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진인 2023. 10. 20. 22:42

[본문]

"당신은 누구인가? 그는 누구인가?"라고 마음이 오래도록 밖으로 나가면서 묻는 태도를 버리고, 쉼 없는 큰 열망으로 자신을 표적삼아 자신에 대해 "나는 누구인가?"라고 묻는 것이 좋다네.

 

"나는 누구인가? " 하면서, 자신의 중심을 뚫고 들어가는 주의 깊고 예리한 의식으로 탐구하면,

"나, 나"라는 실재가 떠오르면서 "몸-에고"가 죽고, 하늘의 푸름 같은 겉모습들은 사라질 것이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의해 이원성에 속하는 모든 물음들이 소멸될 것이네.

(다른 것들에 대해서) '묻는 자기가 누구인가?'라는 그 물음은 (무적의) 브라마아스뜨라로서,

어두운 무지인 타자성이라는 겉모습을 소멸할 것이네.

브라마아스뜨라는 가장 위대하고 가장 강력한 신적 무기(브라마의 힘이 실린 일조으이 미사일)

 

"기만적인 감각기관들로 바깥 대상들을 보는 자(나)는 누구인가?"라고 물으며 탐구하여,

날뛰는 오만한 에고를 소멸하고 영구히 참된 지(知)로서의 지고한 안주에 머무르는 것이어야말로

개인이 참으로 해탈을 얻는 수단이라네.

 

"나는 누구인가?"라고 자신의 참된 성품을 탐구하는 개인은,

'나'가 없는 참된 자아로서 죽을 것이네.

 

[사두 옴] :

이것은 "강이 바다로서 죽을 것이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즉, 에고는 탐구를 통해서 죽을 것이고, 에고의 죽음에도 살아 남을 '그것'이

'나'가 없는 진아이다.

 

[본문]

마음이( 감각기관을 통해) 밖으로 나가는 것을 되돌려 자신의 근원인 심장이라는 진아에 고정하여,

'나'라는 비천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게 늘 (진아에) 안주하는 것이야말로 자기탐구 방법이라네.

 

[사두 옴] :

<나는 누구인가?>에서 "늘 마음을 진아 안에 고정해 두는 것만이 자기탐구입니다." 라고 하는 부분을 참조하라. (라마나 마라리쉬 저작전집,52페이지)

 

[본문]

심장 속에서 의식으로 빛나는 지고의 그것을 차분히 홀로 있으면서 내적으로 탐구하지 않고,

바깥에서 찾아 도처에서 물어보는 것은, 물에 빠진 사람을 찾겠다고 등피없는 등불을 들고 물 속으로 들어가는 격이네.

* '등피 없는 등불'은 물과 접촉하자마자 꺼질 것이고, 따라서 실종자를 찾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존재-의식(진아)으로서 빛나는 아루나찰라를 등한시하고 바깥에서 신을 찾는 것은 등불을 들고 어둠을 찾는 것과 같다고 한, <아루나찰나 8연시> 제4연ㅇㄹ 참조하라.

 

[본문]

다섯 껍질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진아를 심장 속으로 들어가서 직접 만나 보지 않고, 지식인 경전을 붙들고 탐구하는 것은 경전탐구에 불과하니, 그것이 어떻게 자기탐구일 수 있겠는가?

 

[사두 옴] :

"진아는 다섯 껍질 안에 있지만, 경전은 다섯 껍질의 밖에 있다. 그러니 다섯 껍질을 부정함으로써

안에서 발견해야 하는 진아를 경전에서 찾는 것은 부질없다"다고 한 <나는 누구인가?>를 참조하라.

 

[본문]

가슴 속 호흡을 제어하여 심잠(心潛)을 통해 (마음의) 동요를 그치게 했을 때 일어나는 고요함 속에서,(분산되어 있던) 다섯 가지 감각 지각이 단 하나가 된 내면의 ('나'라는) 의식으로써 예리하게 탐구하여, 결함없는 존재의식을 알라.

 

[사두 옴] :

심잠(心潛)은 마음이 어떤 대상도 알지 못하는 상태인데, 여기에는 잠과 합일무상삼매의 두 종류가 있다. 잠 속에서는 마음이 진아로부터 어떤 빛도 받지 못한다. 합일무상삼메에서는 마음이 진아로부터 빛을 받기는 하나 그것이 '나'라는 생각으로서만 머물러 있어, 원습들이 활동하지 못하고 소멸되지도 않는다. 우리가 둘 중 하나의 심잠(心潛)에서 깨어나면, 원습들이 전과 같이 활동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 속에 아무리 오래 머물러 있어도 거기서는 전혀 진보가 이뤄지지 않는다.

그래서 설사 그것이 합일무상삼매라 하더라도, 심잠(心潛,無記)에 멈춰있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하는 것이다. 심잠(laya,무기)은 마음이 외부의 감각대상들을 생각하지 못하도록 제어되기 때문에 생겨난다. 이 상태에서는 마음이 헤메지 않고, 따라서 편안하기는 하지만 우리가 더 이상 진보할 수 없다.

마음이 심잠에서 깨어날 때는 그것이 늘 고요하고 평화로운 것이고(대상들 쪽으로 헤메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우리는 그런 평화로운 마음을 이용하여 그것을 자기주시 쪽으로 돌려야 한다.

자기 주시를 통해서만 우리가 심멸(心滅-마음의 소멸)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연에서는 스리 바가반이 <가르침의 핵심> 제 14연에서 말하고자 한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거기서 당신은, 호흡 제어에 의해 고요해진 마음이 "한 길" (타밀어로 '한 길' 산스크리트어는 일념)에 몰두하면 그 마음이 소멸됳 것이라고 했다.

이 "한 길"은 본 연이 분명히 하듯이 자기탐구일 뿐이고, 그래서 우리는 일부 다른 책들에 기록되어 있는 다른 모든 해석들은 옳바르지 않다고 확실히 결론 지을 수 있다.

 

                                                                              - 스리 무루가나르 지음, 대성 옮김 <진어화만>-