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 가르침/기타 비이원론 가르침

이원적인 생각(相)을 제거하기

무한진인 2024. 1. 30. 20:33

이원적인 상(相) 제거하기

 

한 청자(聽者)가 물었습니다.

"지금까지 브라흐만에 대한 설명을 들어왔고, 그 체험이 오긴 했지만, 그러나 아직도 환상에 대한 생각에 계속 끄달리고 있습니다. 브라흐만이 모든 현상계에 빛을 비춰서 환상 안에 있습니다. 이 이원성의 원리가 명확하게 이해되도록 어떻게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

 

스승이 대답합니다.

"이제 마음을 차분히 하고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정신을 집중하고, 브라흐만과 환상에 대한 설명을 잘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 브라흐만은 실재(實在)이다." 와 "환상은 비실재(非實在)이다."와 같은,이원적인 설명을 하는 것은,

그냥 말로 하는 마음의 지꺼림일 뿐입니다.

 

브라흐만과 환상을 둘 다 아는 것이 네 번째 뚜리아 상태인데,

그것은 모든 것을 알며, 모든 것을 관(觀)하는 주시자입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뚜리아 상태의 특징에 대해서 들어보십시오.

하지만 벽(장애물 대상)이 없을 때에 이해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상상력에 의한 창조물들과 판단은 마음 안에서 일어났지만,

그 마음 자체가 비실재라고 판명된다면,

이들 모든 사건의 목격자는 누구이겠습니까?

 

"주시자"와 "생기 에너지". "힘"은 브라흐만에게 속하는 속성들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 환상 때문에,

브라흐만에게 잘못 적용된 것임을 이해하십시오.

 

세 가지 유형의 공간을 말해 보자면,

사방에 펼쳐진 광대한 공간, 방 안의 공간, 항아리 안의 공간을 예를 들어 말할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속성이 브라흐만에게 주어질 때에는 환상이 실재하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환상이 실재한다고 생각하는 한은 브라흐만의 주시자가 있다고 가정합니다.

환상과 무지가 함께 소멸되면,

어떻게 그러한 이원성이 존재할 수 있습니까?

 

따라서 모든 것을 주시하는 마음이 없어지면,

앎 그 자체인 뚜리아 상태도 역시 사라집니다.

이원성으로 나타나던 마음이 그와 같은 마음이 되면,

이원성과 비이원성이라는 개념조차도 사라집니다.

 

이원성과 비이원성이라는 것은 마음의 상태 또는 주의의 촛점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원적인 마음 상태가 부재(不在)할 때,

어디에 무슨 이원성이라는 것이 있겠습니까?

 

어떤 상태도 없는 지혜(깨달음)라는 것은

브라흐만과 환상에 대한 생각이 제거되고 없어지면

깊은 충만감 그 자체입니다.

 

마음은 브라흐만과 환상에 대한 개념적인 심상(心相)을 가지고 있는데,

하지만 브라흐만 그 자체는 어떤 상(相)도 없는 무상(無相)입니다.

깨달은 진인은 이것을 잘 이해합니다.

 

마음과 지성을 초월하고, 생각을 초월하는 것을 직접 체험할 때,

어떻게 이원성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원성을 보면 브라흐만이 사라지고, 브라흐만을 보면 이원성이 사라집니다.

이원성과 비이원성은 모두 상상(생각) 안에서만 나타나는 것입니다.

 

환상을 제거하는 것도 상상력의 작업이며,

브라흐만을 그 자리에 그대로 두는 것도 역시 상상(생각)일 뿐입니다.

의심을 제거하는 것은 물론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상상(생각)입니다.

 

속박이라는 개념도 상상이며,만족한다는 느낌도 상상입니다.

또한 브라흐만이라는 상(相)을 기억하는데 도움이 되는 개념들도 상상일 뿐입니다.

 

상상(생각)은 이원성의 어머니이며,

원칙적으로 지식 그 자체도 역시 상상(생각)입니다.

속박과 해탈은 둘 다 상상 속에서 마음에 그려진 개념입니다.

 

상상력이 강렬하게 내달리면, 달리 존재하지도 않는 우주의 창조를 상상하며,

순식간에 상상할 수 없는 진아의 순수한 성품을 상상할 수가 있습니다.

 

한 순간은 위험을 상상하며 떠내려 가다가 ,

다음 순간에는 안정을 유지하고,

또 다른 순간에는 당혹스러운 마음 상태가 상상됩니다.

 

한 순간에는 이해하다가도,

그 다음 순간에는 또 무지하게 됩니다.

이 상상력이 만들어 내는 많은 변화과정을 스스로 자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상상력은 출생의 근본원인이고,

상상력은 믿음의 열매이며,

해탈을 주는 것도 상상력 뿐입니다.

 

위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상상력은 여러 측면이 있습니다.

만일 정신수행에 참여한다면 상상력이 성취감을 안겨 주는데,

그렇지 않으면 기본적으로 타락을 경험하는 근본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상상력만이 모든 것의 근본 원인이며,

그것의 뿌리가 제거된다면,

그것 자체가 브라흐만의 실현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자신의 체험 속에서 (법문을) 듣고, 반조하고,

스스로 검증하는 것이 올바른 깨달음을 가져다 주게 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환상에 대한 착각 현상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순수한 브라만에 대한 확신이 상상력을 제거합니다.

명확한 확신이 들면 의심은 추방되고 사라집니다.

 

햇빛이 나타나면 어둠이 소멸되는 것처럼,

진리의 빛 속에서 거짓된 상상력이 어떻게 남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지혜의 빛 속에서는 거짓 상상은 파괴되고,

이원성에 대한 생각의 일치성(조화성)도 무너져 내립니다.

 

상상력으로 상상력을 제거하십시오.

한 동물을 이용하여 다른 동물을 잡거나,

혹은 다른 화살로 하늘에 있는 화살을 쏘아 떨어뜨리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상상(생각)은 더 올바른 상상(생각)으로 간주될 수 있는데,

그 상상(생각)으로 잘못된 상상(생각)이 제거될 수 있습니다.

이 설명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주의깊게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올바른 유형의 상상의 특징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속성이 없는 것(무속성)으로 상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류의 상상력은 자신의 진아성품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도움을 줍니다.

 

진아 성품으로서의 자기의 정체성에 대한 지속적인 명상을 통해서 이원적인 생각이 해소되고,

비이원성의 지혜에 대한 확신을 얻게 되는데,

이를 올바른 상상이라고 부릅니다.

 

비이원성을 상상하는 것은 올바른 상상으로 간주되고,

이원성을 상상하는 것은 잘못된 상상으로 간주됩니다.

잘못된 상상이란 일반적으로 (탐진치에)오염되었거나 타락한 상상을 말합니다.

 

올바른 상상으로 여겨지는 어떤 것이 있다고 말하는 의미는,

그것이 비이원성을 향해서 굳건한 확신으로 이끄는 반면에,

잘못된 상상이라고 불리우는 것은,

이원적인 것을 상상하는 느낌 속에 (탐진치로) 오염되어 있는 생각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비이원적인 상상력이 활용될 때에 그것이 빛을 발하는데, 그 순간 이원성이 제거됩니다.

이원성이 사라지게 되면 잘못된 상상(생각)들도 이를 따라서 함께 사라지게 됩니다.

 

현명한 사람은 상상력이 또 다른 상상력에 의해 제거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잘못된 상상력이 사라지면, 나중에는 올바른 형태의 상상력만 남게 됩니다.

 

올바른 유형의 상상력을 가지고 자신의 진아 형상(無相)을 상상합니다.

자기의 진아형상을 상상할 때에 구도자는 진아와 하나가 되면서,

이내 상상력은 사라지게 됩니다.

 

상상력이 거짓이라고 알려지게 되면,

자연히 생각이 없어진 진아 형상(無相)이 됩니다.

그러한 진아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면,

이내 상상력은 완전히 소멸하게 됩니다.

 

진아에 대한 신념이 흔들리는 바로 그 순간에,

마치 해가 진 후에 사방을 뒤덮는 어둠처럼,

이원적인 상상력들이 솟아나서 올라 옵니다.

 

또한 지혜가 오염되면,

무지가 증가한다는 것에 대하여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수행자는 정신수행에 대한 법문을 듣는 것을

평상시에도 끊김없이 항상 유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제, 이 정도의 설명으로 충분한 것 같습니다.

모든 의문은 아래의 한 마디 말로 명백해집니다

"그대는 이원성 안에 나타나 보이는 상(相)이 아니다."

 

이전에 질문했던 의문이 말끔하게 해소됬으니,

이에 대한 담론은 이제 끝냈습니다.

이 설명을 듣고 있는 분들은 다음 절(節)에서도 어떤 의미를 설명을 하는지,

주의를 기울여서 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스승과 제자와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