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아지(眞我知)의 성취
브라흐만의 성취
"진아와의 동일화"(Sayujya Mukti)인 해탈에 도달하는 가르침의 징표에 대해서 들어 보십시오,
이것에 대해 여러가지 견해를 찾아 헤메고 다니는 것은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브라만에 대한 지식(眞我知)"이 없는 가르침은 중요성이 없습니다.
먹지도 못하는 알곡이 없는 빈 쭉정이와 같습니다.
그런 가르침은, 벼이삭이 없는 벼를 타작하거나, 버터가 없는 우유를 휘젓거나,
쌀을 씻고 나서 쌀 자체를 가져가지 않고, 쌀 뜨물을 마시는 것과 같이 아무 쓸모도 없습니다.
어떤 과일의 딱딱한 겉껍질을 먹거나, 즙을 짠 후에 사탕수수 찌꺼기 섬유질을 씹거나,
알맹이는 버리고 코코넛 껍질만 먹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브라만의 지식이 없는 가르침은 불필요한 문제를 일으킵니다.
현명한 사람이 형상이 없는 것을 취하고, 형상이 있는 것은 포기하는 것,
그것의 핵심이 무엇일까요?
이제 독자들에게,
속성이 없는 브라만에 대하여 설명하는 동안에,
내면의 마음으로 주의깊게 들어보라고 요청합니다.
우주의 구조는 오 원소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것들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십시오.
시작과 끝에는 불멸의 영속성을 보여주는 속성없는 브라만만이 오직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십시오,.
그 밖의 모든 것은 오원소로 구성되어 있어서 파괴될 수가 있습니다.
이들 오원소를 들여다 보면, 마치 유령처럼 덧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것들을 어떻게 신이라고 부를 수가 있겠습니까?
만일 인간존재를 덧없는 것이나 유령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인간을 천박하게 모욕적으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譯註 : 부타(Bhoota)는 '유령'을 뜻하는 단어인데, '오 원소'를 뜻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이 말 장난은 원소가 실체가 없거나 유령같은 것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됩니다. 5원소라는 말은 판차부티(Panch Bhooti)입니다. (Pancha는 5 이고, bhooti는 원소의 복수형임) ]
마찬가지로, 브라마 등 다른 신들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우주의 창조주인 그 위대한 파라마트마에 대해서 물질의 기본 원소와 비슷하다는 것은 말도 안됩니다.
신이 물질원소와 같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설명입니다.
진실하고 위대한 존재만이 올바로 이해합니다.
우주의 신(Jagadisha)은 지(地),수(水),화(火),풍(風),공(空)의 다섯 가지 원소 안에 있지만,
그것들의 밖에도 존재합니다.
오 원소는 파괴될 수 있지만, 진아는 파괴될 수 없습니다.
이름을 가진 모든 것은 완전히 환상이라는 것을 이해하십시오.
이름이나 형태를 초월한 것은 실질적인 체험을 통해서 본질로써 이해됩니다.
이 눈에 보이는 현상세계가 8가지 측면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8중 창조'라는 이름이 붙어졌습니다.
여덟 가지 측면은 오원소(지수화풍공)와 세 가지 속성(라자스,타마스. 사트바) 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세계 전체는 파괴될 수 있으며,
냐니(Jnani,진인)은 영원한 속성없는 브라만을 깨닫는다고
베다와 우파니샤드에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기로 부숴버릴 수도 없고,
불에 태워버릴 수도 없고, 물에 녹일 수도 없습니다.
바람에 날려 버릴 수도 없고, 결코 떨어지거나 나빠지지도 않고,
일어날 수도 없고 숨겨질 수도 없는 '그것'이 절대 실재인 파라브라만입니다.
색깔도 없고, 모든 것과 전혀 다르지만,
영원히 홀로 계속해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전체에 두루 편재해 있습니다.
그것은 가장 미묘한 형태로 팔방(八方)에 현존합니다.
우리의 눈은 모양이 있는 것만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눈에 은밀히 숨겨져 있는 보이지 않는 '그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모양이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헛것이며,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진실임을 이해하십시오.
스승의 담론 속에서 이 말의 의미가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그것은 이해되어져야 하며,
볼 수 없는 그것은 보여져야 하며,
알수 없는 그것은 알려져야 합니다.
이것은 오로지 분별력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감추어진 것은 드러내져야 하며,
달성될 수 없는 것은 달성되어져야 하며,
그리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인내심을 가지고 탐구해야만 합니다.
베다,브라흐마,그리고 신성한 뱀 쉐사가 묘사하려고 그렇게 애를 쓰다가 완전히 지쳐버린.
그 궁극의 절대 실재를 성취해야 합니다.
이제 "어떻게 그것을 성취할 수 있겠습니까?"라는 질문이 일어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아주 자연스럽게 주어집니다.
절대 실재는 진아지(眞我知)에 대한 구루의 담론을 듣는 것으로 얻어집니다.
그것은 지(地)도 아니고, 수(水)도 아니고, 화(火)도 아니고, 풍(風)도 아니고,
공(空)도 아니며, 색깔도 없으며 설명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神)"이라고 불려야 할 것입니다.
피상적인 성격의 사람들에게는 사람들로 가득찬 마을이 있는 만큼이나 많은 신들이 있습니다.
사람은 신에 대한 명확한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속성없는 신을 체험적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스스로 이것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깊히 성찰하고 탐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내 몸이다"라고 말할 때,
이 말을 하는 사람은 몸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이 내 마음이다"라고 말할 때,
이 말을 하는 사람은 마음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육체의 본질을 조사해 보면, 오원소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모든 원소가 사라질 때까지 각 원소를 하나씩 제거하다 보면,
오직 진아 만이 남게 됩니다.
'나'라는 것에게는 일정한 거처가 없습니다.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원소들은 따로 떨어져서, 모두 제 자리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육체는 오원소가 한 군데에 묶인 다발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세밀한 관찰해 보면,
한 군데로 묶여있는 원소뭉치 덩어리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 육체는 원소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것을 들여다 보면서 곰곰히 탐구해 보면,
영원한 진아만이 발견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나'라는 것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나'가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탄생이나 죽음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자신 스스로가 절대적 실재임을 볼 때,
덕이나 악 같은 것들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덕과 악, 죽음의 고통은 속성이 없는 '그것'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속성이 없는 진아상태 일 때 어떻게 탄생과 죽음이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은 육체를 자기라고 동일시하기 때문에 육체의식에 묶여 있다고 느낍니다.
분별력에 의해서 사람은 이러한 육체의 자기 동일시로부터 해방됩니다.
이것이 해탈상태의 성취라고 부릅니다.
자신이 속성없는 진아임을 아는 것이 삶의 완성입니다.
이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분별력을 사용하여 반복해서 마음을 탐구해 보아야 합니다.
잠이 깨면 꿈은 끝납니다.
적절한 분별력과 함께 주시하고 있을 때에 현상계가 사라집니다.
"진아 형상"으로 지속적인 머무름은 살아있는 존재에 대한 구원입니다.
자신을 진아와 동일화 해서,
분별력을 가지면 개별적인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자아 순복 또는 진실한 진아와의 동일성을 깨닫는 것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이해하십시오.
처음엔 영적인 담론을 듣고,
그 다음엔 (스승의 지시에 따라서) 사두구루의 발밑에서 봉사활동을 하다가,
그리고 마지막에는 사두구루의 축복을 통해서 "진아와의 동일화"가 됩니다.
이 "진아와의 동일성" 너머에는 영원한 절대 실재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참나가 항상 그 자체로 지니고 있는 내적인 이해입니다.
브라만에 대한 진아 깨달음으로 인해서 세속생활의 슬픔은 사라지고,
육체의 운명은 그것이 가야할 길을 적절하게 따라가며
힘들이지 않게 집착으로부터 포기가 됩니다.
이것을 진아 깨달음이라고 부릅니다.
이 진아 깨달음을 가지면 완전한 만족을 얻습니다.
헌신자는 절대 실재인 파라브라만과 뗄래야 뗄수 없게 됩니다.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일어나게 그대로 두십시오.
해야할 것이 무슨 일이든 그대로 하십시오.
이제 탄생과 죽음에 대한 의심은 마음 속에서 깔끔하게 해소되었습니다.
신과 헌신자가 하나임을 깨치면,세속적인 삶의 갈등과 관련된 고통이 사라집니다. .
주로 깨달은 성인이 주재(住在)하는 진아지(眞我知)의 명상단체에서 사트상(성인과의 직접대면상담) 을 유지하므로써 신을 깨치게 됩니다.
-스승과 제자 간의 대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