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 선사의 점차 수행 7관문
남천축 달마선사가 점차적으로 수행에 들어가는 관문 7개를 설정했다.
달마친설(親說) 여부는 결론을 못 내린 상태다.
내용으로 볼 때 북종선 신수계통 스님이 달마 이름을 빌어 서술한 것으로 추정된다.
누가 썼든지 간에 점수법 내용으로 괜찮다.
첫째 주심관문(住心關門), 마음을 머문다.
마음을 머물게 하기위해 초발심 수행자들에게 주로 권하는 수행법이 염불 주력 다라니 등이다.
흐트러진 마음을 하나로 모으기 위한 수행법이다.
그 같은 노력을 얼마나 계속해야 하는지 모른다.
스님들 중에는 애쓰지 마라, 인위적으로 무엇인가 하려들지 마라고 가르치는데 이는 잘못된 지도법이다. 산문에 갓 들어온 초발심자는 장소만 세속에서 옮긴 것 뿐 여전히 에고심 이기주의 아만 고정관념에 빠져있는데 이들에게 ‘구할 것도 득할 것도 없으니 애쓰려 하지 말라’고 가르치면 알아듣겠는가?
‘구할 것도 득할 것도 없는 마음’ 이지만 처음에는 마음을 모으기 위한 인위적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렇게 해서 거친 번뇌를 가라앉히는 것이다.
두 번째 공심관문(空心關門), 마음을 비운다.
마음이 본래 공적하다는 정견(正見)을 이치로는 알지만 회광반조(回光返照) 하면 실제로는 비우지 못했다. 실제 빈 마음을 만들려면 원래 들어와 차지하고 있던 권력 명예 색(色) 에고이즘 이런 것들을 ‘이제 남은 내 인생에서는 가치 없다’ 며 털어내야 하는데 그냥 안 털어진다.
새벽에 일어나 아무도 없는 캄캄하고 찬 법당에서 염불 주력 참회의 절을 하며 하염없이 눈물 흘리며 부처님께 참회하고 찬탄하는 과정을 거쳐야한다.
예불, 예경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불 하지 않으면 자신이 갖고 있는 소 한 마리를 내보내는 것이라고 했다.
옛날에는 소 한 마리면 전 재산이다.
선(禪)을 한다고 해서 종교적이지 않고 철학을 이야기해서는 수행이 안 된다,
시간만 나면 부처님께 참회해야 한다.
내가 어리석어 욕망에 눈이 멀어서 지금까지 세속에서 ‘나’라는 인상 아상에 젖어 살아왔음을 참회하고 생명을 소중히 다루지 못한 죄, 명예 권력 재물에 욕심을 갖고 갖지 못해 안달하고 질투하며 분노했던 지난날의 잘못을 참회해야한다.
그래서 이제는 청정한 삶을 살겠노라고 다짐하며 지금껏 갖고 있던 것들을 버려야한다.
그 버리는 과정이 새벽 도량석이요 예불이며 기도다.
셋째 무상관문(無相關門), 상을 세우지 않는다.
마음은 본래 공적 청정하기 때문에 어떤 것도 머무를 수 없다는 것을 익혀야한다.
처음에는 기도 염불로 참회해서 번뇌의 밭을 호미로 매서 믿음을 갖게 됐다.
그런데 믿음만 갖고 안 된다.
<열반경>에 믿음만 있고 정견이 없으면 배타적 투쟁적이 된다고 했으며 정견만 알고 종교적 믿음 신행이 따라주지 않으면 남을 속이게 된다.
자기 인격은 따르지 않으면서 번지르르한 말로 혹세무민하게 된다.
불교와 인연 맺게 될 사람도 처음에는 옳다고 접근했다가 언행일치 안 되는 것을 보고 실망해 돌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불종자(佛種子)를 끊게 하는 것이다.
반면 정견을 잘 모르고 믿음만 가진 사람들은 평생 종교생활만 하다가 나중에 역경계가 일어나면 견디지 못하고 종교를 바꾸게 된다.
‘본래 부처’ ‘본래 성불’은 최상승 대승인, 최고 근기에 달한 사람들 이야기이지 일반 중생들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다.
경계가 왔을 때 연생연멸 실체가 없는 것임을 알고 실천하기까지 깊은 사유와 경전공부, 참회기도 염불 예경 등 다양한 수행과 과정을 거쳐 도달하는 것이다.
이런 것이 종합적으로 어우러져야 다양한 근기들을 다룰 수 있는 절묘한 방편의 힘이 나올 수 있는 것이지 한 가지만 몰두해서는 할 수 없다.
인간사의 다양한 것을 섭수해 살아가듯 수행법도 전체가 다 어우러져야한다.
네 번째는 심해탈관문(心解脫關門)이다.
주심 공심 무상 수행의 점차법이 다 녹아 심해탈문에 같이 들어온다.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서로 상즉상입(相卽相入)하는 것이다.
육바라밀을 일상생활 속에서 실현하는 것이 이 관문이다.
정견이 서있기 때문에 세속적인 원망, 상대적인 너와 나의 구분 같은 세계는 본래 청정무구한 자성이 살아가는 방법이 아님을 안다.
정견이 실제로 내 마음에 적용되도록 비춰보고 누가 나의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슬픔을 주고 괴로움을 주고 고통에 빠트리더라도 원망을 하지 않고 ‘내가 본심을 깨닫도록 경계를 주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심해탈관문이다.
마지막 경지에 가면 저절로 물 흐르듯 자연스럽지만 이 단계까지는 인위적으로 애를 써야한다.
경계를 돌아보면서 이 경계를 통해서 내가 해탈을 이루겠다 다짐하는 것이다.
낙엽이 나무에서 떨어져 낙담하고 있으면 소 돼지가 다 밟아 짓뭉개지만 지혜의 바람을 타면 나무 가지에 붙은 게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창공을 날게 된다.
이처럼 자기 마음 점검하는 것이 심해탈 관문이다.
다섯 번째는 선정관문이다.
선정에 대해 육조는 모든 경계가 실체가 없고 연생연멸임을 알고 절대 동하지 않는 것이 좌(座)이며 항상 자성청정한 마음을 관하는 것이 선(禪)이라고 했다.
참선은 반드시 좌선으로부터 시작한다.
초심에서 좌선을 익혀 마음을 고요히 하게 된 이후에는 동중선(動中禪)으로 간다.
좌선에서 다시 동중선으로 가야하며 동중선이 잘되려면 좌선이 잘 돼야 한다.
좌선에서 화두 의단을 얻어야 동중선에서 진의가 흐트러지지 않고 잘 되어간다.
좌선이 동중선에서 잘 펼쳐지는 것을 행주좌와어묵동정이라고 한다.
화두가 일상생활에서도 여여하게 될 수 있게끔 이타행하고 자신을 겸손하게 하고 화두를 굳건하게 다져야 화두하는 참모습이다.
여섯 번째는 진여문이다.
진여문 경계에 들어가면 행주좌와어묵동정에서 ‘정’의 힘을 얻었기 때문에 여기서부터는 인위적인 수행법이 안 들어간다.
여기서부터는 보아도 본 바 없고, 닦아도 닦은 바 없고 들어도 들은 바 없는 경지가 된다.
자연스럽게 됐기 때문에 닦는다는 생각 없이 조작한 바 없이 일상생활에서 무심하게 흘러가는 것이다.
어떤 역경계 마구니 외도를 만난다 해도 이미 그 모든 것들은 지나온 수행법으로 인해 저것이 모두 실체가 없고 거품이 없고 가치가 없음을 아는 것이다.
마지막 일곱 번째 지혜관문이다.
앞서 말한 주심 공심 무상심 심해탈 심정진이 모두 어우러진 것이 지혜관문이다.
주심에서 애썼던 것이 지금 와서 볼 때는 참 둔한 수행이었구나, 업장이 두텁다 보니 참 힘들게 공부 했구나 여겨진다. 하지만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은 앞선 기도 염불 하염없는 참회의 눈물 원력 이런 것들이 모두 발판이 된 것이다.
하나의 과일이 만들어지기까지 바람과 토양과 비와 심지어 고양이 울음, 엿장수 소리까지 모든 생명이 찬탄하고 축복해주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 과일은 세상의 모든 맛이 어우러져 진한 향을 갖게 된다.
점수 수행도 결국은 돈오돈수 돈오견성으로 가게 된다.
그래서 점수수행이 중요한 것이다.
아기가 걸을 수 있지만 바로 걷지 못한다.
엄마가 따뜻한 얼굴을 마주하며 손뼉을 치며 ‘아가야 이리 온’ 하면 반가움에 천천히 어렵게 발걸음을 옮겨가듯 그런 어머니의 마음처럼 자비를 갖고 대해야 한다.
기도 염불 참선이 모두 자비에서 나오는 것이다.
지혜문에 들어오면 불법(佛法)이 불법(佛法)이 아니다.
이미 이 사람에게는 모든 정해진 법이 없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금강경>에 이르기를 “여래가 여래가 아니기 때문에 여래라 하며, 불법이 불법이 아니기 때문에 불법이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아니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했다. 부처가 부처로서 그냥 부처로 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굳이 불교를 믿으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설우 스님 <단경 해설>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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