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 가르침/기타 비이원론 가르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무한진인 2024. 1. 18. 21:08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한 청자(聽者)가 묻되,

"다른 것과는 전혀 다르다고 말해지는 이 충만감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무엇인지 자세히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벙어리가 설탕을 먹으면, 그 단맛을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설명해 주십시오,

우리가 이 충만감의 체험에 대해서 물으면 말로는 표현할 수 가 없다고 합니다.

누구에게 이에 대한 답을 물어 볼 수가 있습니까?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시는데,그 체험이 제게는 직접 다가오지 않습니다.

올바른 성찰이 저에게 확실하게 자리 잡을 수 있도록 그 방법을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이 한 청자(聽者)가 질문을 했습니다.

이제 그 답변을 하겠습니다. 주의를 기울여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충만감이 있는 곳'이라고 불리는 그것은 단지 경험일까요, 아니면 순수한 진아성품(Swaroopa)일까요?

나는 그것을 여러분들이 말로 알아차릴 수 있도록 설명해 보겠습니다.

 

말로는 표현 할 수 없지만, 말로 하지 않고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을 상상하거나 생각하려고 하면, 그 자체가 파괴됩니다.

 

베다의 위대한 비의(秘意)인 절대 진리, 파라브라만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이해되려면, 성인의 가르침을 공부하는 모임에 가입해서 함께 공부할 때만 가능합니다.

 

이제 나는 깊은 지복감(至福感)을 주는 것에 대하여 말하겠습니다..

설명할 수 없는 실재(實在)의 체험(깨달음)으로 부터 나오는 말을 들어 보기 바랍니다.

 

설탕의 단맛을 알기 위해서는 설탕을 주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설명되고 있지만,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드구루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자신을 탐구하는 사람은 사드구루의 가르침을 통해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사람은 실재(實在)에 대한 자연스러운 이해와 체험을 얻기 위해서 계속해서 사드구루의 가르침을 받습니다.

 

처음에는 확고한 지성을 가지고 자신을 탐구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갑자기 삼매(순수존재 속에 흡수됨) 속에 들게 됩니다.

 

자신의 근원을 올바로 탐구할 때, 개인적인 '나'라는 느낌이 환상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마지막 남는 것이 지복감,그 자체인 실재(實在)입니다.

 

'일차적 전제(前提)'는 진아가 모든 것의 주시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베다에서 말한 바 있습니다.

최종적인 이해는 깨달음을 성취한 이들만이 도달합니다.

 

모든 것의 주시자가 된 상태로 '최종적 깨달음'에 도달하려고 애쓴다면,

이것은 단지 하나의 상태에 지나지 않지만, 반면에 진아는 어떠한 상태도 초월해 있습니다.

무상태(無狀態)입니다.

 

대상에 대한 앎이 사라지면, 보는 자는 개인의 보는 자로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때에 '나'라는 생각인 에고도 사라집니다.

'나'라는 느낌이 사라지는 곳은 그 자체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충만감의 체험을 나타낸 것입니다.

 

이 담론(談論)은 지극히 심오하고 비범한 사려깊음을 표현한 것 중의 하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이란 모두 환상에 속해 있으며, 피상적인 것입니다.

그 의미만이 심오한 것입니다.

 

말 때문에 뜻이 이해됩니다.

일단 뜻이 이해되면 그 말 자체는 쓸모없게 됩니다.

말을 전달하는 단어에는 뜻이 충만해 있지만, 단어 자체는 거짓입니다.

 

말 때문에 사물이 분명해집니다.

그 물건을 보자마자 말은 사라집니다.

말은 공허한 반면, 뜻은 지속됩니다.

 

곡물은 껍질 때문에 보호됩니다.

곡식(알맹이)은 보관하고, 껍질은 버립니다.

마찬가지로 말은 껍질과 같고, 뜻은 곡식(알맹이)입니다.

 

곡식의 알맹이인 본질은 겉껍질 안에 들어 있습니다.

곡식을 벗겨서 빈 껍질은 버립니다.

마찬가지로 파라브라만과 관련해서도 말은 버려진 겉껍질과 같습니다.

 

그 뜻을 분명하게 전하는 말의 비유는 완전히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말을 하고난 뒤에는 그 뜻이 명백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어떤 말을 전달하기 이전에도 그 뜻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의 겉껍질을 버리고,

"진아 체험'이라는 순수한 의미의 알맹이를 취하십시오.

 

"보이는 것과는 다른 것"이라는 문장을 사용할 때,

이것은 사용한 단어들에 의해서 의미가 전달됩니다.

이 문장의 의미가 이해되어야 하며,

그것이 "순수한 이해"입니다.

 

이처럼, "순수한 이해"는 그 자체가 일차적인 전제로서 이해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으며,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진아체험'인 것입니다.

 

때로는 하늘이 체(筛)를 통해서 부자연스러운 것을 걸러 낸 후에 마지막 남는 것이 본질의 체험이라고는 말 하지만, 그러나 이러한 관념도 단순히 상상일 뿐입니다.

 

진실이 아닌 것은 상상에 의해서 태어난 것들인데,

어떻게 그 속에 실재(實在)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실재(實在)란, 전혀 경험되는 것이 없습니다.

 

이원성 없이 경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틀린 말입니다.

이런 이유때문에 (하나됨 속에서는) 체험하는 것이 없습니다.

 

경험을 한다는 것은 세 가지 요소 (경험자, 경험, 경험의 대상)가 있어야 되지만,

비이원성 속에서는,이원성이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말을 넘어서'라는 말이 적절한 것입니다.

[譯註 : 삼 요소, 즉 'Triputi'는 경험이 있을 때는 항상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관찰자, 관찰, 관찰대상,, 또는 아는 자, 앎, 알려진 것, 등의 세 가지 측면이 그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시바신의 상징에는 세 가지 양상이 모두 그의 안에 존재함을 나타내는 세 개의 줄이 상징적으로 마크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동시에 그것들을 모두 넘어서 있습니다.]

 

낮과 밤이 나타나는 근본 원인은 태양입니다.

만약 태양이 제거된다면, 낯과 밤이라는 것에 대하여 무엇을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말과 침묵에 대한 관념은 옴카르(옴(Ohm 소리 파동의 잔향)에 의해서 존재합니다.

옴 소리 파동 자체가 없으면 어떤 발음을 낼 수가 있겠습니까?

 

경험과 경험자는 환상 때문에 존재합니다.

만약 환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체험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들이 '나'가 하나 있고, '대상'은 다른 것이라고 말한다면,

거기에는 차별화(분리의 경험)가 있습니다,

오직 경험이 있어야만 차별화에 대하여 말할 수가 있습니다.

 

개별성의 어머니(마야)는 아이를 못낳는 여인의 딸처럼 거짓입니다.

따라서 개별성은 없습니다.

일체성이 본래적인 것입니다.

 

태어나지 않은 사람은 잠을 자고 있었고,

꿈에서 그는 사드구루에게 가서 세속 삶의 슬픔을 이겨내는 꿈을 보았습니다.

 

사드 구루의 축복으로 세속삶의 존재가 거짓으로 알려져습니다.

진아지(眞我知)를 습득한 사람이 "무지의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하고 묻습니다.

 

존재한다는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무(無)로 사라졌습니다.

그러므로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모두 사라졌을 때,

마지막 남아 있는 '그것'은 아무 것도 없는 무(無)라고 말할 수도 없고,

어떤 상태라고 말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무(無) 너머에는 지복 그 자체인 순수지혜가 있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있는 그대로의 존재상태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비이원성에 대한 설명으로 이원성이 해체됩니다.

진아지(眞我知)에 대한 담론이 진행될 때에, 각성(깨달음)이 일어납니다.

 

듣는 사람들은 내면에서 이해가 되고, 진실한 만족을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말하는 내용에 대한 의미를 마음 속으로 계속 숙고하고,주의가 바짝 깨어있을 것을 요구받습니다.

 

진아지(知)에 대해서 말한 것은 무엇이든지 모두 꿈처럼 사라졌습니다.

남아 있는 것은 형언할 수 없는 지복감입니다.

 

경험도 없고, 경험자도 없으며,

말없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그는 깨어 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꿈 속의 꿈을 보았고, 깨어남에 의해서 깨어났습니다.

말(言)은 거기에 없으며, 깨어남의 끝은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 근원에 대한 설명은 내면에서의 충만감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간단하고 직접적인 방법으로 다시 주어질 것입니다.

 

그러자 제자가 요청했습니다.

" 예 스승님, 지금까지 설명하신 내용을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십시오.

이 지복의 체험에 대한 징표를 알수 있도록 다시 한번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태어나지 않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는 꿈을 어떻게 보았습니까?

꿈 속에서 어떻게 설명이 되었습니까?"

 

제자의 성실함을 알아차린 스승이 대답해 줍니다.

이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좀 더 집중해서 그 답변을 들어 보십시오.

 

친애하는 제자들이여, 정신 차려서 들어보시오.

태어나지 않은 이가 그대 자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대는 꿈 속에서 꿈을 보았습니다.

자, 이것에 대하여 말해 보겠습니다.

 

꿈 속에서의 꿈이라는 생각은 이 세속의 삶이라는 것을 이해하십시오.

그대는 여기에 와서 영원함과 일시적인 것에 관련된 사려깊은 통찰을 활용했습니다.

 

사드구루에게 순복한 그대들은 실제적인 체험에 대한 확신을 얻기 위한 순수한 담론 속에 참여 하고 있으며, 이것이 지금 바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담론의 경험 속에서, 여러분은 지금까지 말한 내용이 무엇이든간에 거짓이었음을 이해했습니다. 가장 깊은 고요함 속에서 쉬고 있으면, 여러분은 깨어 있음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것입니다.

 

지식에 대한 이야기의 모든 소음이 가라앉을 때, 그 의미는 명백해집니다.

이것에 대하여 사려(思慮)해 보면 내면의 체험이라는 것이 자연스럽게 존재합니다.

 

그대들은 자기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느끼면서,

'이 깨달음의 체험이 나에게 일어났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망상에 불과합니다.

 

경험자가 경험 속에서 해체되어, 경험자가 없는 경험이 있다고 말하는 것,

이것 역시 꿈의 일부분이며, 아직까지 깨어나지 못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나의 친애하는 제자들이여 !

 

만약 꿈에서 깨어난 후 "나는 꿈에서 태어나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꿈의 효력과 꿈의 기억과 감정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만약 꿈 속에서 깨어있다고 느낀다면, 이것은 꿈 속에서의 경험을 표시한 것입니다.

깨어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여기지만, 이것은 여전히 망상의 본질입니다.

 

깨어있음은 이런 것들을 초월해 있습니다.

분별력조차 작용하지 않는 것을 어떻게 묘사할 수 있습니까?

 

이러한 충만감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음을 이해하십시오.

그것이 말이 없음(고요,無心)의 징표임을 알아차리십시오.

 

완전한 충만감이란 이와 같습니다.

묘사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십시오.

이 설명으로써, 말없는 침묵의 상태(無心) 속으로 들어 오게 되는 것입니다.

 

                                                                      <스승과 제자와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