그리고 분명하게 말했다.

나의 대답을 들은 마하리지는 만족한 듯이 미소를 머금고 눈을 감은 채 일이 분 가량 가만히 앉아 있다가 물라파탄에게 나의 대답에 대해 무엇을 말해야 좋겠냐고 물었다.

그가 특별하게 말할 것이 없다고 했으므로 그 문제는 그 상태 그대로 남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갖는 또 다른 일이 있었다.

어느 날 마하리지의 강의를 통역하는데 다른 날보다 훨씬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되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통역을 하고 있었는데 마하리지가 갑자기 통역을 멈추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것도 알아채지 못했고, 옆에 있는 사람이 내 무릎을 쳤을 때야 마하리지가 방금 전에 내가 말한 부분을 다시 반복해 보라고 하는 것을 의식하게 되었다.

나는 내가 말했던 부분을 다시 상기시키느라 일이 분 정도 기억을 더듬으면서 마하리지와 대화를 했는데, 그 순간 묘하게도 내가 마하리지와 나의 대화 문맥에서 저멀리 떨어져 "나"가 없는 주시자가 되어 지켜봄으로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내가 다시 대화의 틀 속으로 돌아 왔을 때, 사람들은 당황한 듯 나를 바라 보았고 마하리지는 만족한 미소를 지은 채 제자리에 돌아가 앉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강의는 계속 되었고 나의 통역은 네게 보다 기계적으로 들렸다.

 

강의가 끝난 후, 강의 도중 내게 뭔가 특별한 일이 발생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아쉽게도 물라파탄이 참석하지 않았기에 그것에 대해서 물어볼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 강의의 테이프를 빌렸다.

녹음 상태는 아주 나빳고 외부 잡음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내 목적을 충족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테이프가 돌아가는 동안 나는 명상을 하고 있었는데 그 순간 강의 도중 발산되었던 것들이 내 기억 속으로 쏟아져 들어 왔기 때문이다.

모였던 사람들이 놀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나는 마하리지에게 아주 평온한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만일 내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의식하고 있었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테이프를 들어보니 방문객들을 놀라게 한 것은 말이 아니라 확신에 찬 어조였다.

그 대화의 마지막 부분의 사실로부터 나는 만족과 평안함을 느낄 수 있었는데, 마하리지가 기뻐했다고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지극히 행복하고 만족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마하리지와 나 사이에 오갔던 대화는 다음과 같았다.

 

마하리지 : 방금 말한 부분을 다시 반복해 보겠나?

 

발세카 : "나는 세계가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의식이다. 그러므로 드러난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것, 그 어느 것도 확실히 나 아님이 없다 "라고 말했습니다.

 

마하리지 : 어떻게 자네가 "모든 것'일 수 있지 ?

 

발세카 : 선생님, 내가 어떻게 모든 것이 아닐 수 있습니까? 그림자가 있는 모든 것은 실체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거울에 비춰진 모든 영상이 어떻게 거울에 비춰진 영상 그 이상이나 그 이하 일 수가 있습니까?

 

마하리지 : 그렇다면 자네는 뭔가?

 

발세카 : 나는 특정한 어느 "것"일 수가 없습니다. 나는 오직 모든 것일 수 밖에 없습니다.

 

마하리지 : 그러면 자넨 세계 속에서 어떻게 존재하나? 어떤 모습으로?

 

발세카 : 선생님, 내가 어떻게 개체의 나로써 존재할 수 있습니까? 나는 모든 것의 시현이 반영되는 곳에 의식으로서 언제나 절대적으로 존재합니다. 존재는 오직 객관적이고 상대적으로 존재하므로 나는 개인적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참다운 '존재'는 '비존재'를 포함하고 나타남과 사라짐도 포함합니다. 그러나 참된 '나'는 언제나 존재합니다. 영원으로서의 내 절대적 현존은 한정된 세계 내의 상대적 부재입니다. 아니, 선생님, 그것에 대해서는 어떤 이기적인 것도 없습니다. 사실 이것이 동체화(同體化)될 때는 에고가 무너질 때 뿐입니다. 그리고 어느 누구라도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거기에는 그것을 "말할" 수 있는 어떤 "자"가 없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동체(同體)로서 일 뿐입니다.

 

마하리지 : 아주 좋군.

 

나는 강의가 끝날 때까지 방문객들의 질문과 마하리지의 대답을 계속 통역했다.

그 후에 마하리지가 상세히 설명했던 속박과 해탈의 주제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해 보았고, 그것들이 내 일상생활 속에서 어떻게 연루되고 있는지 명확히 하려고 하였다.

나는 마하리지가 자주 쓰는 "반추하다"하는 것 등, 내가 받아들였던 것들을 마음 속으로 요약 정리 하였다.

 

비개인적 자각이 지각력 있는 (대상으로 드러나 한계지어진 ) 것을 '나'라고 착각하여 스스로를 인격화 함으로써 주체를 객체로 왜곡시킨다.

속박이란 이러한 순수주체를 객체화 (무한한 잠재력을 제한하는) 하는 그릇된 동일시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해탈이란 이러한 그릇됨을 자각하여 실체로 회기함을 말한다.

결국 해탈이란 통각(通覺)이다. 달리 말한다면 거짓된 것을 거짓으로 바로 아는 것, 자아동일시가 거짓임을 바로 보는 것이다. 또한 해탈이란 드러난 것의 드러나지 않은 근본을 찾는 의식일 뿐이라고 바로 보는 것이다. 그것은 발견해 내는 "것"이 아닌, 찾는 자가 곧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의 깊은 이해 속에서 일상생활의 "나(개아)"란 과연 무엇이며 어떻게 연루되었는가?

"나"라는, 독립적으로 행동하는 개별적 존재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그러한 "나"가 장차의 어떠한 희망이나 의도를 충족시켜 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어떠한 의도를 그만 둔다면 어찌 심리적 갈등이 있겠는가?

의도하는 바가 없으면 까르마가 끼어들 여지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무엇이 일어나든 즉, 성취든지 좌절이든지 간에 감정의 개입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완전한 일치가 있을 것이다. 그러한 삶은 곧 무위의 삶(적극적인 의지도 없고 또한 소극적인 의지도 없는, 일부러 행하는 바도 없고 행하지 않는 바도 없는) 이 될 것이다.

오직 주어진 삶 동안 구하는 바도 피하는 바도 없이 무위적으로 살아, 이러한 한계지어진 삶은 적절히 사라져 버리고, 나를 절대적 현존으로 남게 할 것이다.

개념 뿐인 "나"가 더 이상 바랄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라메쉬 발세카 지음, 이명규 역 <담배가계의 성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